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도
산수도 종이에 수묵담채 1943
매화 선면
雪嶽楓谿圖
산수도 심산춘래(深山春來) 비단에 수묵담채
종이에 수묵담채 1942
산수도 종이에 수묵담채 1953
추경산수도
배렴 (한국 화가) [裵濂]
1912 경북 금릉~1968.
동양화가.
배렴 /배렴호는 제당(霽堂).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금릉청년학관 중학과에 다녔다. 이후 서울로 올라와 서학 공부를 시작했으며 1929년 18세 때 이상범에게 전통화법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해 10월 제9회 서화협회전에 〈만추 晩秋〉를 출품했다.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첫 입선한 후 선전이 끝난 1944년까지 계속 출품했다. 1935년 서화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1940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8·15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그 산하에서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미술위원,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부 회원, 조선미술협의회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청구미술원, 조선서화동연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예술원 회원, 대한미술가협회 최고위원 등을 거쳤다. 1945~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출강했고 1965년에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남종화의 전통을 이어 적묵의 산수(山水)와 단아한 화격(畵格)을 중시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으로 〈산수도〉(1960)·〈설악영봉〉 등이 있다.
<산은 높고 높고/ 물은 길고 길고/ 구름은 둥실둥실/ 바람은 맑고 맑고/ 그 사이 임과 자연과/ 어느 건 줄 몰라라/ 해뜨고 달이 지고/ 봄 오고 가을 가고/ 흐르는 세월 속에/ 자취는 남고 남고/ 저 산수 가슴에 새겨/ 웃고 웃고 살과저>
이 시는 노산 이은상 선생이 연암 선생 수연에 지은 것으로, 제당(霽堂) 배렴(裵濂) 화백의 '水山晩秋'(수산만추) 그림 위에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이 화제를 겸해 글씨를 썼다.
흔히 말하기를, 사람의 가치는 죽고 나야만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술가의 평가도 그 작가가 죽은 뒤 정확한 평가를 할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위의 '수산 만추'에 이름이 새겨진 분들이 다 훌륭하고 유명인사인데,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예술가들은 예술창조를 단시일 내에 이룩하는 단거리형(短距離型)의 천재가 있는가 하면, 인생의 중년에 완성하는 중거리형(中距離型), 그리고 장수를 누리면서 그야말로 완열의 경지에 이르는 장거리형(長距離型) 등이 있다.
이렇게 볼 때 배렴은 확실히 중거리형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57년이라는 생애 속에서 꾸준한 노력과 치밀한 자기추진(自己推進)에 따라 살아온 그의 발자취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주지적(主知的)이고 정적인 작가로서, 그의 선비다운 진중한 몸가짐과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고요한 품격은 그의 생활에서도 엿볼 수 있었거니와 그의 작품 속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한결같은 그의 수묵산수에서의 집착이나 탐닉은 그가 양(量)의 예술가가 아니라 질(質)의 예술가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이며, 그가 체질적으로 주지적·정적인 작가라는 것을 나타낸다.
경상도에서 태어난 제당은 6남매 중의 장남으로, 인습에 따라 15세 중학생 때 결혼을 했다. 그가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란 전부터 공부하고자 한 서예 연구의 부산물이라고도 한다. 1928년 17세 때에 단신 서울로 올라와 서예와 사군자 공부를 할 무렵 사사(師事)한 분이 곧 청전(靑田) 이상범이었다. 그 즈음의 한국화단은 아직도 조선조적(朝鮮朝的)인 미의 세계를 무비판적으로 이어받아 남화산수(南畵山水)와 사실적인 대상 처리로써 아직도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러한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러한 저조한 전체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적 시각으로 새로운 세계를 투시하려는 작가들이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청전의 문하생으로 화업을 시작했고, 그와 같은 수묵산수 속에서 미의 전통을 이어가려 했던 화가 배렴을 통하여 20세기 전반기 한국 동양화의 흐름을 알아볼 수 있다.
배렴은 1945년 8·15광복 이후 여러 미술단체에 참여하여 미술운동의 핵심에서 활동하였고, 이 현장은 그가 일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의 인상으로 보면 자연과 더불어 유유자적한 선비형의 인간이지만, 그는 그러한 밀실에서 나와 늘 단체의 핵심구성원으로 지냈다. 이 사실은 그의 소년시절의 환경이 작용한 오소리티에 대한 컴플렉스의 발현이라 추리되기도 한다.
1911년 경북 금릉 출생. 1929년 청전 이상범 화숙에서 수업. 1930년 선전(鮮展) 출품 입선. 1936년 선전 출품 특선. 1940년 화신화랑에서 개인전. 1943년 선전 출품 특선. 1948년 숙명여자대학 미술과 강사. 1949년 제1회 국전 추천작가 출품. 1953∼60년 국전 심사위원 역임.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56년 한국미술가협회 최고위원. 1963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국민장 수상. 1964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 1967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68년 9월 5일 별세. 1978년 동아일보 주관으로 배렴 회고전 개최 및 화집 발간.
▶배렴(裵濂)에 대하여
1911년∼1968년. 한국화가. 본관성산(星山:<※註:金山入鄕祖 成均進士(諱 允詢)의16代孫>) 호는 제당(霽堂).
경상북도 금릉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는 한편, 금릉청년학관 중등과를 수료하고 서울로 올라와 이상범(李象範)의 화숙(畵塾)에서 전통화법을 공부하였다.
1929년의 제9회 서화협회전람회(書畵協會展覽會)에 처음으로 〈만추 晩秋〉를 출품한 뒤 1936년 서화협회의 마지막 전람회까지 해마다 출품하였다.
1930년부터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에도 출품하여 입선을 거듭하고, 1936년과 1943년에는 〈요원 遼遠〉과 〈산전 山田〉이 특선에 올랐다. 그 시기의 전람회 출품작들은 전적으로 스승인 이상범의 작풍(作風)과 화의(畵意)를 본받은 수묵담채(水墨淡彩)로 향토적 풍경을 주로 묘사한 것들이었다.
1940년 29세의 신예로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2년부터 1943년까지는 청전화숙(靑田畵塾)동문전에 참가했다. 광복 직후에는 이응로(李應魯)·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조중현(趙重顯)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진로를 연다는 의욕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고, 1946년 3월 첫 회원작품전을 개최하였다. 그때 그의 출품작은 새로운 역사의 출범을 상징한 〈생신 生新〉이었다.
1947년 미군정청 문교부가 전국종합미술전을 열 때 심사위원을 지냈고, 1949년에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에는 처음부터 추천작가·초대작가로 참가하였으며 1953년부터 1967년까지 계속 동양화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에 영향력을 미쳤다.
1954년 대한민국예술원회원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를 역임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을 받았고 다음해 대한민국예술원상을, 196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수상하였다. 중년 이후의 작품은 온화하고 유연한 필치로 전통적 화격(畵格)을 실현시킨 독자적인 산수화와 화조화에 집중되었다.
1964년부터 홍익대학 미술학부 교수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