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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

단원 김홍도

작성자터프가이|작성시간12.01.29|조회수692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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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군선도(群仙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53X28cm
호암 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풍채와 태도가 아름답고 성미는 너그럽고 선선하여, 자질구레한 일에 구애되지 않아서 신선과 같은 인물"이라고 조회룡(趙熙龍)이 편찬한 호산외기(壺山外記)의, 김홍도전(金弘道傳)에 언급되어 있다. 이와같은 기술(記述)은, 그가신선도를 즐겨 그린것과 견줄때 재미 있는사실이 아닐수 없다. 그는 산수,영모,도석인물, 풍속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수작을다수 님기고 있다. 만 31세인 1776년에 그린 군선도는 대작이면서 대표적인 도석인물 병풍에 드는 그림이다.조선 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살펴보면 그책에 게재키 위해 사진을 찍었던 1930년대
까지만 해도 하부에 성근필치로 그린풀이보이나 현재는 그부분이 잘려 나갔고 각폭의 세로모서리들도 조금씩 잘려 그림폭 사이의 연결이 다소 어긋나 있다.
이일연의 8폭 군선도는 별도의 배경없이 .크게 세무더기로 나뉘어 신선들에 의해, 그들이 표정및 자세만으로도 전혀 어색함이없는 화면 구성을 준다. 이점은 소폭의 풍속화첩에서도 살필수
있다. 김홍도전래작들은 도석인물화에 있어서 병풍, 족자,편화에 이르기까지많은유전작(遺傳作)을 살필수 있는데 이들도풍속화에서 처럼 배경을 함께 나타낸것과 배경없이 신선만 그린두가지 로 구분된다.배경이 있는 대폭으로는 6폭과8폭을된 서원아집병(西圓雅集屛)이 대표적이며 또한10폭 또는 8폭으로된고사(故事)를 소재로 한 고사인물화들이 있다.
또한 매폭마다 2~3명의 신선을 그려 전체가 한화면으서의 연결을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8폭의 연폭으로 그린것들도 전래되고 있다. 군선도에 등장한인물들은 선동을 포함해 19명에 이며 나귀 일각우(一角牛) 다람쥐,박쥐. 등 동물도 보인다. 이군선도는 속도감이 느껴지는 대담한 오대당풍(吳帶當風)의 묵선과 가늘고 고른 선들을 혼용하고 있다. 동적인 의습선(依褶線)은 바람에 나부끼는듯 하고 이와함께 신선들의자세또한 정지상태가 아닌 동적이어서 화면엔 생동감이넘친다. 감필의묘가발휘된 선묘 위주이나,부분적 으로 보이는 청홍담채의 설채는 화면에 유현한 분위기를 주며특히 얼굴의 설채는분명히 명암이 고려된 가채(加彩)로들어간 부분과 튀어난 부분의 구별이 분명히 나타나 있어 주목된다.
구도와 필력에 있어 조장 시절에 그가 도달한 틀잡힌 격조를 알려주는 군선도는 발군의 기량을과시하는 걸작이다.
이그림은 현재는 나눠서 족자로 꾸며져 있다. 왼쪽 하단에 병인춘사(丙寅春寫)의 간기(干紀)와30대에 주로 사용한 호 사능(士能)의 관서 (款署)가 있으며이어서 백문방인(白文方印) 김홍도인(金弘道印) 주문 방인 사능(士能)이 세로로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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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도 1~2폭 꽃바구니를 맨 남채화(藍采和) 복숭아를 든 하선고(何仙姑)







군선도3~4폭흰 당나귀를 거꾸로 타고 있는 장과로(張果老) 목악기를 치는
조국구(曹國舅) 악기를 든한상자(韓湘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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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도 6~8폭 왼쪽 맨앞 외뿔소를 타고 도덕경(道德經)을 든 노자(老子)를 선두로 복숭아를든
동방삭(東方朔) 그리고 두건을 쓴 종이권(鐘離權)과 두루마리에 붓을든 문창(文昌),
머리깍은 여동빈(呂洞賓)과호리병을 든 신선(神仙)의 행렬(行列) 모습등장하는 인물의
수가 많은탓에8폭중 3폭을 이용하였다.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 화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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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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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 18세기말 비단에 수묵담채 147.2X63.3cm 개인소장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왕궁 옛터인 만월대에서 열린 들잔치를 기념한 일종의 기록화 이다. 발문에 의하면 장준택등 칠순 노인64명이 그들 자손의 주선으로 평소의 숙원을 풀어 만월대에 모여서 큰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당시의 명가 김홍도에게 그리게 한작품이다. 화면은 송악산 서쪽만 배경으로 되어 있고 들찬치 는 고려 왕궁의 정전인 회경전 페허 위에서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한 인물은 250명이 넘고, 저마다 다른 자세와 동작이 치밀한 관찰을 거쳐 그사실적인 묘사에 정력을 기울인 자취가 역력히 드러나 있다. 이작품은 단원 특유의 일종의 부벽준법 의 특색이 배경에 분명히 두드러 져있고 설채도 매우 공을 들였으며 군중이 입은 옷의 담소한 색소까지 가려내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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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환어행렬도. 1795년경. 견본채색, 156.5 x 65.3cm,용인호암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화원으로 정조의 중요행사에 참여하고 기록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이 매우중요한업무였다.
이그림은 정조가 어머니 해경궁의 홍씨의환갑을 기념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잘나타내 주고 있는 그림이다.
화성에는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데 이곳에서 홍씨의 환갑잔치를열고 기록화로 남기게 한것이다.
웅장한 행렬이 장관이다. 산과 계곡을넘어 이어진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



선인송하취생(仙人松下吹笙) 18세기말 족자에 담채109X54.5cm고려대학교 박물관소장

김홍도 도석(道釋)인물은 전혀 배경을 그리지 않고 인물만 크게 부각시켜 그들의 표정 및 동작이나 자세만으로 화면 구성을 꾀한 것과 배경 속에 점경 으로 인물을 담는 두가지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대체로 전자가 앞선것으로 본다. 배경이 있는 경우도 서원아집병과 같이 정교하고 섬세하여 그야말로 화본풍 이르 나타내는 경우와 전혀이런 분위기와 는 거리가 먼 평범한 장면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섬세한 쪽이 먼저 그린것이 된다. 노송만 을 화면중앙에 수직으로 포치 시킨 선인송하취생은 장식성이 전혀 배제된 소탈함과 번거롭지 않은 담담한 운치를 보여준다 이와같이 수직으로 소나무를 그린예는 김홍도 보다 한세대 앞선 18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 이인상 에게서 찾아볼수 있어, 공통점이 보이는 석법과 더불어 그의영향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감홍도가 즐겨 그린 상하로 뻗은 노송은 갈필선묘로 때로는 노송의 위아래가 화면 밖으로 벗어나 중간만 나타내기도 한다. 노송의 굵은 수직 줄기로 인해 나타낸 화면공간엔 폭포를 곁들이거나 학이나 사슴이 신선대신 등장 되기도 한다. 소나무와 관계있는 신선으로는 소를탄 노자 의 배경에 노송이나타나기도 하며 노송에 기댄적송자등을 열거할수 있다. 소나무와 별개로 생황을 잘부는신선으로 옥자진이 있다. 선인송하 취생은 신선 보다 오히려 노송이큰비중을 화면을 점하고 있는데솔잎은 싱글고 늙은 줄기의 거친 표현은 신선과 함께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듯도 하다. 차분한 자세로 앉아 생황을 부는 신선은 사뭇 유연 한 정취이며 의습선은 가늘고 고른 필선으로 율동감 있는 송린과 대조적이다. 오른쪽 상단에 회화적인 아름다움까지 보이는제발은 "생황의 외형은 봉황이 날개짓하는것 같고 불때 들려오는 소리는 용의 울음 소리보다 처절 하다" 는 내용이다.



산사귀승도(山寺歸僧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28X32.7 개인소장

화면 전부가 하나의 골짜기 기이고,양쪽 절벽이 가파르게 서있어 계곡이 깊다.저멀리 더깊은 골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위로,어느절로 들어가는 극락교(極樂橋)가 맛배기와지붕 구조와 둥근 창으로되어 있다, 이다리를 건너면 절의 암자가 하나비스듬히 지붕과 한쪽 벽만 보이는 그림의 전경 왼쪽 아래에 삭발승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벼랑길을 따라 귀사 하고 있다. 바위벼랑은 모두 초목 의 굵직하고 꺾이는 붓자국으로 힘있게 내리 긋고 절벽의 암준(岩埈) 도 굵은 초묵(焦墨)으로 담묵 바탁에 내리긋거나 점을 찍었다. 왼쪽 벼랑 즉 귀사하는 중의 머리위로 단풍나무가 바위에뿌리를 박고 늘어져 있고, 또 이곳저곳에 시커먼 먹을찍어,곧은 침엽수를 묘사 하고 짧은 횡선으로 두툼하거나 성기게 가지와 잎을 나타냈다. 후면의 계곡은 아득하게 하늘과 접하여,끝간 데를모르겠고 그위훤한 공간에다 싯귀를썼지만 그중 몇자만알아보겠다. 또 한 암자의 파풍(破風)과 극락교의 토벽(土壁0에만 연한 주칠과 황토색이 보인다. 근래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단원의 낙관과 제시(題詩)가 벗겨진 것을 애석해 하는 평어(評語)와 낙관 도서(圖書)가왼편에 있다.



기우도강도(騎牛渡江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26.6X31.4 호암미술관 소장

화폭전면이 가없는 잔잔한 강물인데, 가운데 큰 버드나무 한 그루가 물속에 잠기듯 늙은 둥치를 드러내고 오른편 으로 누웠다가는 윗부분이 솟아 오르고 있다. 이 나무 앞쪽에 세 그루의 작은 버드나무들이 큰버드나무 둥취와 거의 직각으로 교차 하면서 자리를 잡는다. 그뒤 물속을 한 목동이 소 등에 타고 왼편으로 유유히 강을 건너면서 물에서 이제 막 날아가는 청둥오리 세마리를 돌아본다. 작은 버들과 큰버드나무 둥치 사이 수면에 아직 두마리의 물오리가 헤엄치고 전경에는 초록과 농묵으로 아주 짧은 연속선과 점들을 찍어 한무더기 의 수초를 잘표현 하고있다. 나무들의 윤곽과 잔가지들 모두 농묵으로 거침없이 속필로 묘사 해 가고 버들잎들은 역시 황록으로 촘촘히 찍었다. 사람,소 물오리는 붓끝 세선을 썼으되, 비교적 빠르고 간소한 선묘이고, 담청을 먹과 섞었거나 황갈색 인물과 동물에 담채 했다.


김홍도-섭우도 (涉牛圖)


한 편의 사경(寫景詩)를 읽는 듯한 시정(詩情)이 배어나는 작품으로 김홍도 만년의 화경(畵境)을 대표하는 사경풍속화이다.
장마비로 개울이 불어 작은 나무다리 절반이 떠내려 갔으니, 물살이 아직도 만만치 않음은 길고 속도감 있는 획으로 그려진 수파묘(水坡描)로 알 수 있다.
화면은 사선상으로 흐르는 개울과 근경의 나무가 거의 전부이고 개울 앞뒤쪽과 건너편 넓은 공간은 모두 뿌연 물안개 속으로 잦아들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공간은 확대되고 주제는 부각된다. 목동은 꼴을 베어 지게에 진 채로 소잔등에 올라앉아 느긋하게 물을 건넌다.
절묘한 것은 목동으로부터 대척점에 해당하는 곳에 그려진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돌무더기 위의 물새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전경이지만 시정(詩情)이 떠돈다.
목동의 간략하면서도 정확한 뎃상은 김홍도 만년에 보이는 양식이며, 착하게만 보이는 소는 전형적인 김홍도의 황소그림이다.
우하(右下)의 나무는 요약적이면서도 탄력이 붙은 선묘(線描)로 되어 있는데 《병진년화첩》 가운데 <경작도>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중앙의 접힌 자국으로 보아 화첩에서 분리된 낱장 그림임을 알 수 있다.



한계조수도(閑溪釣垂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26.6X31.4 호암미술관 소장

화면 좌편 위쪽에 치우쳐 담묵으로 묘사된 절벽이 가운데를 향해 원만한 곡선을 이루면서 물속에 바위들이 듬성 듬성 보이는 냇가로 다가와 멈춘다. 시냇물은 전경에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대각선을 이루는데 이쪽 언덕 물가에 삿갓을 쓴이와 맨상투의 남자가 각각 낚싯대를 드리우고 말을 주고 받는다. 절벽 중앙에는 발묵기법으로 암층의 일부가 크게 돌출 하게 처리 하면서 역시 냇가로 흐르듯 내려 오는데 돌사이에 뿌리 빡은 나무들이 위아래로 기둥과 가지를 뻗으면서 덩굴을 몇줄 드리우고 있다. 거의 밋밋한 절벽 자체에 비해 아랫자락은 해삭준(解索?)이 밀집되면서 농도를 더해 표현되고 나뭇잎 등 여기저기에는 황갈색 담채를 썼다. 화폭 오른쪽 위에 절벽과 대칭이 되는 공간은 지욱한 안개속에 무한히 비어 있을 뿐이다.



기우부신(騎牛負薪) 18세기말 비단에 담채 25.5X35.7cm 간송미술관소장


김홍도는 현제(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뜻을 같이 하던 사대부 화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문하에서 화도를 배워 화원으로 출사(出仕) 한 화가 였다. 강세황은 단원을 조선 회화사상 제일의 인물로 높이 평가 하고 있었는데 특히 그의 풍속화 솜씨를 일컬어서는 "더욱 우리동쪽나라 인물풍속을 잘하여, 선비가 공부하는 것이나, 장사치가 시장으로 치닫는것, 규중의 여인,농사꾼,누에치는 여인,및 가옥의 규모와 신과 들 같은데 이르러서는 물태형용(物態形容)을 곡진히 하여 어그러짐 없었으니,이는 곧 옛날 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현존하는 그의 그림이 풍속화보다 산수화가 더많지만,풍속화가로서 더유명한 것도 예나 다를바 없다 하겠다. 봄기운이 무르녹아 아지랑이가 원근 산야에 가득 피어 오르면 하루해는 한없이 길고 심신은 나른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 긴긴 해를 양지쪽 에서 졸고만 보낼수 없어 나무 한짐을 해지고 풀뜯기던 소 등에 올라타고 돌아오다 보니, 어살(語살)을 매어 놓은 시냇가에는, 아직도 오리들이 떼지어 놀고 있다. 우리 시골 어느 곳에서나 얼마 전까지 보아오던 흔한 장면 이다. 나무를 소등에 싣지않고 스스로 지고 타던 것이. 우리네 양심이었고 고통을 함께 하는겸허한 자세였다.





낭구도(浪鷗圖) 18세기말 종이에 수묵담채 39.1X49.3cm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는 파도에 매력을 느꼈던 모양으로,파도를 주제로 한 비슷한 작품이 몇점 전해지고 있다. 그가운데서도 이 낭구도는 매우 뛰어난 작품으로 왼편의 암초에 내려 앉아 있는 바닷새의 무리에 흰 분채 (粉彩)를 입혔을뿐 어느것이나 묵색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맑은 담청색으로 선염하고 있다.단순한 주제이지만 단원 김홍도의 대가로서의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사인암도(舍人巖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26.6X31.4cm 호암 미술관 소장


단원의 병진년 화첩(丙辰年畵帖) 속에들어 있는 산수 10폭 중에는 실경 산수가 몇폭 있는데,그중에는 도담 삼봉(島潭三峯) 사인암(舍人巖) 옥순봉(玉荀峯) 등 단양(丹陽)의 절경을 그린 것이있다. 병진년(1796년)무렵의 단원 산수는 실경에 입각 했으면서도 실경을 넘어서 회화적인 재구성을 관념산수(觀念山水)의 경지를 전개 하였기 때문에,이 사인암도도 실경 과는 사뭇 거리가 있지만, 우람하고 장대한 병풍 같은 절벽 바위의 위용을 한껏 강조 하고 있다.암준( 岩?) 은 종횡으로 그은 선으로 바위 주름을 나타내고, 여기에 농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전후와 요철을 드러내고 또한 농담이 있는 태미점(笞米點)으로 운치를 더하고 있다. 화면 아래쪽 강면의 돌무더기와 수목들,그리고 사인암 꼭대기의 수목등도 단원 산수에 나오는 정형으로 농담을 구사 하여 전후를 나타내고 있으며,소나무 표현역시 예리하고 농묵과 담묵으로 잔가지와 잎을 나타내어 단원 소나무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마상청앵(馬上聽鶯)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117.4X52cm 간송미술관 소장

단원 김홍도는 겸재(謙齋) 정선(鄭敾)과 관아재(觀我齋)조영석(趙榮?)의 동국진 풍속화(東國眞風俗畵)를 계승 하여 이를 기교적으로 변모 시켰던화원 화가 이다. 풍채가 아름답고 성격이 호방 활달하여 당시 사람들이 신선중의 사람으로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수려한 미남자 였던 모양 인데, 그래서인지 이그림 속의 말탄 양반이나 구종하하인 이 모두 늘씬한 몸매로 그려져 있다. 심지어 앞발을 모아 세우고 다소곳이 서있는 적황색 말과 노변의 버드나무 까지도 호리 호리한 미태(美態)를 발산 하고 있다. 그림속의 인물이 항용 그린사람을 닮게 마련 인것을 생각하면 말탄 사람은 바로 김홍도 자신이라고 하여도 좋을듯하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나른한 늦은 봄날 복건에 갓쓰고 도포는 술띠를 늘여 차려입은 멋장이 양반이 한손에 쥘부채들고 한손에는 고삐를 잡은채 길가 버드나무 아래위에서 화답하는 노란 봄꾀꼬리 한쌍의 흐드러진교성에 가는길도 잊은듯 넋을잃고 멈춰 서있다. 모춘여정(暮春旅情)의 시취(詩趣)가 뿌듯이 느껴지는 분위기 이다. 공백을 한껏 강조한 시정(詩情)넘치는 일각(一角)구도 뿐만 아니라, 적황색 말과 푸릇푸릇한 연초록 봄버들잎 등황빛 꾀꼬리의 색조는, 노변과 버드나무둥치에 찍어낸 청묵빛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져서 춘정을 한층 자극하고 있다.






무이 귀도(武夷歸圖) 18세기말 종이에 담채 112.5X52.6cm 간송미술관 소장

무이산(武夷山)은 지금 대만 대안 에 해당하는 복건성 건녕부 에 있는 길이 120리의 명산 이다. 36봉과 37암 그리고 그사이를 흘러내리는 건계가 어우러지며 선경을 빛어내어 한무제 때부터 무이군 이라는 신선이 살았다 하고, 가깝게는 송대의 신선 옥섬, 갈장경,이 이산솟에 숨어 살았다고도 하는 신비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빼어는 경치로 인해 수많은 탐승객이 이곳을 찾아 절경을 읆었으나 중국 십철 중의 한사람이자 주자 성리학의 개조로서 추앙받는 남송의 주희가 노래한 무이 구곡가만큼 무이산구곡을 유명하게 한것은 없다. 어후 건계가 36봉 37암을 감아 흘러내리며 빚어낸 아홉 굽이는 화가들에 의해 즐겨 그려지게 되었는데 주자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적 학문체계를 발전 시켰던 조선에서도 주자의 무이구곡가 는 중요한 소재로서 일찍부터 그려졌었다. 김홍도의 이그림이 구곡중에서 어디를 그렸는지 언뜻 알기 어렵지만 하엽준으로 처리된 기암준봉과 그사이를 굽이쳐 내려오는 탕탕한 계류를 타고 치닫는 선유는 실로 호방 장쾌 하여 무이구곡 전체가 이한폭에 모두 담겨진 것 같으니 굳이 어느 굽이의 경치인지 를 따질 필요가 없을듯 하다. 뜸집배 안에 상반신을 드러낸 채 절경을 승람 하는 인물로 그려진 주희의 단아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사공들이 행색은 분명 조선 사람의 그것이어서 당시 풍미하던 조선중화 사상의 일면을 엿볼수 있다.


호귀응렵도 (豪貴鷹獵圖 28


어느 겨울 한 귀인이 일단의 휘하를 이끌고 부근의 야산으로 매사냥을 나왔다. 구종이 말을 끌고 군복 차림의 일산잡이가 멋진 일산을 받쳐 들었는데, 고을의 원님쯤은 되어 보이는 중년의 귀인이 도포입고 우구(雨具)를 갖춘 채 훤칠한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말 뒤로는 꾀많고 눈치 빠른 집사가 갓을 쓴 채 따르고, 다시 그 뒤에 치마까지 걷어부친 늙은 주모가 머리에 술상을 인 채 뒤따르며, 다시 동자가 안주감을 한 짐 지고 가는 매우 호사스런 행차이다. 그리고 사냥몰이를 하면서 사냥짐을 등에 지는 하배가 둘이나 따르고 사냥개 두 마리와 사나운 매가 동원된 자못 성대한 사냥이다.
지금 막 놀라 달아나는 쟁끼를 발견한 매가 쏜살같이 낚아채서 길 바닥에 곤두박아 꿩을 한 마리 또 잡았다. 뒤따르던 사냥개가 날뛰고 짖어대며 사냥의 흥분을 고조시키는데, 사나운 매가 어찌나 날카롭게 쪼아대는지 사냥꾼이 다가서며 제지시키는 손짓이다

등짐 속에 쟁끼의 꼬리털이 여럿이니 오늘 사냥은 이만하면 벌써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겨울 야산의 길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낮은 언덕을 앞뒤로 가볍게 배치하고 전경의 언덕 밑에는 작은 개울을 살짝 얼굴만 내비쳤다. 겨울이기 때문에 나무는 꽁꽁 얼어붙은 잔가지만이 스산하게 쳐졌는데, 귀인이 우구를 갖춘 것으로 보면 길을 나설 때 가벼운 눈발이 날렸던 모양이다. 시절이 겨울임을 알려주는 절묘한 장치이기도 하다. 간결한 필치로 가볍게 쳐낸 묘사지만 걸림없이 무르녹아 흐르는 필묵(筆墨)과 정확하고 무리없는 형태감이 호암미술관의 1796년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과 거의 같은 조형이다. 잘 익은 농묵(濃墨)으로 기본 균형과 무게를 잡은 다음 두 단을 급격히 떨군 여린 중담묵(中淡墨)의 감미로운 필묵을 전면에 깔듯이 풀어놓는 필묵법(筆墨法)도 동일하다. 손길 닿는대로 아무렇게나 가볍게 쳐댔지만 빈틈없는 짜임새를 갖추어 전혀 흐트러짐이 없는 초법(梢法)도 한 솜씨이다. 풍부한 풍속의 내용과 정확한 형태감, 날렵한 자태는 오히려 더 뛰어나다. 《병진년화첩》이 그려지던 1796년 전후의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1791년에서 1795년까지 연풍현감(延豊縣監)으로 재직하던 단원의 자화상(自畵像) 같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주지하듯 단원은 1795년 1월, 사냥을 한다는 명분으로 한 고을의 군정(軍丁)을 징발하면서 그 부족한 숫자의 많고 적음에 따라 날자를 계산하여 분배하고 세금을 걷을 때도 벌금을 더 걷었다가 이것이 사단이 되어 결국 연풍현감에서 파직된다. 더구나 단원이 그린 1796년의 《화성춘추팔경도(華城春秋八景圖)》에도 <서성우렵(西城羽獵)>의 매사냥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매사냥이 적지않게 성행했던 듯한데, 연풍은 태백준령의 한 심산(深山) 소읍(小邑)으로 본래 사냥이 많은 곳이었을 터이니, 단원은 이 곳에서 적지 않은 사냥을 즐겼고 그 결과 이 그림과 같은 매사냥 장면의 풍속화를 남기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그림의 등장 인물들이 어딘가 고을 원님의 관가 주변 분위기를 풍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중앙의 접혔던 자국으로 보아 본래 화첩 그림이었던 모양이나, 지금은 이 그림만 편화(片畵)로 전해진다. 우하각에 언듯 읽을 수 없는 작은 방형주문인(方形朱文印)이 찍혔는데 후대의 소장인(所藏印)이 아닌가 싶다. 단원의 제관(題款)이 없지만 의장(意匠)과 구도(構圖), 형태(形態), 필법(筆法)이 그대로 《병진년화첩》이 단원의 작품인 것 만큼 단원의 작품이다. 특히 단원의 중년 풍속화로는 단연 최고의 가작이다


신선도


청오자(靑烏子 130.7×57.6)
사슴을 데리고 걷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명대(明代) 홍자성(洪自誠) 찬(撰)의 <선불기종(仙佛奇?)>(1602)에 보이는 청오자의 도상과 흡사하여 강세황의 평대로 청오자(靑烏子)를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오자는 팽조(彭祖)의 제자이며 471세에 금액(金液)을 먹고 승천한 신선이다. 이러한 농묵의 굵은 의습선을 일컬어 강세황이 ‘몰골사의(沒骨寫意)’ ‘초초일필(草草一筆)’이라고 지칭한 것을 주목해 불 만하다.
등에는 황정경을 메고, 손에는 단지(丹芝)를 가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호리병을 차고 있으니 묻지 않아도 청오자임을 알겠다. 몰골사의, 빠른 필치의 구법(句法)이 속세를 활발히 벗어났으니 청오술이 능히 이에 대적할 수 있겠는가. 표암평

 



삼선도(三仙圖 130.7×57.6)
강세황의 화평과 신선의 도상을 종합해볼 때, 여동빈(呂洞賓)을 가운데 그리고 그 위에 여동빈의 스승인 종리권(鍾離權), 제일 아래에 종리권의 선생인 동화자(東華子)를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여동빈은 당대인(唐代人)으로 호는 순양자(純陽子)ㆍ 회도인(回道人)이며, 진사시(進士試)에 두번 떨어진 뒤 종리권을 만나 신선이 되었는데, 유건(儒巾)을 쓴 칼 찬 장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종리권은 머리에 쌍상투를 틀고 배를 드러내놓고 있으며 파초선(芭蕉扇)을 들고 있는데 그는 동화자(東華子)에게 선법(仙法)을 배웠다고 한다. 동화자는 동화제군(東華帝君), 동왕공(東王公)으로 여선(女仙)인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신선의 영수(領袖)로 칭해진다. 중국에서는 동화제군(東華帝君)ㆍ종리권(鐘離權)ㆍ동빈(呂洞賓)ㆍ왕철(王哲)로 이어지는 전진교(全眞敎)의 도통(道統)설화가 민간에 유포되면서 이들 신선의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회회도인(여동빈)은 종리권에게 배우고, 종리권은 호리병을 뒤집어 금단(金丹)을 쏟고 있는 사람에게 배웠다. 때마침 맑은 달이 곁에 있다가 그 사정을 아는구나. 표암평



삼성도(三星圖 130.7×57.5)
복성ㆍ녹성ㆍ수성과 세 명의 동자가 수성이 받쳐든 복숭아를 쳐다보고 있다. 필획이 아직 딱딱하여 김홍도의 후대 인물화가 보여주는 유려하고 여유있는 운치는 없으나, 전통적인 화법을 주로 하며 화원으로서 활동한 김홍도의 전기(前期)화풍을 잘 보여준다.
복을 관장하는 복성은 온화한 얼굴이 넉넉하고 아름다우며, 관록(官祿)을 관장하는 녹성은 높은 관에 화려한 옷을 입었으며,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은 늙은 모습에 머리 골격이 길다. 이것은 이서애의 시이다. 이에 대해서 고쳐 평할 필요가 없다. 표암평


자염도사(紫髥道士 130.7×57.6)

강세황은 이 신선의 이름을 자염도사(紫髥道士)라 하였다. 앉아있는 신선의 수염이 붉은 빛을 띤 고동색으로 칠해져있기 때문에 이에 착안하여 자염도사(紫髥道士)라 명명한 것인지, 자염도사의 도상이 원래 있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다만 도상적 근거를 밝히고 있는 다른 폭들에 비하여 도상에 대하여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붉은 수염의 도사가 총채를 들고 노장(老莊)의 도(道)를 이야기한다. 화개(華蓋)를 높이 든 여자 도사는 가만히 들으며 묵묵히 이해하는가? 세 명의 아이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무소뿔의 하얀 기운이 하늘까지 치솟으니 영험하고 괴이함의 극치이다. 결정코 풍류의 혐의는 없다. 표암평




주부자시의도 (朱夫子詩意圖)

김홍도가 1800년 정초에 정조(正朝) 에게 진상한 8폭 병풍 가운데 여섯폭으로 제일폭 사빈신춘도 와 제5폭 백운황엽도 는 전하지 않는다.
정조의 어제 문제집 (御製文集) 인 홍재전서 (弘齋全書)에 관련 기록이 여기서 정조는 이작품에서 김홍도가 "주자(朱子)가 남긴 뜻을 깊이 얻었다" 고 칭찬 하고 화폭에 보이는 주자 시 마다
화운시(和韻詩)를 붙였다. 각폭에는 김홍도의 자필로 주자 의 칠언절구 시한수씩과 성리학자
웅화 (熊禾)의 주(註)가 적혀 있다. 묵서 관지는 일체 없으나 도서3과의 내용으로 작가가 확인
된다. 즉 화제 우상(右上) 의 두인(頭印) 이 백문타원인(白文楕圓印)"(좋은 산수에 마음이 취하네)" 로서 김홍도의 도서이며, 작가인 주문방인(朱文方印)과 백문방인(白文方印)"이다.
작품의 주제는 대학 경일장(經一章)의 팔조목인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 이다. 팔조목 이란 유교의 학문과 수양과
정치의 본령을 단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므로 곧 조선왕조의 치국 이념인 성리학 사상의 대강
(大綱) 을 다룬 것이라 하겠다.
소재는 주자의 칠언절구 한시내용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나나 시내용은 웅화 의 주에 의하여
대학 팔조목과각각 연관되어 진다.


가가 유름도


(家家有凜圖 제8폭)
「석름봉, 원시(石凜峯)」

일흔 두 봉우리 모두 하늘을 찌를 듯한데
한 봉우리에 돌노적가리라는 옛 이름이 전하누나
집집마다 노적가리 있어 높기가 그만하니
참 좋은 사람 세상 쾌할한 세월일레

웅화가 말하기를 “백성이 부유하면 예의가 자리잡히니 천하가 태평하리라”했다.

작품은 주제의 쾌활함에 걸맞는 활달한 구도로 되어 있다. 즉 아래로부터 비스듬히 갈지(之) 자로 전개되면서 1.타작장면, 2. 집 뒤의 대숲에서 산기슭 윤곽선까지, 3. 아지랑이 낀 부분, 4. 석름봉을 비롯한 72봉우리 등이 삼각형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72봉우리 등이 삼각형으로 맞물려 있는 것이다. 72봉은 뾰족한 암봉이 병기(兵器)를 늘어세운 듯 날카롭게 솟았고 그 앞에 노적가리 모양의 석름봉이 우뚝섰다. 그 아래는 아지랑이 여백으로 균형을 잡았는데 아랫 변에 산기슭 윤곽선을 진하게 긋고 수목을 열지워 세워 마감했다. 이 산기슭을 아지랑이로 처리한 수법은 <기로세연계도(耆老世聯?圖)>에 보이는 것과 같다. 그 아래 절벽 앞의 나무는 가지 굵기가 멋대로 넓었다 좁았다 하는 김홍도 만년의 특징적인 묘법을 보이는 평면적인 형태로서 맨 윗 가지가 직각으로 꺾인 사의적(寫意的)인 묘법은 <추성부도(秋聲賦圖)>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마을의 나무는 선묘 자체는 구불구불하지만
가지가 무척 번다하게 묘사된 점에서 김홍도 초기 수지법(樹枝法)의 여운이 보인다.
아래는 한창 가을걷이로 바쁜 마을 풍경이다. 초가집과 담장으로 구획지어진 이곳에서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키를 높이 쳐들고 곡식을 까부르는 이, 허리 아래로 키질하는 이, 흩어진 낱알을 쓸어 모이는 이가 있고, 아기 젖먹이는 아낙, 어린애와 광주리 옆에서 일하는 아낙과 서 있는 아낙이 있다. 뒷집에서도 한 아낙이 아기를 안고 밖을 내다본다. 다시 右下 구석에는 창턱으로 얼굴을 내민 인물과 이야기하며 디딜방아를 찧는 사내와 아이의 도움을 받으며 절구 찧는 인물이 있다. 이처럼 많은 인물을 여기저기 요령있게 배치하여 추수의 흥겨운 분위기를 그려냈다. 특히 석름봉의 형태와 꼭 닮은 노적가리가 곳곳에 벌려 있어 타작의 기쁨과 어울리는 운율감을 준다. 태평 천하를 이룩하려면 백성의 곳간을 채워야 함을 강조 한 것이다.


반도(蔥湯麥飯圖 7폭)



채씨 부녀의 집, 원시(蔡氏婦家)」

팟국에 보리밥이 서로 잘 어울리니
파는 단전(丹田)을 길러주고 보리는 허기에 요기 되네
이 가운데 무슨 재미냐고 말하지 마소
앞마을엔 오히려 밥 못 짓는 때도 있다고 하네

웅화가 말하기를 “文王은 백성의 고통을 자기 아픔처럼 여겨 추위에 얼고 굶주리는 일이 없게 하였다”고 했다.

작품 하반부는 띠울타리를 두른 ㄱ자형 초가집 정경이다. 들쳐진 창을 통해 간촐한 밥상을 앞에 한 朱子와 시중 드는 부인이 앉은 모습이 보인다. 마당에는 쟁반을 받든 시녀가 막 들어서려는 참이다. 집 뒤편에는 베틀과 돈(墩:의자) 두 개가 보인다. 마당에는 큰 오동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 커다란 괴석과 관음죽이 있다. 집 옆에도 괴석과 대숲이 촘촘하다. 이것들은 집주인이 살림은 여유가 없어도 품격이 도도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열린 사립문 밖에는 수레와 앉아 쉬는 동자가 보인다.
화면 상반부는 개울을 따라 갈지(之)자로 멀어지면서 주산(主山)에 이르는데 원근감이 뚜렷하여 깊은 공간감을 확보했다. 개울 위에 다리가 있고 버드나무 뒤로 초가집과 논이 보이며 주산 아래 먼 마을이 자리하였다. 이것은 화제의 ‘앞마을엔 오히려 밥 못짓는 일도 있다 하네’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어려운 백성의 처지를 늘 잊지 않는다는 주제를 위한 배려이다. 구도는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의 대각선 방향이지만 수평선도 병용하여 평담한 느낌을 준다. 주산 좌측 기슭의 연운 처리가 요령있다






생조거상도 (生朝擧觴圖 제6폭)
「어머니 생신 아침에 장수를 빌다, 원시」

공손하게 생신 아침에 한 잔 술 올리오니
짧은 노래 가락 그쳤어도 뜻은 따로 기옵니다
원하시는 말씀 돌아가신 아버님과 아들 손주의 편안함 뿐
검은 머리 홍안으로 즐거움 길이 누리소서

웅화가 말하기를 “집을 다스리는 근본은 부모님께 공순함에 있다”고 하였다.

늦더위가 남은 초가을 어느날 큰 기와 집에서 벌어지는 모친 생신 잔치 장면이다. 돌담에 기대어 지은 집에서 차양을 치고 자리를 깔아 잔치를 벌이는데, 앞에는 힘찬 선묘로 둥지를 묘사한 늙은 활엽수가 서 있고 뒤는 대숲이다. 좌정한 모친은 음식이 수북한 독상을 받았으며 수염 난 아들이 꿇어앉아 술잔을 올린다. 아쉽게도 모친의 얼굴은 먹칠과 긁은 자국으로 손상을 입어 표정을 살필 수 없다. 자리에는 동생인 듯한 인물이 독상 앞에 앉았고 형 차지의 독상도 보인다. 뒤에 주자(朱子)의 젊은 아들과 아이 둘이 겸상을 했으며 앞쪽엔 두 부인이 앉았다. 부엌에서 쟁반을 든 여인이 나오는데 마당에는 암수탉과 병아리 가족이 평화롭다. 그 옆 농기구를 두는 창고에는 괭이와 삽이 보인다. 화면 아래 별도의 담으로 분리된 초가집에는 손님으로 보이는 세 사람이 겸상을 하고 앉았는데 쌍상투를 튼 동자가 술과 잔을 나르는 중이다. 초가 옆에 괴석과 파초, 그리고 작은 받침에 놓인 난초 괴석상이 깔끔하다.
화면 상부는 안개 속으로 잦아들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개울과 버드나무로써 이른 아침의 아슴프레한 대기를 시사하고 공간감을 확보하였다. <생조거상도>는 모친의 생신날 축수라는 소재를 중심으로 집안 식구들의 화목함을 묘사하고 있으며 깔끔한 건축물 묘사는 ‘바로 잡힌 집안’을 상징하는 듯하다. 제7폭ㆍ제8폭과 함께 풍속화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월만수도만도 (月滿水滿圖 제4폭)
무이도가 넷째 굽이, 원시」

넷째 굽이 동서 양 편에 큰 암벽 솟았는데
암벽 꽃엔 이슬 달리고 푸르름이 드리웠네
금빛 닭 울음 그친 후에 보는 이가 없으니
빈 산에 달빛 차고 못엔 물이 가득하네

웅화가 말하기를 “정심(正心)이란 다만 어둡고 어리석지 않아 어지러움이 없음이라” 하였다.

『무이도가(武夷棹歌)』는 1184년에 주자(朱子)가 제5곡(第5曲) 은병봉(隱屛峰) 아래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살면서 지은 작품으로, 예로부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붓 끝에 정이 묻어난다고 평가된 명시이다. 따라서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이 화운시를 제작했는데, 특히 대학자 주자를 흠모하는 유학자들이 즐겨 지었고 그 사적을 모방하여 자신의 거처를 구곡(九曲)으로 명명한 예도 많았다. 위 시는 그 중의 제4곡이다.
작품을 보면 아래쪽이 깎여들어간 대장봉(大藏峰)이 물가에 위태롭게 섰고 계곡 건너 선조대(仙釣臺)가 있어 동서로 마주하였다. 그 사이로 가는 폭포 물줄기가 아슴프레하다. 암벽에 매달린 꽃나무는 이슬을 머금었으며 위쪽에는 초목이 우거졌다. 원래 대장봉 암벽 아래에 굴이 하나 있어서 옛적에 그 안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금계동(金鷄洞)이라 했다. 그러나 이제 금계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보는 이도 없어 다만 공산탱월(空山?月)과 심담한수(深潭寒水)만이 정막함을 도운다.
<월만수만도>는 단순한 조형요소로 이루어낸 걸작이다. 우측 대장봉을 진하게 처리하고 맞은편 선조대와 폭포를 매우 아스라하게 처리하여 대비시켰다. 특히 좌측 암벽의 대부분을 거의 여백으로 비워 두고 아래쪽만을 약간의 윤곽선과 연록색 태점으로 묘사한 것은 놀라운 공간감각이다. 대조적으로 대장봉 아래편 바위는 강한 농묵선 윤곽에 농묵의 태점으로 든든하게 처리했다. 물 위로 솟은 바위 역시 유사한 형태로 다듬어 조화를 이룬다. 다만 물에 씻겨 좀더 둥글어진 형태이고 태점을 생략했다. 못의 물결은 사진으로는 잘 안 보일 만큼 흐린 선으로 가로 길게 긋고 담청색을 바림해서 깊고 잔잔한 느낌을 준다. 암벽 위쪽의 멀리 보이는 나무들은 연운에 맞닿았다.
원산은 단정한 윤곽선 위에 청색 선염을 베풀었고 보름달도 바깥을 담청으로 바림하여 맑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구도를 보면 두 암벽을 사이에 두고 위편의 보름달 뜬 하늘과 아래편 깊은 못물이 서로 조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밝은 달빛 가득한 빈 산, 빈 하늘과 깊은 못에 가득한 물의 고요하고 담담한 정경은 곧 正心의 경지를 상징한다.







만고청산도 (萬古靑山圖 제3폭)
「적계의 호선생에게 부침, 원시」

둥근 들창 앞편으로 푸르름이 병풍 둘러
저녁 되어 마주하니 우주 만물이 고요하네
뜬 구름에 만사를 맡겨 한가롭게 책을 펴니
만고의 청산이야 다만 그저 푸르르네

웅화가 말하기를 “誠意라는 것은(마음에) 主宰함이 있어 (사물의) 動靜간에 통하는 것이라”했다.

작품 하변이 밭아 보여 다소 잘려 나갔다고 생각된다. 둥근 들창을 낸 기와집 앞에 낙랑장송 두 그루가 서로 닮은 모습으로 서 있는데 둥지 끝은 주산(主山) 방향으로 휘어졌다. 그 뒤로 곧은 전나무가 보인다. 지붕의 사선이 좌하 구석을 메운 것처럼 맞은편 산기슭도 대칭을 이루면서 우하를 메웠다. 다만 왼편엔 경물이 가득하고, 오른편엔 텅빈 깔끔한 마당에 학 두 마리가 한가롭게 서 있다. 뒤로 커다란 괴석 둘과 파초, 그리고 대숲이 있다. 들창으로 뒷모습이 보이는 선비는 고개를 들어 주산 봉우리를 바라본다. 집 주위에 ‘푸르름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주자(朱子)는 ‘저녁 무렵 우주 만물이 고요’한 것처럼 자신도 무심하다.
<만고청산도>에서 중심 주제는 주산이다. ‘우주 만물’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형태는 아래부분을 연운(烟雲)으로 처리하여 마치 대지로부터 고요하게 솟아오른 듯한데, 안정된 삼각형 모양을 중심으로 여러 봉우리가 사선 방향으로 겹겹이 꽉 짜여져 있다. 그 안정된 결구는 고요함과 견고성을 시사한다. 정중앙의 원산은 좌측으로 멀어지면서 거듭 축소되고 흐려져서 깊은 공간감을 조성한다. 원산은 실루엣만 묘사하였지만 윤곽선을 단정하게 덧댔다. 산이 정(靜)이라면 ‘뜬 구름에 만사를 맡겼다는’ 주산 옆의 구름은 동(動)이다. 구름은 전통적인 선묘법에 의한 품격 있는 묘사로 되어 있다. 구도 자체는 우상(右上)에서 좌하(左下)로 이어지는 대각선 방향이 주가 되면서도 그 반대 방향으로 여백을 마련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뜻이 성실함’으로써 우주만물이 그대로 수용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춘수부함도 (春水浮艦圖 제2폭)
글을 읽고 느껴 짓다, 원시」

어젯 밤 강가에 봄물이 불더니만
싸움배 거함조차 터럭 한 올인양 가볍게 뜨네
그 동안 밀고 옮기려 들인 힘 잘못 애쓴 것이더니
오늘은 흐름 가운데서 자재롭게 가는구나

웅화가 말하기를 “의리가 익은 때에 지(知)는 저절로 다다르게 되니 (그 때는 만사가) 자연히 잘 되어 간다”고 하였다.

근경의 강언덕과 건너편 강둑이 푸르른 버드나무와 함께 일부만 묘사되어 있고 화면 대부분은 강과 바다로 되어 있다. 강폭을 넓게 묘사한 것은 화제에 보이듯이 봄물이 갑자기 불었기 때문이니, 강 건너편 버드나무 아랫둥지가 물에 잠겨 있는 것으로도 확인된다. 좌하(左下) 기슭의 전함 세 척은 돛대만 보이고 건너편 앞쪽에는 네 척이 있는데 그 중 맨 좌측 것은 막 돛을 올리는 중이며 깃발을 보면 바람은 좌에서 우로 불고 있다. 전함쪽으로 다가서는 작은 배에는 차일을 쳤고 책이 놓인 서안(書案)이 있으며 한 선비가 동자와 마주 앉았는데 고개를 돌려 전함들을 바라본다.
이 인물은 주자(朱子)일 것이다. 인물 묘사는 남종화법에 흔히 보이는 방식으로 두 눈을 점으로 콕콕 찍고 수염만을 간략하게 그렸다. 강둑 뒤 쪽에 선체는 가리웠으나 활짝 돛을 펼치고 막 떠나려는 전함 한 척이 있고 맨 위 화제 아래에 돛을 반쯤 펼치고 먼 바다로 떠나가는 전함 한척이 있다. 이 배는 물 한 가운데 배치하여 자유롭게 보이나 화제에 보이는 ‘흐름 가운데서 자재롭게 가는구나’를 묘사한 것으로 참 앎〔眞知〕에 도달한 경지를 상징한다.



삼공불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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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삼공불환도. 1801년, 견본수묵담채, 133.7 x 418.4cm, 용인 호암미술관 소장

三公不換圖》는 단원 57세인 1801년에 그린 작품이다. 세로 1m 33.7cm, 가로 4m 18.4cm에 달하는 8폭 병풍의 대작이며, 비단에 옅은 채색을 가해 그렸다. 개인이 소장하던 중 화재로 인해 제1폭? 제2폭? 제3폭 밑단이 소실됐으며, 제1폭은 특히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현재는 족자의 상태로 호암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三公不換’이란 송대 시인 대복고(戴復古)의 시구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온한 생활은 삼정승 같은 높은 벼슬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작품의 왼쪽 상단부에는 간재 홍의영이 발문과 중장통仲長統의 「낙지론(樂志論)」을 화제로 써넣었다. 발문을 통해 이 작품은 신유년(1801) 겨울 12월에 순조가 수두에서 쾌유된 것을 축하하는 뜻에서 그려진 것으로, 한 씨 성을 가진 유수가 발의하여 주판 벼슬을 한 사람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제로 쓰인 「낙지론」은 초야에서 사는 일상의 즐거움을 노래한 내용이다.


거처하는 곳에 좋은 논밭과 넓은 집이 있고 산을 등지고 냇물이 흐르고 도랑과 연못이 둘러 있으며, 대나무와 수목이 두루 펼쳐져 있고, 타작마당과 채소발이 집 앞에 있고 과수원이 집 뒤에 있다. 배와 수레가 걷거나 물을 건너는 어려움을 대신하여 줄 수 있고, 심부름하는 이가 몸을 부리는 일에서 쉴 수 있게 한다. 부모를 봉양함에는 진미를 곁들인 음식을 드리고, 아내나 아이들은 몸을 괴롭히는 수고도 없다. 좋은 벗들이 모여 머무르면 술과 안주를 차려서 즐기며, 기쁠 때나 길한 날에는 염소와 돼지를 삶아 바친다. 맑은 물에 몸을 씻고 시원한 바람을 좇으며 헤엄치는 잉어를 낚고 높이 나는 기러기를 주살로 잡는다.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 아래에서 바람을 쐬며 놀다가 훌륭한 집으로 읊조리며 돌아온다. 안방에서 정신을 평안히 하고 노자의 현묘하고 허무한 도를 생각하며, 조화된 정기를 호흡하여 지인(至人)과 같아지기를 구한다. 통달한 몇 사람과 도를 논하고 책을 강론하며, 하늘과 땅을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고금의 인물들을 평한다. 「남풍(南風)」의 전아한 가락을 연주하고 「청상곡(淸商曲)의 미묘한 곡도 연주한다. 온 세상을 초월한 위에서 거닐며 놀고 하늘과 땅 사이를 곁눈질하며, 당시의 책임을 맡지 않고 기약된 목숨을 길이 보존한다. 이렇게 하면 하늘을 넘어서 우주 밖으로 나갈 수가 있을 것이니, 어찌 제왕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러워하겠는가. -「낙지론」전문 -


산수와 더불어 작품 곳곳에 인물, 동물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낙지론」의 내용에 부합한다. 인물 29명, 포유류 9마리, 조류 12마리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이나,^^; 작품의 보존상태가 온전치 못하고 도판으로만 확인한 결과이므로 소량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인물의 모습이나 산수의 표현이 전형적인 한국의 전원모습이다. ‘삼공불환’과 「낙지론」이라는 중국적인 소재를 다뤘지만, 단원은 이 작품에서 너무나 한국적인 산수와 풍속으로 그것들을 잘 표현했다.

단원의 후기산수화의 특징 중 하나가 사경산수속에 풍속, 인물, 영모를 통틀어 혼합하여 표현한 것인데 이 작품 역시 대표적이다.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단원의 다른 풍속화에 등장했던 소재가 이 작품 속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부터 예를 들면, 제2폭의 물레 돌리는 여인과 베틀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은 《풍속화첩》 중 〈길쌈〉과 〈자리짜기〉에서 보았다. 제6폭 근경의 낚시하는 모습은 〈한계조수도〉에서 그려졌었고, 제6폭의 농부들과 제7폭의 새참 이고 가는 여인과 아이는 《풍속도8첩병풍》 중 〈새참운반〉에 등장한다. 제6폭에 있는 말 타고 가는 양반과 제7폭 원경에 보이는 나루터의 돛 모양은 《풍속도8첩병풍》 중 〈나루터〉에 매우 흡사하게 나타난다.

50대 이후 즐겨 쓴 변형된 하엽준(荷葉?)과 끝이 바스러진듯한 필획, 담담한 갈색조의 담채, 춤추는 듯 구부러진 나뭇가지 등 이미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에서 무르익은 단원의 특성이 더욱 성숙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4m가 넘는 대작에서 느껴지는 막힘없는 시원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해 좀 더 거칠고 대범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김홍도. 주상관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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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주상관매도. 지본담채, 164 x 76cm, 개인 소장.


김홍도의 산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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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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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위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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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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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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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록도



쌍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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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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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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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왕폭


 



강세황 초상(姜世晃 肖像)

강세황 초상( 姜世晃 肖像 50.9×31.0)

강세황은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김홍도의 예술 생애에 있어 정조(正祖)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60이 넘어 벼슬길에 올라 참판까지 지냈다. 강세황은 자신과 김홍도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내가 사능(士能)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知己)의 느낌이 있었다. 사능이 내 글을 구하는데 다른 이에게서가 아니라 반드시 내게서 구하는 것은 역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강세황은 부친의 나이 64에 얻은 9남매 중의 막내로서 갖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므로 밝고 해학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는데, 이 점 또한 김홍도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작품은 극 사실기법에 의한 정면 관복상(官服像)이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서 당시예단(?壇)의 총수라고 일컬어졌던 강세황의 예술에 관한 조예가 그 얼굴에 비춰 보이는 듯하다.



단원의 금강전도60폭중 일부






















































보통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60폭으로 알려져 있는 진경산수 화첩이다.
1첩(帖)당 12폭씩 묶어5첩(帖)으로 나뉘어 있는데 오동나무판을 겉표지로 삼고 있다.
겉표지에 「금강전도(金剛全圖)」라는 표제가 묵서(墨書)되어 있을 뿐 서문(序文)이나 발문(跋文),제화시(題畵詩)등은 일체 없고 각 폭 그림마다 해당 진경(眞景)의 명칭이 역시 묵서(墨書)되어있는데 단원 글씨는 아니다.
그림 제목이 되는 이 명칭 곁에 ‘檀園’ ‘弘道’라는 두 방의 방형백문(方形白文) 인장이 폭마다 찍혀 있으나 이 조악(粗惡)한 인장은 후낙관(後落款)으로 이 그림을 손상시키는 작용을 한다.
이 화첩은 본래 70폭이었다 하는데 근년에 10폭이 흩어지고 60폭만이 다시 5첩(帖)으로 꾸며진 모양이다. 흩어진 10폭은 다음과 같다.


1. 청허루(淸虛樓), 2. 천연정(天然亭), 3. 영랑호(永郞湖), 4. 단발령(斷髮嶺), 5. 정양사(정양사), 6. 만폭동(萬瀑洞), 7. 신계사(神溪寺), 8. 옥류동(玉流洞), 9. 외선담(外船潭), 10.유점사(楡岾寺)


본래 이 화첩은 단원이 정조의 어명을 받들어 관동지방의 해산승경(海山勝景)을 사생해 온 ‘봉명도사첩(奉命圖寫帖)’이라는 꼬리를 달고 다니던 화첩인데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서영명위장해산화권(書永明尉藏海山畵券」(『淵泉集』 권20)과 「제단원해산첩(題檀園海山帖)」, 칠십수 선이십삼(七十首 選二十三)(『淵泉集』 권4) 및 항해(沆瀣) 홍길주(洪吉周, 1786~1841)의 「제해산첩후(題海山帖後)」(『표롱을참(??乙懺)』 권5) 등의 글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 화첩이 정조대왕의 유일한 부마도위(駙馬都尉)이던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 1793~1865) 구장(舊欌)의 그 정조 어람본(御覽本) <해산첩(海山帖)>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연천과 항해는 영명위의 백중씨(伯仲氏)들로 이들이 남긴 윗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정조가 단원에게 관동의 해산(海山) 승경을 그려 오게 하자 단원은 왕명을 받들어 70폭 그림을 그려 바치게 되고 정조는 이를 5권의 화첩으로 만들어 왕실 내부(內府)에 비장한다. 그 뒤 순조 9년(1809)에 순조가 이 화첩을 매제인 영명위에게 하사하게 되고, 영명위는 3년 뒤인 순조 12년(1812)에 백씨인 연천에게 부탁하여 그 서문을 짓게 하였으며, 다시 9년 뒤인 순조 21년(1821)에는 연천이 매 폭마다 제화시를 지으니 70수에 이르렀었다.


이 글들을 화첩 속에 미처 써넣지 않고 있다가 다시 8년 뒤인 순조 29년(1829)에 영명위는 중씨인 항해에게 부탁하여 이를 정서하여 화첩에 넣게 하고 그 전말을 밝히는 후기(後記)를 붙이도록 한다. 이런 내력을 가진 화첩이라면 응당 연천 형제들의 서문이나 발문은 물론 연천의 70수 제화시가 이 화첩에 합장(合裝)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금강전도>첩은 이런것들이 하나도 합장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화첩이 곧 영명위 구장첩이자 정조 어람첩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10폭의 그림이 흩어지는 과정에서 이런 글씨들이 분리될 수도 있겠지만 구태여 분리시켜 영명위 구장이거나 정조 어람본이라는 증거를 인멸할 이유가 없으니 이 역시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금강전도>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단원 특유의 산수기법을 도처에서 확인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진경산수화첩을 일단《해산첩(海山帖)》의 원형으로 보고 다른 문제들은 장차의 연구에 맡기기로 하겠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豹菴遺稿』, 권4)에 의하면, 이 <해산첩>은 정조 12년(1788) 무신(戊申) 가을에 단원이 복헌(復軒)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관동 9군(郡)을 편답하면서 그려낸 것이라 한다. 이때 76세의 표암이 44세의 단원을 그 큰자제인 강인이 부사로 와 있는 희양에서 만나 9월 13일부터 17일까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며 사생하였다고 한다.
현재 5첩으로 꾸며진 이 <금강전도>는 10폭이 흩어질 때 장첩(裝帖)도 일부 교란된 듯 편답 순서가 곳곳에서 뒤바뀌어 있다. 연천이 읊었다는 제화시는 23수만 『연천집』에 수록되어 있으니 남은 시들을 찾아내는 일이 또 하나의 과제이다.


김홍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추성부도(秋聲賦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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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부도> 종이에 담채, 56.0×214.0㎝, 1805년(61세),
삼성리움미술관 소장
.

구양수의 명문 '추성부(가을을 노래함)'

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에 관한 각종 인명사전에는

그의 생몰년을 '1745- ?'로 표기하고 있으며, 좀 더 자세한 경우에는 '1745-1806?'로
도 한다.

의문부호(?)야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죽은 해를 모르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다.

 

김홍도 연구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이를 토대로 한 단행본을 내기도 한 진준현 서울대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앞으로 김홍도가 사망한 시점을 밝혀줄 만한 자료가 나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나 현재까지는 그 대략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1806년 무렵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정도를 의미하는 '1806?'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진 연구관은 크게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한다.

첫째, 1806년 이후 김홍도가 살아서 활동했다는 행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둘째, 현재까지 파악된 그의 작품 중 제작 시기가 가장 늦은 리움미술관 소장 추성부도(秋聲賦圖)가 을축년(1805) 동지 후 3일(음력 12월25일 무렵)에 완성됐다.

셋째, 이 해 겨울 12월에 아들 김연록(金延祿)에게 보낸 편지에서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발견된다.

이로 볼 때 진 연구관은 1806년 무렵에 김홍도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추성부도> 이후 그의 그림으로 생각되는 그림도 없고 그가 살아있었다는 기록도 없다.분명한 것은 1809년 순조가 <해산첩>을 홍현주에게 하사했을 때 형 홍석주는 단원이 죽은 뒤에야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고 했으니, 그때는 이미 고인이었다는 말이다.

김홍도 작품이라는 점 외에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늦은 시기에 그려진 점에서도 '추성부도'는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종이에 수묵담채이며, 56.0 × 214.0cm인 이 그림은 보물 1393호로 지정돼 있다.

군데군데 지두화법(指頭畵法)을 겸용한 꼿꼿한 필치와 회갈색의 설채가 스산한 가을밤
의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어둡게 채색되어 있으며
갈필을 사용하여 가을밤의 스산한 분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좌우에 산이나 언덕을 배치하여 초옥과 마당을 감싸듯 하는 구도, 불규칙하게 꺾여 올라가다가 끝이 갈라지는 나무 형태 등 단원의 전형적인 화법이다.

화가의 문인 취향과 필묵법(筆墨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추성부도는 중국 북송시대 저명한 문필가 구양수(歐陽脩.1007-1072)의 문학작품 <추성부>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가을밤에 책을 읽다가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듣고 인생의 무상함을 탄식하며 자연의 영속성과 인간 삶의 덧없음을 노래한 걸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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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의 '추성부도'는 집안에 구양수가 있고 동자가 하늘을 가리키는 몸짓을 하는 순간을 포착했다.

화면에는 메마른 가을 산이 그려져 있고, 산 능선 위로는 수평방향의 갈필로 음양을 주어

밤중임을 시사하고 있다. 중국식 초옥(草屋) 둥근 창 안에는 구양수가 보인다.

구양수가 책을 읽다가 소리가 나자 동자에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서 살피라 했고,

이에 밖으로 나간 동자는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사방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성월교결 명하재천 사무인성 성재수간 : 星月皎潔, 明下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라고 답했다는 바로 그 유명한 장면을 그려낸 시의도(詩意圖)이다.

 

 

동자는 손을 들어 바람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으며 집에서 기르는 학 두 마리는 목을 빼고 입을 벌려 그 바람소리에 화답하듯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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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당의 낙엽들은 왼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이흩날리고 있다.

화면 왼쪽 위에는 밝은 달이 하늘에 떠 있고,언덕에는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고 그 옆쪽에는 대나무에 둘러싸인 초옥이다.

좌우에 산이나 언덕을 배치하여 초옥과 마당을 감싸듯 부감하듯 그려냄으로써주제를 강조하는 포치방식은 역시 구도에 대한 단원의 뛰어난 감각을 단적으로 말해주며,호리호리하면서도 불규칙하게 꺾여 올라가 끝이 갈라지는 나무형태 또한 단원의 전형적인 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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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약간 비비듯이 처리된 메마른 붓질은 차가운 달빛 속에서 거칠고 황량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소리를 효과적으로 전달해내고 있다.

그것은 곧 구양수가 전하고자 했던 노년의 비애이자 또한 동시에 죽음을 앞둔 단원의 심회에 대한 형상화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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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글을 읽다가 서남쪽 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섬짓놀랐다.

귀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다. 무슨 소리일까.

바람소리인가. 낙엽이 구르는 소리인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동자를 불러 무슨 소리인지 네가 좀 나가보아라 하였다.

별과 달이 밝게 빛나고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는데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그것이 가을의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아! 슬프다. 이것은 가으르이 소리로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아아! 산천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는구나.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영혼이 있는 존재이다.

온갖 걱정거리를 마음에 담고, 그 번거로운 일들이 몸을 괴롭히니,

마음이 흔들리면 반드시 정신 또한 흔들리게 마련이다.

하물며 감당할 수 없는 일들까지 마음이 미치고,

자신의 슬기로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을 근심하게 되어서는,

혈색 좋은 얼굴은 어느새 마른 나무같이 시들어버리고,

그 검게 빛나던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쇠붙이나 돌같이 단단한 바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찌하여 초목과 더불어 번영을 다투고자 하는가?

생각건대 누가 저들을 해하는가.

또한 어찌 가을의 소리를 한탄한단 말인가?

동자는 곁에서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단지 여기저기 풀벌레 울음소리가 가득하니, 마치 나의 탄식을 돕기나 하는 듯하다.

을축년 동지가 지난 후 3일 되는 날 단구가 그리다(乙丑冬至後三日 丹邱寫)

 


 


단원 김홍도의 도서중 하나


대형사이즈에 특유의각법으로 성명,호,본관등
이 새겨진 품격높은 도서이며 끝글자어조사 야(也)
를 넣어 " 입니다." 하고 겸손한 예의를 갗춘 도서이다.


 

미공개 화첩(畵帖)

조선 시대의 문예부흥기로 일컫는 정조시대에 활약한 단원 김홍도의 미공개 화첩으로 단원이 60세 전후의 말년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10폭의 수묵담채화를 담고 있다.

일본의 한 소장가가 경매에 내놓은 이 화첩들은 37.8×33.8cm 크기로 기존에 알려진 단원의 말년작 대부분의 주제가 산수, 화조인데 비해 이 화첩에는 인물위주의 풍속화가 다수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 수보리구경(須菩提究竟)

석가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수보리가 험난한 산행을 통해 참선하는 가운데 포말이 이는 물을 바라보는 장면을 그린 ‘수보리구경’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사회상을 한국적인 해학과 정취를 곁들여 생생하게 표현해낸 단원의 절정기 화풍의 경향과 특색이 고루 반영된 명작으로 평가받는 화첩이다.



수차도[水車圖]

수차를 힘차게 밟으며 밝은 표정으로 생업에 열중하고 있는 인물을 그린 그림.




▲구년면벽좌선(九年面壁坐禪)

달마의 면벽좌선 모습을 그린 ‘구년면벽좌선’. 인내와 각고의 수행을 대표하는

모습을 빠르고 거침없는 필선으로 회화미의 절정을 보여 주고있다.




▲유상독조(柳上獨鳥)

버드나무에 앉은 새 한 마리를 그린 작품으로 중국 명대 절파풍의 화조(花鳥)화가인 여기(呂紀)의 필법을 본 따 그린 그림이다




무인식성명[無人識姓名]

한적한 들길에 동자 1명을 데리고 나귀를 타고 있는 인물을 그림.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던 단원의 행서, 전서 화제까지 함께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화폭마다 관지(款識)와 도서(圖書)를 달리해 단원 연구에도
자료적 가치를 갖는다.

▲계색도[戒色圖]

웃통을 벗고 부채를 든 남자가 잡은 물고기를 응시하는 장면을 포착한 ‘계색도’

 

 



▲ 지팡이를 든 두 맹인

호방하고 원숙한 필치가 돋보인다.

 

 



 ▲낙타를 탄 몽골인

당시 중국풍물을 다룬 이색적인 풍속화





▲묘길상[妙吉祥]

북한의 국보 제46호 지정된 묘길상을 그린 실경산수화





                                                       ▲화조도[花鳥圖]

중국 명대 절파풍의 화조화가 임양(林良)의 필법을 본떠 그린 ‘화조도’.







김홍도(金弘道 1745~?)는 화원(畵院)화가로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이다.

산수는 물론 인물, 풍속, 영모(翎毛), 화조 등 모든 화재에 능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

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불공


노중 상봉


우물가’는 수작을 부릴 겸 목도 추길겸 우물가로 다가간 한량이 여인들에게 물을 청한다. 여인은 물을 건네며 차마 풀어헤친 남정네의 가슴팍을 애써 외면을 하고, 노파가 물을 길러 오다가 이 광경을 보고 못마땅한 듯곁눈질하며 주변의 행동거지를 살피고 있다.


점심



신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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