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전靑田 이상범 李象範
계곡의 추경
청전이상범은 근대 작가 중 가장큰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데 독창적인 화풍도 화풍이려니와
한국적 산하를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그려낸다점에서 그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이다.
사실 조선 시대부터 토족적인 그림을 그려왔으나 기법이나묘사는 중국풍을 벗어나지
못한것도 사실이다.
이점은 청전도 역시 마찬가지 이지만 한국의 산야를 사실적이면서도아름다운 구도를 짜임새
있게 정리 하여누구나 정감을 느낄수 있는것은 대중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그림이기 때문
이리라.
어디서나 흔히 볼수있음직한 배경이면서도 그 구도에는 상당히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그의 그림을 보노라면 심상이 안정되며 깊이 빠져들게 되는것은 그만의 독특한 필법
에 기인 한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선을 당기는 힘을 가진작품성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선면계변한취扇面溪邊閑趣] 1967 / 종이에 수묵담채 / 30×60cm / 개인 소장
앞의 선면화와 함께 1967년 이른봄에 그려진 것이다. 그의 그림으로는 드물게 계곡 위의 오두막집에서 흐르는 물을 한가롭게 관조하는 고아한 풍취를 다루었다.
가을색을 나타내는 담홍색과 담청의 맑은 대비, 자잘한 필촉의 경쾌하고 깔끔한 조화 등이 화면에 고담한 문기文氣와 시적詩的인 운치를 넘치게 한다.
하경산수夏景山水 己亥(1959)년 지본담채 68x34.5cm
夏景의 경치를 그린 작품으로 무성한 숲 사이 고택이 그려져 있으며 그 아래 펼쳐지는 전경에 시원한 냇가가 펼쳐지고 있어, 한여름의 청아함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또한 1958년작으로 청연산방靑硯山房에서 그린 작품이다.
청전 이상범 靑田 李象範, 1897~1972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 창조-청전양식
청전은 30대에 최고의 작가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예술가로서 첫 번째 황금기를 맞는다. 1926년부터 10년 가까이 신문사 미술기자로 활동한 시절이다. 신문의 수많은 삽화·컷·기행 스케치 등을 통해 서양화식 조형기법을 체득했으며, 삽화작업에 참여한 연재소설만 40편이 넘을 정도였다. 반면 해방 이후 40·50대는 고난의 시기였다. 신문사 재직시절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작가로 몰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창설시 심사위원에서도 제외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1950년대 초 드디어 한국 산수화풍의 새로운 전형이라 평가받는 특유의 '청전양식'을 만들어 작가적 입지를 재확인시킨다. 한편에선 그의 독창적인 작품제작기법을 일명 '대나무 잎 터치기법'이라고도 부른다.
부창부수
초가을
19 [한촌] 1960년대 / 종이에 수묵 담채 /61.5X181.5cm/ 개인 소장
[서림귀려]1960년말
[귀가 歸家] 1968/종이에 수묵 담채/66X180cm /개인소장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야산과 그 중턱 언덕위의 초라한 초가집, 거기를 향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낚시대를 맨 촌부의 구부정한 모습, 그 아래로 방향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흘러가는 시냇물 등이 낯익은 경관을 이루고 있다.
수묵의 담채로 선염된 화면은 펜촉으로 그은 듯한 자잘한 필획의 세선들로 미묘한 진동을 일으키고, 자연과 내적으로 공명된 자가의 심회는 원숙한 기교의 경지를 통해 담담하면서 정감어린 풍경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 그림은 발병으로 건강이 상실되기 바로 전해에 그린 것으로 노경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구도자적인 성실한 자세로 일관되게 추구해 온 강직하면서 진솔한 그의 예술세계를 느끼게 한다.[금성]
국화
[四季山水] 1968/종이에 수묵담채 /각폭 32.5X128cm 개인소장
[모추] 1960년초
추림유거秋林幽居] 1966년 / 종이에 수묵담채 / 126.6×80.5cm / 개인소장
[호암] 청전이 가장 즐겨 그렸던 계절은 가을이다. 봄날의 화창함,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스산함, 겨울의 적막함이 모두 계절감에 어울리는 적절한 필치로서 그려지지만, 유독 가을풍경이 많은 것은 청전의 심의가 가을 산야의 스산한 야취에 닿아 있으며, 그것은 곧 그가 살아왔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래서 청전 말년의 가을 풍경에서는 추수기의 풍요로움보다는 덧없고 허무한 감정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그림도 전경의 시냇물과 후경의 민둥산을 배경으로 둔덕이 잇는 중경에 찌그러진 초가집과 앙상한 나뭇가지 그리고 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촌부의 모습을 그린 청전의 전형적인 구도이다. 말년에 이르러 물결 표현은 다소 도식화되고 있으나 수묵의 담채로 선염된 화면의 세밀한 필치의 선들은 여전히 활달한 힘을 간직하고 있다.
화면 왼족 하단에 추림유거란 화제와 함께 '丙年新正靑山房南窓下'라고 적고 있어 1966년 병오년 양력 정월에 그의 화실인 '청연산방'의 남쪽창가에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모추 暮秋] 1962년 종이에 수묵담채 29X66cm
[산가모연 山家暮煙] 1952년 종이에 수묵담채 49X90cm 개인소장
[산로정취(山路情趣)]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49×126㎝.
[설촌(雪村)] 1966년, 종이에 수묵담채, 190×22㎝
[長 江 萬 里] 1968년 종이에 담채 폭 56cm 個人 所藏
[춘산유거(春山幽居)] 1960년대, 종이에 수묵담채, 83×84㎝
쟁기질 하는 농부(봄)
여름
모추
모추 1965 년작 종이에 수묵 담채 60 x 178 cm 개인소장.
사계산수 병풍 1962년 종이에 수묵 담채 각58.5 x 28cm 개인 소장
산가 춘색
산가춘색 부분도
산가 춘색 1960년대 중엽 종이에 담채
산가청류 (山家淸流) 1960~ 종이에 수묵담채 63~129cm
초가을
추경
추경 산수
추경산수
추경산수
춘경산수
하경 산수
[모설] 1963년 종이에 수묵담채68x148cm개인소장
산촌 설색
부창 부수
춘산 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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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1920년대 종이에 채색 142 x31.5 개인 소장
청전]이라 쓴 낙관 글씨가 1920년대 중엽이후의 그것과 다른 평범한 필획으로 되어있는 바로 미루어 그전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彩筆의 버드나무 가지들과 그 밑으로 약간 나타나 있는 복숭아나무 꽃가지의 섬세하고 정밀한 묘사가 역시 심전풍의 여러 기법을 모방하던 시기인 1920년대 초기의 것임을 말해 주는 희귀한 예이다.
水墨線으로 간결하게 처리된 버드나무 줄기의 경쾌함과 구도상의 그 묘가 대단히 감각적이고, 그 위아래로 가져온 흑갈색 두 마리 새의 표정과 그 존재가 봄날의 한적함을 더해주는 청랑한 분위기를 자아 내고있다.
청전 靑田 이상범 李象範(1897~1972)은 근대 한국화를 빛낸 화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30대후반에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지금도 대표적인 한국 근대 미술가를 뽑을 때면 항상 그는 첫번째로 손꼽힌다. 그가 이처럼 유명한 것은 산수화에서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독창적인 화풍을 이룩하고 우리 근대 미술의 자부심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이러한 개성과 창의력은 우리의 자연과 고향에 대한 민족 공통의 정서와 미의식을 자극하고 국민적 공감력을 지닌 한국적 풍경을 탄생케 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게 생각된다.
이상범은 구한말에 무반武班의 아들로 태어나 전통세계의 가치와 일제시기의 문화적 개량주의 경향에 토대를 두고 당시 화단등용의 거의 유이란 통로였던 관전官展을 통해 명성을 쌓은 화가이다. 따라서 그의 일부 행적과의식세계와 화풍에는 식민지 관전 화가로서의 한계가 엿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한계에 매몰되지 않고 우리 자연의 향토성과 서정성을 새롭게 발견하고 표현하는데 평생을 바쳐 노력했다.
고전규범을 답습하던 종래의 정형산수화에서 서구 풍경화의 사생개념과 화법을 도입하여 근대저인 사경산수화를 앞장서 개척했던 이상범이 추구한 향토적 자연은 민족정서와 감정과 심미의식을 배양시킨 모태로서의 의의와 결핍된 현실을 초월하는 소망 충족적인 이상세계로서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중세적 가치나 이념과 밀착되어 우리 산천의 특정 경관을 주로 다루었던데 비해 그가 추구했던 것은 평범한 야산과 시냇물이 보이는 시골과 산골의 일상적인 풍토미였던 것이다.
이상범은 바로 이러한 향토경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토속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계절감과 아침, 점심, 저녁의 미묘한 기상감의 무궁한 조화와 더불어 '청전양식'으로 불리는 특유의 개성적인 수묵화법을 통해 담아냄으로써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성취했다. 그리고 이를 무대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온 우리들 삶의 기본 정서를 환기시켜주는 촌부의 순박한 모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한국인 고유의 심성을 대변하는 보편적인 서정 세계를 창조했던 것이다.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이상범의 산수화를 보고 심취하여 "산도화3"에서 그 감흥을 읊었던 것도 그의 작품세계가 가장 향토적이며 전통적인 저어가 어린 풍경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이상범은 미술의 사회적 기반이 아직 취약했던 근대기에 관변 화가라는 제한된 의식세계 속에서도 개인과 민족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자각 위에서 새로운 전형의 한국적 풍경을 이룩하고 대중적 친밀성을 획득한 국민화가인 것이다
이상범은 조선왕조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가 바뀌던 해인 1897년 9월 21일 충남 공주군 정안면正安面 석송리石松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해군수平海郡守와 칠원현감漆原縣監을 거쳐 당시 공주부 영장營將겸 토포사전주중군討捕使全州中軍이던 이승원李承遠이었고, 어머니는 김응수金應秀의 장녀 강릉 김씨였다. 어머니는 부친의 첫부인이었던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사망 뒤 후처로 1888년 시집 와서 2남 상우象禹와 3남 상무象武에 이어 4남으로 상범을 낳았던 것이다.
이상범의 집안은 전주 이씨 덕천군德泉君파로 9대조와 8대조가 무반武班 관직을 지낸 이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해 잔반殘班으로 조락했다가 할아버지 대에 이르러 생원으로 행세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무과武科보다 음보제도를 통해 등용되었던 듯하며, 첫부인 소생인 장남 상덕象悳도 무관으로 키웠던 점으로 보아 무반 가문으로 집안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상범이 태어난지 6개월 만에 평양의 새로운 임지로 발령을 받고 부임을 준비하던 부친이 50세를 일기로 갑자기 타계함으로써 그는 유복자와 같은 상태로 삶을 시작해야하는 새로운 운명을 맞게된다.
이상범의 유년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부친 사후에도 공주를 떠나지 않고 어린시절을 보내다 10살되던 무렵 어머니를 따라 그 소생 삼형제가 서울 돈화문 부근으로 이주했던 사실만이 전한다. 이주 배경은 잘 알 수 없지만 교육열이 높았다고 전하는 어머니의 결단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이상범은 상경 후 2년이 지나서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게 되었고, 신식 초등교육도 14살이 되던 해부터 시작하였다. 이처럼 수학시기가 다소 늦어진 것은 경제사정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에 측량학교와 보성고보에 다니는 두 형들의 뒷바라지에 우선 치중했기 때문이 아닌가 본다.
이상범이 사립보흥학교私立普興學校에 입학한 해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시작되던 1910년 이었다. 그는 매학기 시험에서 연속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총명함을 보였다. 학업이 우수했을 뿐 아니라, 품행이 단정하고 여러 사람에게 모범을 보여 당시 총독부 부윤府尹이던 김곡충金谷充의 명의로 선행 표창장과 함께 연상硯箱을 상품으로 받기도 했다. 2년제인 보흥학교를 졸업하고 친일귀족 자작 이기용李埼鎔이 이 학교와 함께 설립했던 사립계동桂洞보통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 후에도 성적이 뛰어나 반장으로 뽑혔으며, 4학년 졸업 때는 우등상을 받았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이상범은 이와 같이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바른 모범생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배경에는 본인의 자질뿐 아니라, 엄했던 것으로 전하는 어머니의 가정교육이 적지 않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효자로 소문났던 그가 평생을 성실, 근면하고 겸손한 자세로 살았던 것도 이러한 홀어머니의 영향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상범이 1920년대 중엽 이후 조선미전의 스타로서 이름을 날릴 때 그의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높여주었던 것은 신문 삽화가로서의 활약이 아니었나 싶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1925년 초에 [시대일보]를 통해 소설 삽화를 처음 그려 본 그는 1927년 1월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잠시 일하다 그해 10월 초순에 동아일보사 학예부 미술기자로 입사하여 각종 삽화와 도안. 사진 수정 등의 일을 전담하게 된다. 동아일보사에서는 1936년 8월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퇴직 당할 때까지 1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 수많은 삽화와 컷과 기행 스케치와 계절그림을 제작했는데, 그 가운데 연재소설의 삽화만 40편 넘게 담당했었다.
이 연재소설은 당시 신문의 판매부수를 좌우했을 만큼 독자들의 관심이 높았던 부분으로, 특히 그가 그린 이광수의 [단종애사端綜哀史](1928~29년) 217회와 [흙](1932~33년) 217회와 김동인金東仁의 [젊은그들](1930~31년) 327회, 윤교중尹敎重의 [흑두건](1934~35년) 226회, 심훈沈熏의 [상록수](1935~36년) 127회, 김말봉金末峰의 [밀림](1935~36년) 389회 등은 장안의 종이값을 올렸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삽화는 소설의 재미를 더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에 [동아일보]가 당시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데 그도 일조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명성과 대중적 인기도 함께 높아지게 되었다고 본다.
신문 삽화가로서의 이상범의 업무는 조선일보사와의 구독률 경쟁으로 조.석간 2회 발행하게 되면서 더욱 격심해져 자신의 창작세계를 새롭게 개척하고 보다 치열하게 심화시키는데 다소 지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삽화를 그리기 위해 이들 소설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어야 했던 그로서는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역사물과 시대물 소설류와 농촌 및 귛샹소설 등을 통해 노경적 삶에 토대를 두고 형성되었던 우리 민족 공통의 정서와 그 대중적 공감력에 대한 이해 증진과 더불어 개인과 민족이 공동운명체라는 자각을 점차 일깨우면서 '청전양식'을 향해 주제의식을 심화시켜 나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이상범은 30대에 작가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확대하면서 인생의 첫 번째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1927년 8월부터 부인 여주 이씨와 결혼 10년만에 사별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다음해 초 본관이 수원인 백삼봉白三奉 규수와 재혼하여 가정의 안정을 되찾고 거의 한 살 터울로 첫부인 소생의 장남 건영建英에 이어 2남 건웅建雄과 3남 건호建豪, 4남 건걸建傑을 낳음으로써 사형제의 이름 끝자를 '영웅호걸'로 붙이고자 한 소망을 성취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30대 생애는 당시 민족 언론기관이던 동아일보사 학예부 기자 시절을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조선미전의 연속 특선작가와 서화협회의 간사 등으로도 이미 명사 대열에 끼어 있었으나, 신문사의 학예부원과 연재소설의 삽확로서 이광수와 최남선.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박종화. 이은상. 김기진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과 교유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계를 통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다. 당시 일급의 문화 지식인들이 출입하던 요정인 명월관의 단골손님 명단에도 올라있던 그는 오척미만의 단신이면서도 두주불사의 이름난 음주가였을 뿐 아니라, 술자리에서의 재담과 춤솜씨가 일품인데다 성품도 소탈하여 누구보다 친구가 많았으며, 염상섭의 '횡보橫步'란 호가 그의 게 그림에서 유래된 것을 비롯하여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상범은 이러한 30대를 통해 앞으로의 작가적 삶을 이끌어 갈 예술관과 주제이념 등, 의식세계의 골격과 기반을 형성하고 심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밝힌 적은 없으나, 민족 우파적인 문화적 개량주의 경향과 더불어 이런 흐름과 관련된 이광수와 최남선. 염상섭 등의 유미주의와 효용론이 복합된 관점을 공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개인으로서이 자기 개성과 시미적 표현을 강조하는 유미주의와 민족과 인생을 위한 효용론에 기초하여 예술을 통해 자신과 민족의 정신과 정서를 나타내고 감명과 감화를 주고자 한 견해를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의식과 사회적 현실인식이 배제된 개인과 민족의 관념적 유착이란 한계가 있지만, 양자가 공동운명체라는 주체의식을 각성시키면서 '청전양식'을 창출하게 하는 중요한 이념적 기반이 되었다고 본다. 그가 창작 생애의 평생 신조로 삼아 실천하고 강조했던 근면서도 앞서 지적했듯이 엄격한 편모의 훈도와 함께 위대한 예술은 그만큼 성실하고 큰 노력 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고 주장한 최남선의 예술론에 의해 의식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범이 사경산수화를 통해 추구한 제재는 향토적 자연이었다. 이것은 우리 특유의 풍토미를 지닌 자연경관의 정취와 운치를 다룬 것인데, 당시 조선 향토주의와 밀착되어 확산되었던 것으로 양면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러한 조류는 1920년대 중엽부터 새롭게 부상된 프롤레타리아 예술관에 의한 사회주의 선동 수단으로서의 계급주의 미술에 반대하는 순수미술론과 민족주의 미술로서 성행하면서 서양미술의 모방적 이식단계에서 탈피하고자 한 반성적 측면과 민족적 동질성과 전통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주는 의의를 제공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파시즘의 강화와 밀착되어 일어난 국수적인 신일본주의 성향의 효방과 함께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아주의의 지방색으로 조장됨으로써 일본식 미감과 서정양상을 동양정신의 보편성으로 삼아 조선화하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따라서 사경산수화의 경우 일본 관전의 신남화新南畵 사경화풍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여 향토적인 정취에 목가풍의 낭만적인 서정성을 좀 더 가미하게 되며, 화면도 원경 공간으로 구름과 안개에 의한 운무雲霧 효과를 증진시켜 점차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관전화가로 성장한 이상범도 이와 같은 식민지 문화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조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의 향토경을 통해 조화롭고 유현한 자연미와 함께 민족적 정서가 배인 풍토미를 추구하면서 조선적인 풍경과 그 고유한 정취를 발견하고 창출하고자 했다는데 특징이 있다. 즉 향토적 자연을 무엇보다고 우리민족의 정서와 감성과 심미의식을 배양시킨 모태로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풍경을 망국亡國이란 소속감 상실의 심회로 바라보면서 황량하고 적료한 느낌으로 담아내고자 했다. 이러한 의식은 그가 1935년 전주지방을 스케치 기행하면서 토로했던 감상을 통해서도 부분적으로 엿볼 수 있지만 <수토瘦土>, <황원荒原>등으로 붙인 그의 그림 제목에 대해 "망국의 폐허에 선 값싼 우국지사의 비분강개한 탄식"이라고 한 당시의 비판에 의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그가 가을과 겨울의 소산한 풍경을 배경으로 옛성문과 성곽을 그린 것이라든지, 1932년 현충사 중수운동에 따라 신축되는 영정각에 봉안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초상을 충의의 화신이며 초인적인 영웅성을 강조하면서 심혈을 기울여 그린 것과 그 완성 날자를 소화년기昭和年紀로 적지 않고 그림 뒷면에 몰래 단기로 써넣은 것 등도 비록 회고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