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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사 이정구(李廷龜) 선생묘 (경기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79호)

작성자터프가이|작성시간12.02.01|조회수177 목록 댓글 0

월사 이정구(李廷龜) 선생 묘  (경기도 지정문화재 기념물 제79호)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5~1번지

 

 

 

이정구 선생묘

문화재명 : 이정구 선생묘
지정번호 : 기념물 제 79호
지정일 : '84.9.12
관리인 : 이용훈
전화번호 :582-1557
소재지 :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산 115-1

가평군 상면 태봉리 산11번지에 있는 월사 이정구(1564∼1635)의 묘소로 1984년에 경기도기념물 제79호로 지정 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그의 후손인 이명한(1595∼1645), 이일상(1612∼1666), 이광수 등의 묘가 함께 조성되어 있다.

묘제를 보면 봉분을 향하여 오른쪽 바로 앞에 묘비가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긴 댓돌로 쌓은 기단 1단이 있다. 이 기단 앞에 상석,향석, 동자석, 망주석, 문관석 등 상설이 배설되어 있다. 묘비는 비신, 비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빗몸돌은 높이가 140㎝, 폭이 아랫쪽 59㎝, 위쪽 63㎝로 위로 가면서 넓어지는 형태이며, 비자릿돌은 가로 98㎝, 세로 60㎝, 높이 27㎝이다.

월사 이정구의 신도비는 1656년에 건립된 것으로 당시에 좌의정이던 김상헌이 시문을 짓고 전을 썼으며, 영의정이던 이경석이 글씨를 썼다.

 

 

 

이정구 [ 李廷龜 ]1564~1635

본관 연안(延安)
이명 자'성징(聖徵)', 호'월사(月沙)', 호'보만당(保晩堂)', 호'치암(癡蓭)',

호'추애(秋崖)', 호'습정(習靜)'
가족 아버지'이계(李啓)'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성징(聖徵), 호는 월사(月沙) 또는 보만당(保晩堂)․치암(癡蓭)․추애(秋崖)․습정(習靜)으로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

세조 때의 명신인 석형(石亨)의 현손이며, 문장으로 이름이 있던 현령 계(啓)의 아들로,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문장가문(文章家門)에서 출생, 유년 시절부터 비범한 재질을 보이기 시작하여 8세에 벌써 한유(韓愈)의 <남산시 南山詩>를 차운하는 놀라운 표현이 있었고, 14세 때에는 승보시(陞補詩)에 장원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며, 22세에 진사, 5년 뒤인 선조 23년(1590)에는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되었는데, 임진왜란 중인 선조 26년(1593)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장구 大學章句>를 강론하여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대학강의 大學講義≫로 간행되었다.

34세 때에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의 서울에 갔고, 다음해인 1598년 명나라의 병부 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에서 왜병을 끌어들여 중국을 침범하려 하자 <조선국변무주문 朝鮮國辨誣奏文>를 지어 진주부사(陳奏副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 그를 파직시켰다.

그 뒤 대제학에 올랐다가 1604년 세자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국을 내왕하였고, 중국 문인들의 요청에 의하여 100여 장(章)의 <조천기행록 朝天紀行錄>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받아, 그 뒤 병조판서․예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그의 생애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이었으므로 치군택민(致君澤民)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관인 문학을 성실히 전개해 갔다.

이 점에서 그는 정통적인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을 보인 셈이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장유(張維)․이식(李植)․신흠(申欽)과 더불어 이른바 한문사대가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명나라의 양지원(梁之垣)은 호탕, 표일하면서도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아 미적인 효과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하였으며, 장유도 그의 재기(才氣)를 격찬함과 아울러 고문 대책(高文大冊)의 신속한 창작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조도 그의 문장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그의 문학은 선린외교(善隣外交)에 있어서 문학이 가지는 공용성을 십분 발휘한 것으로 일단의 문학사적 의의를 갖지만, 문학의 독자적인 가치를 다소간 인정하여 본원적인 면에서 문학을 이해하려고 한 문학론을 피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문학 자체의 독자적 영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넓히고 진실된 감정과 사상을 처리한다는 면에서는 다소간 미흡한 점이 보인다. 시문집으로는 그의 문인인 최유해(崔有海)가 숙종 46년(1720)에 편간한 ≪월사집 月沙集≫ 68권 22책이 전한다.

경력사항- 14세에 승보시에 장원 1590~ 선조 23년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1592~ 임진왜란을 만나 왕의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 설서가 됨 1593~ 선조 26년 명나라의 사신 송응창(宋應昌)을 만나 <대학장구 大學章句>를 강론 - 병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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