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칼럼 2010.1.18.월
가람 이병기와 연안이씨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인물이다. 그는 고종 28년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의 용화산 기슭 진사동에서 태어났다. 7∼8세가 되면서 가람은 한문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총명해서 이웃 간에 널리 재동으로 불렸다.
열여섯 살 때 충남 논산군 두마면 왕대리 은동의 광산김씨의 딸과 혼인했다. 가람은 어느 날 양계초의‘음빙실 문집’을 읽다가 깨달은 바 있어 신학문에 뜻을 세우게 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당시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전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학했다. 그 뒤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제2보통학교, 여산보통학교, 동광, 휘문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직생활을했다.
그는 교편생활을 하면서 국어, 국문학, 국사학에 관한 문헌을 수집했으며 시조를 중심으로 한 시가문학 창작에 전념했다. 1926년 시조회를 발기한 뒤 이어 가요연구회로 개칭한다. 1929년 "도봉산행", "낙화암을 찾는 길에" 등을 발표하여 신선한 감각과 묘사로써 수필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가람은 시조를 사실적인 시풍으로 바꾸고 부흥시켰다.‘시조란 무엇인가’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저서로‘역대시조집’‘근조내간선’‘시조의 개설과 창작’‘현대시조선총’‘가람문선’등이 있다.
1958년 수우제(守愚齊)로 돌아와 애란, 애주, 애서(愛蘭, 愛酒, 愛書)의 삶을 살다가 1968년 11월 28일 사랑하던 고서와 난 그리고 애시(愛詩)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연안이씨의 시조 이무(李茂)는 당나라의 장수였다. 그는 660년(신라 무열왕 7년)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을 따라온 중랑장이었다. 이무 는 전쟁이 끝난 후 신라에 귀화했다.
조정에서는 통일신라에 기여한 그의 무공을 높이 사 연안백(延安伯)에 봉한다. 그래서 후손들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안은 황해도 연백군 일원의 옛 지명이다.
고려시대에 태자첨사 이습홍, 판소부감 이현여, 통례문부사 이지, 대장군 이송 등은 연안이씨의 맥을 이어온 4대 산맥이다. 이들의 후손이 번성하여 오늘날 연안이씨의 주류를 이룬다.
조선시대에 250명의 문과 급제자와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8명,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해 조선의 명문으로서 위세를 떨쳤다. 영조와 순조 때에 부자 대제학, 3대 대제학을 배출하여 명성을 날리고 그와 함께 8정문(旌門)을 자랑한다. 효자 이지남에서부터 아들, 손자, 며느리 8명이 효부, 열녀로 정문을 받아 8정문 집안이 되었다.
이석형은 조선 초에 연안이씨의 번성을 가져온 중흥조다. 세종 23년 문과에 장원, 세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6대를 섬긴 명신이었다. 이정구는 손꼽히는 한문학의 대가다. 이석형의 현손인 그는 임진왜란 때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설서(設書)가 되었다. 명나라의 요청으로 황신 등과 함께 뽑혀서 중국에서 경서를 강의했다.
이호민은 연안이씨가 자랑하는 외교의 명수였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이조좌랑으로 명나라의 구원병을 끌어들이는데 공을 세웠다. 그 후 부제학에 올라 대명 외교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탁월한 외교 솜씨를 발휘했다. 전란이 끝난 후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이귀(李貴)는 학자의 가문인 연안이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선조 36년 문과에 급제, 평산부사로 있다가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고 사직했다. 1623년 반정을 주동하여 인조를 옹립했으며 대사헌, 좌찬성에 오르고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동령은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다.
집성촌은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 백양리 이다. 190여 가구 중 반수가 넘는 150여 가구 7백여 명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다. 이곳에 뿌리를 내린 인물은 세종~성종대의 명신 이석형의 손자 이효장 이다. 그가 약 4백년 전 사화를 피해 첩첩산골로 은신하여 황무지를 개척하며 자손들을 번성시켰다.
조선시대에 모두 89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문과 급제자 250명은 전주이씨, 안동권씨, 파평윤씨, 남양홍씨, 안동김씨, 청주한씨, 광산김씨, 밀양박씨 다음가는 순이다. 인구는 2000년 현재 145,440명이다.
( 정복규 익산신문 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