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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안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1892.6.24~1979.2.7)
본관상산
호이당
별칭양은
국적한국
활동분야예술(미술)
출생지인천
주요수상서울시문화상(1962), 대한민국예술원상(1968)
주요작품《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간성(看星)》《향로》
본관은 상산(商山), 호는 이당(以堂), 다른 이름은 양은(良殷)이다.
1892년 인천에서 출생하였다.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晋)을 사사하고, 한말 최후의 어진화가(御眞畵家)를 지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제미전(帝美展) 등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다.
1937년 친일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 평의원이 되어 같은 해 11월 일본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를 그리는 한편, 1942년부터 2년간 반도총후미술전(半島銃後美術展) 심사위원을 맡아 화필보국(畵筆報國)·회화봉공(繪畵奉公)에 입각한 친일 활동을 하였다.
그밖에 조선남화연맹전(1940), 애국백인일수(愛國百人一首)전람회(1943.1), 조선총독부와 《아사히신문》이 후원한 일만화(日滿華)연합 남종화전람회(1943.7) 등 성전(聖戰) 승리를 위한 국방기금 마련전에도 참여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추천작가,
1955년 국전 심사위원을 거쳐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교)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1920년 후반부터 화실을 개방하여 백윤문(白潤文)·김기창(金基昶)·장우성(張遇聖)·이유태(李惟台)·한유동(韓維東) 등 후진을 길러냄으로써 한국 회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림은 인물·화조·산수 등 폭넓은 영역을 다루었으나 중심 영역은 무엇보다 인물에 있었다.
선전 1회에 출품한 《미인승무도(美人僧舞圖)》 이래 주로 인물 소재를 다루면서, 종전 스타일과는 다르게 선묘(線描)를 억제하고 서양화법의 명암과 원근을 적용하였다.
단순한 전통 화법의 계승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화를 통해 사생주의(寫生主義)를 흡수하고, 또 양화풍의 화법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물화 외에 수묵담채(水墨淡彩)의 산수풍경, 문인화(文人畵)에서도 독특한 필력을 발휘하였다.
1962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65년 3·1문화상, 1968년 대한민국예술원상을 받았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으로는 《승무(僧舞)》《간성(看星)》《향로》《군리도(群鯉圖)》《춘향초상》《충무공 이순신 초상》 등이 있다.
간성(看星)
화 법:비단에 수묵 담채
크 기:138cm x 87cm
소장처:호암미술관
연 대:1927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김은호는 궁중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많은 초상화를 그렸다.
인물화에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이 "간성"은 1927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시원한 방안에 앉아서 화투놀이를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곱게 차리고 앉아 화투놀이를 하는 모습이나, 피우다 둔 담배 등으로 보아 여염집 여인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여인의 무료함 만큼이나 시든 꽃, 생기 없는 댓잎, 새장에 갇힌 앵무새 등이 여인의 심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그는 1925년 일본에 건너가 3년간 체류하면서 신일본화풍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영향으로 얼굴은 분을 바른 듯 희게 그리고 전체적으로 무척 화사한 느낌의 밝은 채색을 쓰고 있다.
참새와 매화
크기 : 40cm×137cm
화제(畵題) : 홍,백매화 , 참새
홍매, 백매가 어우러져 피어있는 나뭇가지 위에 부부참새와 자녀참새 다섯이 제각기의 모습으로 다정히 모여 있는 형태의 묘사가 사실적 정감과 더불어 향토적 친근감을 젖게 한다.
이당 선생의 매화 나무 위의 참새 표정의 정확한 생태묘사는 이당선생이 즐겨 그린 득의(得意) 화법이다.
이당 선생 이전에 참새들을 현실적으로 전개시켜 독자적 화제 양식으로 삼은 예는 거의 없었다.
이당 선생의 매화와 참새 그림은 이 작품에서 처럼 문인화풍(文人畵風)의 전통적 묵매수법(墨梅手法)과 잘 조화를 이루면서 전통계승의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는 가작(佳作)이다.
주논개(朱論介)(?-1592 )
이조 선조때의 기생.
성은 주(朱).
전북 장수(長水)태생.
진주병사(晉州兵使) 최경회(崔慶會)의 애기(愛妓).
임진왜란때 진주성이 함락되고 왜장들이 촉석루 에서 주연을 베풀고 있음을 기회로 취한 왜장 게야무라(毛谷村六助)를 끼고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가 남강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
후세에 논개의 정열(貞烈)을 찬양하여 그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부르고 비(碑)를 세우고 강 위에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祭)를 지냈다. 지금도 음력 유월 모일 진주시는 제사를 지낸다.
춘향사와 춘향영정
광한루원의 북문 동쪽 모퉁이에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 숲이 있는데 그속에 춘향사가 있다.
1931년 남원의 유지인 강대현.이현순의 발기로 처음 사당을 짓게 되었는데. 강대현은 아들 강봉기로 하여금 남원 권번선생,이백삼,최봉선,정광욱 등을 규합하여 기금을 모금하게 하였고, 기생들이 앞장서 진주,평양,개성,동래등 전국의 우명한 권번을 찾아 다니면서 성금을 모금하여 1931년 3월1일 사당을 건립하고 그해 6월20일 단오날 준공식과 함께 최초로 춘향제사를 올렸다.
"단심" 이라 씌여진 정문을 들어서면 사당 정면에 김태석이 쓴 "열녀 춘향사"란 현액이 걸려있고 사당안에는 춘향의 영정이 모셔져 있고 그 맞은편에는 당시 전라북도 지사 김서규가 지은 "춘향사기"가 걸려있다.
처음 사당을 지을 때 도편수는 강두희였고, 최초의 영정은 진주사람 강주수가 그려 기증한것인데 1939년 가을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광주사람 현준호가 기증하여 최초의 영정과 나란히 봉안했는데 6.25동란중에 훼손되어 1961년 11월 26일 내각수반인 송요찬이 이당 김은호가 그린 영정을 기증하여 현재까지 봉안하고 있다.
왕후 정전이었던 창덕궁 대조전 안의 동서 벽면을 위해 그려진 일월서상도 중의 서벽 장식화인 백학도는 1920년에 그려졌다.
동벽의 일경인 봉황도(오일영 이용우 합작)와 쌍을 이루는 정교한 묘선과 주채색의 전통적 궁전장식화로서 영원한 서기와 초자연의 생명감이 넘치는 이 작품은 이당 김은호의 청년화가 시절의 탁월한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 준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전통화법을 폭넒게 수학하여 일찍부터 특히 세필채색화에서 천부적 재능을 발휘했던 이당에게 백학도 주제가 단독으로 맡겨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17년에 대조전이 큰 화재를 당한 후 이내 복원이 착수되어 내벽의 진채장식화 문제가 나왔을 때, 창덕궁 왕실은 화단의 신예들에게 그 기회를 주기로 하여 당시 28세의 이당을 위시한 몇몇이 선정되었던 것이다.
전통적 수법과 고귀한 주제에 충실하며 특장의 채색화 기량을 최대한 발휘한 이 작품은 이당의 초기를 대표하는 역작이기도 하다.
화면 오른쪽 위에 천공에는 둥글고 흰 달이 서운과 더불어 둥실 뜨고, 그 밑으로는 창망한 바다가 펼쳐진다.
파도가 넘실대는 가까이에는 바위가 솟구친다.
그리고 화면을 반분하는 왼쪽의 육지에는 노송 청죽 암석 계류 불노초, 그밖의 목단꽃 등이 섬세한 필선과 화사한 채색으로 그려진다.
앞서와 같은 선경을 배경으로 바다쪽 멀리에서 적막을 가르며 육지로 날아드는 모두 열 여섯 마리의 눈부신 백학 떼는 전체 화면에 고결한 생명감과 시원한 움직임을 이룬다.
그리고 그 백학들이 구도상의 조화와 움직임의 표정들은 작가의 빈틈없는 기량과 완벽한 회화성의 결합으로 더욱 장엄한 풍경을 창출하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궁전 장식화로서의 이백학 주제는 배경의 노송 등과 더불어송령학수 로 흔히 표현되는 장생불사의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