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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객 형가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4.05.06|조회수214 목록 댓글 0

형가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그의 조상이 제나라 사람이었는데 위로 오자 위나라 사람들은 그를 경경(慶卿)으로 불렀고 연나라로 오자 그를 형경(荊卿)으로 불렀다.

형가(荊軻)는  뛰어난 검술 실력으로 위나라 원군을 섬기려 했으나 등용되지 않았다.

형가는 유랑을 하고 다니다가 유차(楡次)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갑섭이란 자와 검술에 대해 논하게 되었는데, 갑섭이 화를 내며 형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형가는 슬그머니 나가서 그 길로 수레를 몰고 가 버렸다. 갑섭은 형가를 겁쟁이라 생각했다.

형가가 한단에서 머무를 때, 노구천이란 자와 장기를 두다가 시비가 붙었다. 노구천이 화가 나서 언성을 높이자 형가는 아무 말 없이 달아나 버렸다.

형가는 무술과 검술을 좋아했고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현인 호걸들과 어울렸다. 연에서 축(거문고의 일종)을 잘 타는 고점리전광

그 무렵 진(秦)에 인질로 잡혀갔던 연나라 태자 단(丹)이 도망쳐 돌아왔다. 태자 단

그 후 진나라 장수 번어기

연나라의 위기를 피할 방법을 찾던 중 국무는 태자에게 전광 선생을 소개했다. 태자 단은 전광을 만나 도움을 청했다. 전광은 "준마는 기운이 왕성할 때는 천리를 달라지마는 노쇠해지면, 노둔한 말이 앞지른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자신을 대신하여 형가를 추천했다. 태자 단은 전광에게 형가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전광에게 "이 일은 나라의 큰일이므로 선생께서 새어나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형가는 전광의 부탁으로 태자 단을 도와주기로 했다. 전광은 자기 역할을 다한 후 형가에게 "태자께서는 '이 일이 나라의 큰일이니 새어나가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태자가 저를 의심한 것입니다. 대체로 일을 도모할 때 남을 의심을 사는 것은 절개 있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의 행동이 아닙니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가는 태자를 찾아갔다. 태자는 형가에게 진왕을 암살할 것을 부탁하고 지위를 높여 상경으로 삼았다. 진나라가 인접 국가들을 침공하기 시작하자 태자 단은 초조해졌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형가는 진나라로 떠나려 하지 않았다. 태자가 재촉하자 형가는 "진왕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번어기 장군의 머리와 연나라 땅 독항의 지도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태자는 "지도야 줄 수 있지만 번어기 장군의 머리는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 형가는 번어기 장수를 만나 전후 사정 이야기를 하자, 번어기는 "이것이야말로 내가 밤낮으로 이를 갈고 가슴을 치며 고대했던 것입니다. 이제 당신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스스로 목을 쳐 죽었다. 태자는 이 소식을 듣고 시체에 엎드려 통곡하며 슬퍼했다. 태자는 형가가 떠나기에 앞서 연나라의 용사 진무양(秦舞陽)을 형가의 조수로 삼게 했다.

떠나는 날 태자와 이 일을 알고 있는 빈객들은 형가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흰 옷과 모자를 쓰고 형가를 배웅했다. 고점리가 축을 타고 형가가 여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별의 슬픈 노래였다.

  1. 바람은 소슬하고
  2. 역수는 차갑구나
  3. 장사 한 번 떠나면
  4.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형가는 수레를 타고 뒤를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진에 도착하여 형가가 번어기의 머리를 내놓아 진왕을 믿게 하고 지도를 헌상하기 위해 진왕을 알현했다. 진왕은 "지도를 펼쳐 보이시오."라고 말하자, 형가는 지도를 들고 진왕 앞으로 다가섰다. 지도가 다 펼쳐지자 독이 묻은 비수가 드러났다. 형가는 왼손으로 진왕의 소매를 붙잡고 오른손으로 비수를 쥐고 진왕을 찌르려 했다. 비수가 닿기 전에 진왕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신하들도 놀랐으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왕은 검을 등에 지고 칼을 뽑아 형가를 향해 내리쳤다. 형가는 부상을 입고 기둥에 기대어 웃으며 이렇게 꾸짖었다. "내가 일을 이루지 못한 까닭은 왕을 사로잡아 위협하여 약속을 반드시 받아내어 태자에게 보답하려 했기 때문이다!" 형가는 결국 연에 돌아오지 못했다.

초당사걸(初唐四傑 : 왕발 王勃, 양형 楊炯, 노조린 盧照隣, 낙빈왕 駱賓王) 중 한 사람으로 협객의 기질이 있었던 낙빈왕

  1. 이곳은 형가(荊軻)를 송별하던 곳 (此地別燕丹)
  2. 장사(壯士)의 머리털이 관을 찔렀지 (壯士髮衝冠)
  3. 그때 그 사람은 이제 죽어 없지만 (昔時人已沒)
  4. 오늘도 강물만은 여전히 차갑도다. (今日水猶寒)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도 형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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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의 형가.

형가(荊軻)는 위(衛)나라 사람이다.  그의 조상은 원래 제나라 사람이었으나, 위나라로 이주한 것이다.위나라 사람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고 불렀다.그후 그는 연(燕)나라로 옮겼다. 연나라 사람은 그를 형경(荊卿)이라 불렀다. 형경은 독서와 격검(擊劍)을 좋아하여, 술(術)로써 위나라의 원군(元君)을 설득하였으나 쓰려고 하지 않았다. 형가는 일찍이 유차(楡次)를 지나다가  개섭(蓋聶)이란 사람과 검에 대하여 서로 논하게 되었다. 이윽고 개섭이 화를내며 노려보자, 형가는 나가 버렸다.


사람들이 형가를 다시 부르려고 하였으나 개섭이 말하였다.
"아까 검에 대한 논쟁을 하였는데 이상한 소리를 하므로, 노려 보았더니 나가 버렸네. 이미 어디론가 가 버렸을 테니 이 근처에는 없을 거야"
사람을 보내어 찾아 보니 과연 형가는 이미 수레를 타고 유차에서  떠나 버린 후였다. 한단에서 머무르고 있을때, 형가는 노구천(魯句踐)과 쌍륙놀이를 하다가 말다툼이 벌어 졌다. 노구천이 화를 내며 소리치자, 형가는 말없이 도망쳐 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연나라로 오자, 형가는 축(筑)을 잘하는 고점리(高漸離),전광(田光)과 교제하였다. 형가는 술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매일 개백장, 고점리 등과 함께 시장에서 술을 마셨다. 술이 거나해 지면 고점리는 축을 치고, 형가는 그에 맞추어 노래하며 서로 흥을 내다가는 감정이 고조에 달하면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소리내어 우는 등 방약무인한 태도로 보냈다. 그 후 연나라 태자 단(丹)의 간청으로 형가는 진(秦)나라  왕을 자살(刺殺) 하는 일을 맡았다. 

 

전광은 스스로 목을 쳐 형가를 격려하였다.  그러나 진의 왕을 자살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왕의 신용을 얻어서 면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형가는 목에 천 금과 만호의 촌(村)이라는 상을 걸고 쫓기고 있는 예전의 진나라 장수 번어기(樊於期)를 남모르게 만났다. 그목을 가지고 가서 신용을 얻으려는 생각에서였다. 번어기는 형가의 말을 듣자, 즉석에서 스스로 목을치고 죽었다. 번어기의 목을 손에 넣은 형가는 한 자루의 단검을 숨기고 노래를 부르며 역수(易水)를 건너서 진나라로 들어 갔다.


바람은 고요하고 쓸쓸한데 역수는 차고도 차구나

 장사(壯士) 한 번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과연 그노래대로 형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단신으로 진나라의 궁전으로 침입한 형가는 왕의소매를 잡으면서 칼을날릴 순간 실수로 인하여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형가는 몸에 여덟 군데의 상처를 입고 살해되었는데, 죽기 직전에 고함을 질렀다. "내가 실패한 것은 살려놓고 위협을 하여 침략당한 토지를 반환 시킬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후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 왕은 시황제라 불리게 되었다. 시황제는 축을 잘 치는 고점리를 사랑하여 눈을 멀게한 다음 측근에 두었다. 고점리는 축에 납(鉛)을 장치하여 시황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못하고 결국 시황제의 손에 죽고 말았다.

 

노구천은 형가가 진의 왕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혼자 중얼거렸다.

"아아, 아까운 노릇이로다. 형가가 단검술을 습득하고 있지 않았다니.아니, 그것보다도 내게 사람을 보는눈이 없었다는 건 이 무슨 실수냐. 이전에 내가 소리쳤을 때 형가는 아마도 나를 인간으로 취급할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형가의 인격을 통찰하지 못한 노구천의 안타까움은 대단하여 밤마다 눈을 뜨고 이를 갈았고, 머리를 쥐어 뜯으며 안절부절 못하고 괴로워 하였다.

 

아무튼 형가나 고점리나 전광이 서로 그 인간을 통찰한 데 비하여, 개섭이나 노구천은  단지 형가의 겉모양만 보고 그 인격을 판단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손자는 "가을에 나는 솜털을 들어 올렸다고 해서 힘센 장사라고는 할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외형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형체 속에 들어있는 것을 잘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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