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도 못한 일, 공공연히 일어나고 ?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재판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사건2012고단 2396 호는 2012. 9. 27에 접수되어 지금까지 연기되어 판결이 지지부진한 실정이다.이 재판의 내용은 2가지 를 포함하고 있다.연안이씨 종중토지를 이용하여 골프장을 하겠다고 하면서 참가한 YA디벨로프먼트 (자본금 5천만원)의 대표인자가 전 대표 김모씨와의 부채청산을 내용으로 하는 고소사건과, 2011. 11.19. 연안이씨 종중총회에서 뇌물로 종중원들의 종권을 매수한 업자에 의하여 종중사무를 방해한 사건(2013.고단309)를 병합하여 심리하는 사건이였다.
그동안 몇몇 사람의 판사에 의하여 관장되어 왔고 이때마다 새로운 문제가 제기되어 연장되고 2014. 9. 18. 선고기일을 정하고 검사의 구형(3년징역.4억추징)으로 종결되는 것 같았는데도 새로 부임한 판사(정xx)에 의하여 2014. 10. 16.자로 선고가 연기되더니. 막상 또 선고당일에는 또 다시 공판을 다시 재개하여 재판한다 한다.
2014. 10. 27(월) 11시.10분(동부 8호법정)에서 심리한다는 것이다.
많은 종원들이 이자리를 지켜보시기 바란다.
검사의 구형이 `징역 3년`은 판사가 집행유예를 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우려,
판사가 재판을 다시 재개한다는 것은 피의자측에 유리할 가능성이 높은 상례,
현제에도 뇌물증여로 종중을 장악하고 있는 피의자의 활동이 지속되고 있지만 법원은 이를 3년동안 구속처리를 미루고 있다는 점,
등등이 이 재판을 바라보는 종원들의 관심의 촛점일 것이다.
2년동안 수차례 판사들을 거친 재판이니 잘못 한 것이 있을 런지 의문이고,
설사 있다하여 재차 심리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시간이 갈 수록 피의자의 기세는 더욱 등등하고, 다가 올 종중총회에 기칠 악영향에 대해서는 모든 종중원들이 혐오하고 있는 상태에 있어 소송이 길어 질 수록 더욱 더 불안을 느기는 형편에 있는 것이다.
금년 총회는 11월 중순을 넘어 설것이라는 결의를 이사회가 했다는데 종중총회에서 또 다시 어떠한 우려를 남길 지 걱정만이 앞선다,
이와같은 일은 매우 드물게 보는 사례로서 이 판결을 지켜보는 14만 연안이씨 종중원들로서는 심히 불안하여 앞으로 총회를 앞둔 처지에서 또 사건의 중심에서 피의자인자가 또 행패를 이르킬 우려가 따르고 나아가 재판이 종중의 장래에 미칠 영향마저 크게 미칠 것이라 예상되는 것입니다. 이날 참석한 한사람으로서 이 재판을 지켜보는 나로서는 만감이 서린다.
특히 종중원들의 무관심이 문제이다.
결국은 뇌물로 점철된 종중사건에 이같은 사건이 초래되고 앞으로 종중의 장래가 더욱 소용돟리 칠 것을 생각하니 마음만 상한다.
조상에 대한 정성은 누구나 한결 같다고 하지만 바라보는 마음만으로서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종중토지가 안전하지 않다. 모름지기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손의 용기가 절실하다
아직도 살아있다는 14만 자손들은 모두 어디로 숨었는가?
지난 8년여 동안을 설친 보람도 물거품되는 구나
비상대책위 이관희
1,000년이 지난 옛 글 한 수
내마음에 머금는다.
혜비 서씨(慧妃 徐氏) 또는 화예부인(花蕊夫人)
중국 오대십국 시대의 시인·문인이자 후촉 황제 맹창(孟昶)의 황후였다.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 황제 맹창의 황후로 시와 글짓기에 능통하였고 재주와 미모를 겸비하여 화예부인(花藝夫人)이라 불렸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충무부절도사(忠武府節度使) 왕전빈(王全斌)에게 군사 6만을 주어 후촉을 공력하게 하였다. 후촉은 군대가 14만이나 되었으나 많은 전사자를내고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다. 송태조의 후궁이 된 화예부인은 기회를 노렸다가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결하였다.
송나라에 포로로 잡혀온 서씨의 그 재능과 미모는 조광윤과 그의 동생인 조광의가 서로 질투하여 다투게 만들었다[1]고도 한다. 서씨와 함께 포롤 잡혀오고 맹창이 죽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조광윤은 재빨리 서씨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노여록》(爐餘錄)에 의하면 '촉주가 죽자 곧 태조의 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동생 조광의도 이 재색을 겸비한 서씨를 노리고 있었다.[1]
서기 976년 겨울 조광윤이 임종이 가까워 침대에 누워 거의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조광의는 서씨에 대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다. 한밤중에 조광의는 형 조광윤을 몇번이나 불렀으나 대답이 없자 서씨를 희롱했다. 조광윤이 일어나 이를 알고 분노하여 옥부(옥으로 된 도끼)로 바닥을 내리쳤다.[1] 놀란 황후와 태자가 왔을 때는 이미 임종이 가까워져 있었고, 조광의는 슬그머니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그리고 조광윤은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