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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민 영정과 유물 유형문화재 제144호

작성자터프가이|작성시간12.02.02|조회수243 목록 댓글 0

 

소장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신복리

소유자: 연안이씨 종친회

관리자: 연안이씨 종친회

문화재 지정번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44호   문화재 지정일 1992년 12월 31일

 

공신으로 책봉될 당시 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영정

 

선생이 공신으로 책봉 될 당시에 그린것으로 보이는 영정 은16세기 말~17세기 초의

영정은 91㎝×163.5㎝ 크기이며 16세기 말∼17세기 초에 유행한 전형적인 공신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쌍학과 모란무늬 흉배와 각대를 갖추어 정1품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정장 관복 차림에 오사모()를 썼고, 얼굴과 몸을 왼쪽으로 향한 전신좌안칠분면의좌상()이다. 얼굴은 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의습 처리는 굵은 묵선으로 주름 몇 개만 그렸고 옷감무늬는 먹의 농담을 살려 세밀하게 나타내었다. 바닥의 붉은 채전()은 가는 붓을 세워 점묘식으로 문양을 찍어 첨모직()을 표현하였다.

시호족자(諡號簇子)

시호 족자(諡號簇子 가로 74cm x 세로 102.5cm)는 선생이 돌아가신 1635년(인조 13)에  왕이 문희공 이란 시호를

내린 것으로 비단천에 증시문희공 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익호교지((文喜公謚號敎旨)

              교지(敎旨)는2점으로 ,선생의 시호를 내리는 내용을 담은 문희공 익호교지(文喜公謚號敎旨敎旨)

               와 중국 명나라 윤씨와 허씨 부인에 관한 내용을 적은 교지가 있다. 두부인 에 관한

               내용의교지는 선생이 호성공신 으로 책봉되던  당시에 하사 받은 것으로 보인다.

 

 

                영정함과 교지함은 두함 모두 배나무에 삼베를 입힌 후 두껍게 옻칠을 한 것으로,고사리 모양

                 의 경첩과 국화 무늬로 장식하고 있어 17세기 초 목공예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된다.

 

 

                                                                                   오봉 이호민 유고집

 

 

                                                                                 오봉선생 문집

 

 

1553(명종 8)∼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

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증조부는 호조판서·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세범(世範)이다.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국주(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박씨(比安朴氏) 사직 여(旅)의

딸이다.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었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에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쳤다.

1595년에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에 참찬관(參贊官)을 거쳤다.

이호민은 1599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호민은 1608년에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이호민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1614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러자 〈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되어,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많이 작성하였다.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이다. 널리 애송되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 16권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
≪참고문헌≫ 光海君日記
≪참고문헌≫ 仁祖實錄
≪참고문헌≫ 五峰集
≪참고문헌≫ 海東名臣錄
≪참고문헌≫ 松江別集
≪참고문헌≫ 隱峰全書
≪참고문헌≫ 懲毖錄
≪참고문헌≫ 知退堂集
≪참고문헌≫ 楓皐集
≪참고문헌≫ 朝野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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