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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군 노자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3.04.10|조회수231 목록 댓글 0

 

 

노자수경도 청대 화가 임백년

                                                                 

[대기원] 아득한 옛날부터 여러 모습으로 화신  노자의 이름은 (李耳) 도가창시자

갈홍(葛洪)이 쓴 신선전(神仙傳)을 보면, 노자는 아득한 옛날 상삼황(上三皇) 때에 현중(玄中)법사로 화신하였고, 하삼황(下三皇) 때에는 금궐제군(金闕帝君)이라 하였으며 복희(伏羲)씨 때는 욱화자(郁華子)였다고 한다. 신농(神農)씨 때는 구령요자(九靈堯子)였으며 축융(祝融)씨 때에는 광수자(廣壽子)로 화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黃帝) 때에는 광성자(廣成子)였으며, 전욱 때에는 적정자(赤精子), 제곡 때에는 녹도자(祿圖子), 요(堯)임금 때에는 무성자(務成子), 순(舜)임금 때는 윤수자(尹壽子), 우(禹)임금 때는 진행자(進行子), 은(殷)나라 때에는 석칙자(錫則子), 주(周)문왕 때는 문읍(文邑)선생이라 칭하면서 화신하였다 한다.

태상노군 즉 노자의 출현은 아득한 옛날부터 세상에 나오지 않은 때가 없었다고 하니 그 근원이 아득하여 범인의 시각으로는 측량할 길이 없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범려(월나라의 재상으로 오나라와 싸움에서 승리로 이끈 사람) 또한 노자의 화신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은 당연히 시정에 떠도는 잡설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노자의 종적에 대하여 헤아릴 길이 없는 범인에게 가지가지 억측이 나도는 가운데 한(漢)나라 때가 되면 도교가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도교 각 문파에서는 일제히 노자를 개산(開山)조사로 받들어 모셨다.

이때부터 "혼원황제태상도덕노군(混元皇帝太上道德老君)"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였는데, 간략하게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고 불렀다.

노자는 일생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도학공부에 전념(一生潛深于道學)하여 성정(性情)이 무사태평하고 명예나 이익을 탐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장생불노(長生不老)만 구하였고 다른 어떠한 욕망도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자는 주나라 때에는 벼슬을 맡지 않았으며 명예도 구하지 않았다 한다. 도(道)를 얻자 곧 초연히 떠나기로 하였다.

道, 可道, 非常道(道를 道라고 할 수 있는 것은 常道가 아니다)

어느 날, 노자는 행장을 꾸려서 서쪽으로 관(關)을 나가 다시 곤륜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은 지난번에 언급한 함곡관(函谷關)으로 보이며 이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혹자는 방위상으로 고찰해보건대 보계(寶鷄) 서남의 산관(散關)으로 주장한다.

이곳을 관장하던 책임자 윤희(尹喜)는 어느 날 점(卜)을 쳐보고는 신선이 이곳 함곡관을 지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밤을 새워 아침까지 몸을 돌보지 않고 사십리나 되는 길을 깨끗이 청소하고 기다렸다 한다.

어두운 하늘이 막 밝아오는데 신선이 하늘로부터 표표히 나부끼면서 내려왔다. 오랫동안 공손히 기다리고 있던 윤희는 앞을 한번 올려다보면서 노자가 출현한 것을 알았다. 서둘러 나아가 예를 취하고 문안 인사를 하였다. 윤희의 이러한 지극한 정성과 경건함에 노자는 깊이 감동했다. 노자는 윤희가 능히 득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동안 중국에서 도를 가르치지 않겠다는 규율을 깨뜨리고 잠시 함곡관에 머무르면서 매일 도를 전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노자가 약 오천 글자로 된 경전을 남기는데, 이것이 바로 해내외(海內外)에 명성이 자자한 도덕경(道德經)이다. 도덕경은 처음에 "道, 可道, 非常道, 名, 可名 非常名"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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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6세기경에 활동한 중국 제자백가 가운데 하나인 도가(道家)의 창시자.
성(姓)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또는 담(聃).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되었다. 도교경전인 〈도덕경 道德經〉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현대 학자들은 〈도덕경〉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 저술되었을 가능성은 받아들이지 않으나, 도교가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통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노자는 유가에서는 철학자로, 일부 평민들 사이에서는 성인 또는 신으로, 당(唐:618~907)에서는 황실의 조상으로 숭배되었다.

생애

                                                                                       문례노담              노자가 공자를 만나는 모습.


노자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신원이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생애에 대한 주된 정보원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기〉의 노자전(老子傳)이다. 그러나 BC 100년경에 〈사기〉를 저술한 이 역사가도 노자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제공하지 못했다. 〈사기〉에 따르면, 노자는 초(楚)나라 고현(古縣) 여향(術鄕) 곡인리(曲仁里: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루이 현[鹿邑縣]) 사람으로 주(周:BC 1111경~255) 수장실(守藏室)의 사관(史官)이었다. 사관은 오늘날 '역사가'를 의미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을 전담하는 학자였다. 사마천은 노자의 벼슬에 대해 언급하고 난 뒤, 늙은 노자와 젊은 공자(孔子:BC 551~479)와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 말했다. 이 만남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이 만남은 다른 문헌에서도 언급되어 있으나, 일관성이 없고 모순되는 점이 많아 단지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와 공자가 만났을 때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 못지않게 유명한 전설은 노자가 서쪽으로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는 주가 쇠망해가는 것을 보고는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다.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노자에게 책을 하나 써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노자는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상편·하편의 저서를 남겼는데 그것이 도(道)와 덕(德)의 뜻을 말한 〈도덕경〉이다. 그리고 나서 노자는 그곳을 훌쩍 떠났고, "아무도 그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노자가 서쪽으로 간 사실과 〈도덕경〉을 저술한 점을 언급한 뒤에 사마천은 가끔 노자와 동일시되는 다른 인물들에 대해 말했다. "초(楚)에 노래자(老萊子)라는 사람이 있어서 책 15권을 저술하여 도가의 정신에 대해 서술한 바 있는데 공자와 같은 때의 사람이다." "주나라의 태사(太史)이며 위대한 점성술가인 담()이 진(秦:BC 384~362)의 헌공(獻公)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어떤 이는 그가 곧 노자라고 하고 어떤 이는 아니라고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덧붙였다. "노자는 150년의 수명을 누렸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200년 이상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초인(超人)의 장수를 믿었기 때문에 도교 신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매우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훨씬 뒤에 생겨난 전통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로는 BC 4세기경에 활약했던 장자(莊子)가 노자의 죽음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아주 오래 살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노자의 생애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로 사마천은 그가 은군자였음을 들었다. 은군자인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을 가르쳤다. 실제로 중국 역사상 속세를 떠난 은자는 늘 있어왔다. 〈도덕경〉의 저자(또는 저자들)는 생애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노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가 하는 의문은 많은 학자들이 제기해온 것이지만, 그같은 의문은 별 의미가 없다. 현존하는 〈도덕경〉은 1명의 저작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 내용 가운데는 공자 시대의 것도 있지만 다른 내용은 훨씬 후대의 것임이 분명하므로, 이 책은 전체적으로 보아 BC 300년경에 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사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도덕경〉의 저자가 태사 담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학자들은 〈사기〉에 나오는 노자의 후손들에 대한 기술이 신빙성있다고 보고 노자의 생애가 BC 4세기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노자의 가계(家系)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간주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에 이(李)라는 가문이 스스로 도교의 성현인 노자의 후예라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있었음을 증명해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자가 실제로 존재했었는가를 조사하는 출발점이 될 수 없다. 노자라는 이름은 어떤 개인보다 특정형태의 성인집단(聖人集團)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성인으로서의 전설

〈사기〉의 노자전과 기타 오래된 문헌에서 이따금씩 나오는 기술을 제외하고도 2세기 이후부터는 노자에 대한 성인전(聖人傳)이 여러 편 저술되었다. 이같은 전기는 도교의 형성사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후한(後漢:25~220)시대에 노자는 이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사람들의 숭배를 받았고 때로는 황제도 그를 숭배했다. 그뒤 종교계에서 성전(聖典)의 계시자이며 인류의 구세주인 노군(老君)으로 추앙되었다. 노자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부처의 기적적인 탄생신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노자의 어머니는 노자를 72년간 임신하고 있었고, 노자는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이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또다른 신화는 노자의 성(姓)이 생겨난 유래를 설명한다. 노자는 오얏나무[李木] 아래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오얏을 의미하는 이(李)가 성이 되었다고 한다. 이 두 신화는 도교신앙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번째 신화에 따르면 노자는 역사상 여러 명의 다른 인물이 되어 지상에 내려와 통치자들에게 도교의 교리를 가르친 것으로 해석된다. 2번째 신화는 노자의 서행(西行:함곡관으로 간 것) 이야기에서 발달된 것으로 이 신화 속에서 부처는 바로 노자라고 간주된다. 3세기경 불교의 포교활동을 방해할 목적으로 이같은 이야기를 조작하여 위경서(僞經書)가 씌여졌다. 〈노자화호경 老子化胡經〉이 바로 그것인데, 이 책에서 불교는 도교의 아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대 정부는 빈번히 이 책을 금서로 지정했다.

노자라는 인물은 모든 계층에게 일반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유생들에게는 존경받는 철학자였고, 평민들에게는 성현이나 신으로, 도교 추종자들에게는 도(道)의 화신이자 도교의 가장 위대한 신들 가운데 하나로 숭배되어왔다.

도교의 모든 이론은 노자에 의해 마련되었다. 〈도덕경〉을 통해 볼 때, 노장사상의 핵심은 '무위자연'(無僞自然)에 있으며, 그것이 '도'(道)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 여기서 '무위'는 우주론적 정향을 지향하는 것, 즉 부자연스런 행위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무위자연의 구체적인 의미를 말한다면 '사실 자체의 바탕 위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자체란 다름아니라 노자에게 있어서는 자연이요, 도(道)요, 기(氣)요, 변화이다. 그리고 무위란 그 바탕 위에 서서 떠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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