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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논문

[평론]황동규론 - 물음의 메아리

작성자정진명|작성시간09.05.27|조회수389 목록 댓글 0

물음의 메아리

-황동규론-

정진명

 


 

      1.   머리말

 

  주관이라는 말이 객관이라는 말을 동반하는 개념이라면 인간이라는 한 존재를 상정할 때 그 앞에는 대상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놓이게 된다. 인식론의 상식을 차용하지 않더라도 이 두 존재 사이에 놓이는 간격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한 인식 주체의 노력은 부단히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대상은 주관에 의해 변용을 입게 되며 이 변용의 방식이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사람마다 각기 다른 편차를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대상의 확산된 형태인 외부 세계와 접촉함으로써 발생하는 내면의 반응을 시라는 사회적 약속체에 담아 표현한다. 여기서 표현된 세계는 실제와는 다른 양상을 띠는데 이는 인식 주체로서 시인의 변용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며 불가피하게 변용되는 세계와 시인의 상호 교섭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학관계가 시 다양성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의 삶이 뿌리 내리고 있는 현실세계는 언제나 시의 출발점이 되며, 이런 의미에서 시인의 현실 인식 문제는 주목을 요한다. 현실이라는 낱말 자체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있는 개념임을 상기 할 때, 시인이 시에서 잡아낸 현실을 분석하는 일은 한 사회와 그 속에서 고뇌하는 시인의 정신 세계를 조감하는 지름길이 된다. 더욱이 사회변화에서 시인이 어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의식의 안테나를 지닌 존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사회변화는 시인의 의식에 날카롭게 새겨지며 그 내면화된 실제 현실은 시라는 장치를 통해 표현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는 현실의 자장권을 근간으로 구축되며 시인의 의식의 바늘 또한 그 안에서 진동하게 된다.  바깥은 현실로 인하여 시인의 내면세계에 파문이 일 때 시인은 그에 대응하는 시의식의 변용으로 응전의 자세를 취한다.  따라서 시인의 현실인식 태도는 한 사회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띠며, 시에 나타난 시인의 변모 과정은 그 자체가 동시대의 청사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시가 넋두리나 선전문구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현실이 주는 고통의 무절제한 발산이 아닌, 내면의 순화된 감성으로써 그것을 용해시키려는 시인에 대한 소박한 탐색은 보람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황동규의 시세계가 변모해가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2.   밉지 않은 감상주의

 

  감상주의를 이야기할 때 거기에는 흔히 비난의 어감이 배음처럼 깔려 있다. 특히 감상주의가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의미에서라면 더 그러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 및 현대라는 용어는 “타의에 의한”이란 우울한 수식어를 연상시키는데 개화기에서 왜정, 8.15, 6.25, 5.16으로 이어지면서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파동은 민중들에게는 물론 지식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주었고 그것이 현재로 이어져 분단이라는 민족단위의 비극이 연출되면서 현대 지식인들에게 또 다른 위상에서의 자각과 아픔을 요구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진군과 더불어 전개된 서구식 개념의 문예사조는 한국의 풍토에서 가히 춘추 전국 시대를 방불케 하는 상황을 조성한다.  서구의 경우, 각 사조가 긴밀하게 맞물리는 계기성을 바탕으로 기존 경향에 대한 반발과 극복이라는 각 시대의 요청이 따라 전개된 것과는 달리 우리 나라는 당시 사회의 혼란상을 반영이나 하듯 어지러이 수용되어 어지러이 뒤섞인다.  이 점 당시의 작품을 하나의 사조나 유파로 규명하기 어렵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구 낭만주의의 이른바 세기말 경향이 당시의 감수성 예민한 청년들에게 열병처럼 번져 동경, 꿈, 이상의 건전한 세계로 나아가야 할 정신이 슬픔, 죽음, 허무의 세계로 이탈해 갔음을 문학사는 보여준다.  이는 이른바 “감정의 자발적 유로”라는 워드워즈의 말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 지성의 제어기능을 완전히 사상한 경우라 하겠다. 거기엔 감정의 무차별한 난사와 그로 인한 수준 낮은 허무, 대책 없는 슬픔 따위만이 전리품으로 남을 뿐이다.

  슬픔, 죽음, 허무 등을 노래한다고 해서 모두 감상일 수는 없다. 이상을 꿈꾸고 명징한 세계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겐 삶 자체가 불투명한 속성을 지니는 것임에야 거기서 파생되는 그러한 감정은 너무나 인간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 옷의 맵씨가 응당 문제된다. 내용물에 옷이 어울리지 않을 때 거기엔 독자와 유리된 시인의 공허한 눈물과 넋두리가 남을 뿐이다.

  분명, 시의 바탕을 들여다 볼 때 황동규의 초기시는 자칫 감상이라고 지목될 소지를 다분히 갖추고 있는 그런 것이다.


                             1

         며칠내 시작한 눈 그치지 않은 어느 저녁 네가 거리로 나오면, 침

       묵이 있고 눈을 인 어깨가 있는 한 사내를 만나게 될 것을, 그 사내

       뒤에 내리는 雪景을 만나게 될 것을.  그 雪景속에 모든 것은 지금

       말이 없다. 너는 알리라, 떠날 때보다는 내 얼마나 즐겁게 돌아왔

       는가.  외로운 것보다는 내 얼마나 힘차게 힘차게 돌아왔는가


                             2

       꿈을 꾸듯 꿈을 꾸듯 눈이 내린다.

       바흐의 미뉴엩

       얼굴 환한 이웃집 부인이 올갠을 치는 소리


       그리하여 돌아갈 때는 되었다.

       모통이에 서서 가만히 쌓인 눈을 털고

       귀 기울이면 귀 기울이면

       모든 것이 눈을 감고 눈을 받는 소리


       말하자면 하나의 사랑은 그렇게 받는 것이 아닐 건가

       그리하여 받는 사랑의 얼굴이 때로 빛나서

       이윽고 눈을 맞은 얼굴이 쳐들 때

       오고픈 곳에 오게 된 것을 깨닫는 것이 아닐 건가


       이제 돌아갈 때는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 이웃집 부인이 올개을 치는 소리

       고개 숙인 얼굴에 빛이 올라오는 소리

       바흐의 미뉴엩

                                -「葉書」 전문


  황동규의 소도구로 자주 사용되는 눈 (겨울)이 이 시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 유난히 눈을 끄는 시임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차가우리만치 차분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삶의 비애와 잔잔한 기쁨이 교직된 상태의 복잡한 정서가 그 바탕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대의 시에서 흔히 발견되는 감상의 직접표출이 통제되어 탄탄한 구성미를 보여주는 것은 철저한 시적 방법에 기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감응의 무절제한 발산이 아닌 치밀한 지성의 조작이 이 시에 단단한 기율을 가하고 있다. 

  1연의 경우(침묵 → 눈을 인 어깨 → 한 사내 → 그 사내 뒤의 설경)으로 시선을 재빨리 이동시켜 주면서 이미지군(Imagery)의 오버랩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런 속도감이 독자로 하여금 하나의 감정적 소재에 깊이 몰입되는 것을 적절히 규제한다.

  황동규의 시는 삶의 근원모를 비애감과 허무, 사랑이 혼합된 정서로 나타난다. <떠날 때보다> <즐겁게 돌아왔>지만 사랑은 <모든 것이 눈을 감고 눈을 받는 소리>처럼 받는 것이 아니냐고 물음표를 던진다. <얼굴 환한 이웃집 부인이 올갠을 치는 소리>가 새로울 만큼 시인은 <힘차게 힘차게 돌아왔>지만 오히려 자신의 결론 보다는 독자의 공명을 호소하는 미지근한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점 황동규의 시에 명사형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명사형의 끝맺음은 판단중지<대부분의 경우 처절한 절망의 결과지만>의 효과와 더불어 물음의 형태에서 보여주는 여운을 길게 남기는 것이 특징이다. 어찌 보면 이 시에서 암시하는 상황은 <떠날 때> 품었던 이상, 혹은 희망이 꺼진 후의 체념적 행복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런 양상은 <사랑>이 <당신>이라는 보다 구체적인 대상으로 설정되면서 전개되는 「小曲」 연작에도 계속된다.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당신이 언제나 피어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읍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까워지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즛이 밀려나고 싶었읍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바라고 있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득 흩뿌리는 밤비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휘번뜩이는 거리를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小曲. 3」 전문


  <당신> 이라는 말에 이 시의 무게중심이 놓여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당신>이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나를 규정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 넌즛이 밀려나고 싶>은 여유를 보여주고 있다.  「葉書」 에서의 <사랑> 이라는 관념어가 <당신>으로 변용되면서 죽음이 아니면 사랑을 택하는 뜨거운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이별을 아는 자의 차분한 자기확인 뒤에 오는 사랑임을 확인케 한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심정에 이미 「悲歌」 의 세계를 지배하는 허무의 빛깔이 배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첫 눈내림이 있는 저녁, 당신과 함께, 혹은 당신의 없음과 더불어, 들판에 나> (「小曲.4」) 가는 부정과 긍정이 공존하는 심리상태는 <원근법에서 해방된 한 세계를><꿈꾸> (「小曲. 4」) 지만 <당신>이 있음이 없음이 되고 없음도 있음이 되는 존재의 불확실한 상태에서 허무주의는 그 싹을 드러낸다.


         나는 외롭지 않다. 너의 머리를 흔들어라. 기다린 건 언제나

         오지 않았다. 친구여, 엎드린 얼굴을 들고 이제 흥미없이 살아

         버리는 자의웃음을 보여다오. 그 웃음이 끝날 때에는 내 조용히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주마.


                           ---얼음의 「秘密」 중 ‘얼음위에서’ 일부---


  이런 정서는 허무주의가 그의 시에 깊이 삼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그래서 <새로운 웃음을 만들어 주마>고 약속하는 말도 씁쓸한 감정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모든 사랑이 一시에 배반당하는 것 같은> 불안과 막막함이 <흥미없이 일생을 살아버리는 자의 웃음을 보여> 달라는 외침으로 유도된다. 내면 깊숙히 자리한 <안도와 불안> (「小曲. 5」) 속에서 삶의 감상과 그 초극 사이를 부단히 부침하며 고뇌하는 시인의 옆모습을 보게 된다.


         내 꿈결처럼 사랑하던 꽃 나무들이 얼어 쓰러졌을 때 나에게 왔던

         그 막막함 그 解放感을 나의 것으로 받으소서

         나에게 지금 엎어진 컵

         빈 물주전자

         이런 것이 남아있읍니다

         그리고 닫혀진 창

         며칠 내 끊임없이 흐린 날씨

         이런 것이 남아있읍니다

         그리곤 세 명의 친구가 있어

         하나는 엎어진 컵을 들고

         하나는 빈 주전자를 들고

         또 하나는 흐린 창밖에 서 있읍니다

         이들을 만나소서

         이들에게 잠간잠간의 내 이야기를 들으소서

         이들에게 막막함이 무엇인가는 묻지 마소서

         그것은 언제나 나에게 맡기소서

                               ---「祈禱」 2연


  <다가가는 내가 보이지 않아> (「小曲. 5」)는 상태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 (「祈禱」) 는 일이다. 그리하여 쓰러진 자리에서 시인이 확인하는 것은 엎어진 컵, 빈 물주전자, 닫혀진 창, 흐린 날씨와 같은 새로울 것도 없는 흔하디 흔한 <존재>들이다. 삶의 막막함이 근원 모를 비애감으로 연결되어 오히려 시의 차분함을 받쳐주고 있으며 <막막함이 무엇인가 묻지> 말라는 그의 요구는 비가의 어두운 바탕을 제공하면서 그의 시 전체를 관류하는 기류가 된다.


         빈 머리여 빈 머리여

         외로운 자의 뜰이여

         혼자 돌아올 때면 늘 만나는

         내가 차지한 빈 空間

         내 몸 만큼의 낯선 空間

         그 空間 前面에 박혀 있는

         반쯤 감은 눈을 사랑한다면, 사랑한다면,

         그 눈 올려놓은 돌산 고요하고

         돌산앞 黃土길에 가만히 숨어

         오래 참으며 허옇게

         눈 없는 웃음을 웃으리오

         발 붙일 데 없는 사랑이로다


         이제 너의 기다림을 어디 가 찾으리오

         하늘도 땅도 소리없이

         목말라 울 때

         네 가볍지 않은 기다림을 받아주리오

         들판에는 한 줄기 연기가 오르고

         붉은 黃土길 돌산에 오르고

         바람 한 점 없는 들판

         벌거벗은 땅위에

         그림자처럼 오래 참으며

         무릎 꿇고 오래 앉아 있었노라


         목마름 속에 캄캄히

         아아 손가락 발가락과 발목

         그 마디들은 하나하나 놓아버리고

         빌려 쓰던 말도 한 마디씩 돌려보내고

         빈 공간만큼 아무데고 누워

         물없는 웅덩이처럼 있고 싶을 뿐

         아아 아무것도 스며있지 않은 삶, 혹을 죽음

                                                              -「悲歌 제 2가」, 뒷부분


  <아무것도 스며있지 않은 삶, 혹은 죽음>에 단적으로 예시되듯 자신을 수식하고 있는 것들을 <돌려보내>려는 어두운 의식이 발견된다.   자기답지 못한 것에 대한 혐오, 혹은 기존의 자기부정이 강화되어 있는 상황임을 암시할 뿐 「悲歌」라는 시 전체가 모호성 속에 놓여있다. 이는 존재에 집착함으로써 발생하는 불가피한 현상으로 보이는데 다만 그것을 黃土길, 돌산, 연기와 같은 바깥 사물과 연관시켜 구체성을 제시하려는 방법에 의존함으로써 존재를 향한 내밀한 접근이 다소 구체화 되어있다.


      3.  同列에 흐느낌

 

  황동규의 초기시각이 내면세계로 심하게 경사됨으로써 「悲歌」의 중후한 어법에도 불구하고 어두움과 낯섦이 시의 기저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근원모를 삶의 비애감과 허무를 동반한 <존재>의 탐구는 <오늘도 거기엔 말없이 燈불이 켜> (「十四行」) 진다는 사실과 < 침에는 기억에도 확실히 / 눈부신 해가 매일 뜨드라> (「네 개의 黃昏」)에 접맥되면서 인식의 새 차원으로 이어진다. 주관의 흔들림과는 관계없이 의연히 존재하는 외부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전개된다. 자신만의 내면 세계에서 외부 세계에 <걸어서 도착했>(「寄港地. 1」)을 때 거기서 시인은 시대고에 쩔어 있는 현실을 만난다. 이 접점에서 허무와 비애의 해결을 잠시 보류하고 고통의 내면화로 집약되는 시인의 독특한 시세계가 열린다. 포착되는 모든 대상을 철저히 내면화 시키는 변용이 두드러진 시의 양상을 이루면서 허황되지 않고 절실함으로 다가오게 하는 그의 접근법이 형성된다.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드군

         낮에도 문을 잠그고 연탄불을 쬐고

         有信眼藥을 넣고

         에세이를 읽는다드군


         몸 한 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병장 이하의 계급으로 돌아다녀 보라

         김해에서 화천까지

         到處鐵條網

         皆有檢問所

         그건 난해한 사랑이다

         난해한 사랑이다

         全皮手匣을 낀 손을 내밀면

         언제부터인가

         눈보다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

                                                            -「太平歌」 전문


  내면으로 깊이 침잠하면서 불가피하게 야기되는 모호함과 불투명함이「寄港地」를 거쳐 이 시에 이르면 말끔히 가셔있음을 볼 수 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대상으로 시야가 이동하면서 현실감각을 보다 구체화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목부터가 역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내용을 살피면 어느 한 구석 <太平>이라는 말과 어울려 줄 부분은 없다. 이러한 역설은 스스로의 자각에 의한 <약소민족>의 인식이 아니라 남에 의해 자극된 관계개념으로서의 <약소민족>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그 비극성이 더 커지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자조의 빛깔을 띠고 있기도 하다.  <눈보다 더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다>는 말장난같은 역설이 성립하는 것도 (到處鐵條網 / 皆有檢問所>라는 현실이 <병장 이하의 계급을 달고 돌아다녀 보>아야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시대상황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1연의 <약소민족>과 2연의 <병장 이하의 계급>에 의미있는 대응을 주면서 <全皮手匣을 낀 손을 내>미는 시인앞에 <낮에도 문을 잠그고 연탄불을 쬐>는 약소민족의 실체가 다가온다. 더우기 <몸 한 구석에 감출 수 없는 고민을 지니고> <난해한 사랑>을 더듬어 시인의 의식이 세계사의 지평으로 나아갈 때 문득 다가서는 것은 민족과 나의 왜소함이다. 따라서 세계와 민족과 나의 인식은 <빛나는 바램이 모두 파괴된 세계속으로> <잠과 대치되는 모든 矛盾속으로> (「逃走記」) 시인을 안내하며 <칼날처럼 벗은 우리 조국> (「落法」) 앞에 세운다.

  한 위치의 확인은 주변의 인식이 그 전제가 된다. 따라서 현 위치의 설정은 시간과 공간속으로 연계된 공동체의 유대에 대한 인식을 요구하며 <主語가 없는> (「落法」) 시인에게 역사의 인식은 하나의 출발점을 재설정 해준다. 여기서 시인은 그의 의식에 축적되어온 역사의 갈피속으로 투신한다.


                   1

         손금 접어두고 눈오는 남루

         寒天에 法도 없고 怯도 없는 논

         땅위에 깔리는 허연 눈 가루

         마음에 짖밟는 형제의 손


                   2

         눈 떠라 눈 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東편도 西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람

         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全琫準」 전문


   <먼저 떠)나서 (혼자 죽)은 외로운 혁명가를 만나고 있다. 그것도 자기 내면속에서 함께 어울리고 있다. 1연 4행이 모두 명사로 끝나면서 여운을 준다. 또한 「太平歌」에서의 <난해한 사랑>이 변주되어 <마음에 짖밟는 형제의 손>으로 구체화되어 있다. 이것이 급기야 2연의 <눈 떠라 눈 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는 경고로 바뀌면서 참혹했던 시대의 주인공 전봉준과 동열에 서서 흐느낄 만큼 시인은 심각한 위기의식에 싸여있다.


         琫準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步馬 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砲들의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목매었으련만, 대국낫도 왜낫도 잘 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 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三南에 내린는 눈」 전문


  여기에 이르면 동열에 스며드는 의식은 그 정점에 다다른다.  앞서 지적했지만  황동규 시의 양상은 현실 내지 고통의 심도 깊은 내면화로 집약되는 바, 그의 시가 허황됨을 벗어나 현실감을 얻는 원인도 이러한 변용의 강도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제시되는 것은 다른 시에서 보이는 내면화 작업이 어느 정도 후퇴해 있고 상황의 묘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돌다리>를 <무심히 건너는> <우리>로 시의 화자는 따로 설정되어 있으며 역사를 현실 상황으로 끌어올려 매우 객관성 있게 서술하는 의도 뒤엔 그 만큼 치열한 의식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면 안 된다.  이러한 치열성이 곧 우리라는 공동체의식의 반영물을 도입시키면서 현실에 대한 항의를 유발시킨다.


         가르치려는 자들은

         복잡하게 한다

         죽음을


         우리 같이 보자

         행인들

         돌든 학생들

         혹은 벽에 기대선 꽃들

         쓰러지며 步道에 흘리는 꽃물

         그대의 죽음은 단순하다


         불을 끄고 문을 닫을 때

         어두워지는 壁面처럼 단순하다

         벽에서 사라지는 그대는 生涯

         하나의 幕이 풀려

         방바닥에 흘러내린다


         창밖에선 소리없이 눈이 내린다

         눈이 쌓인다

         임자없는 손이 눈을 어루만진다

         자꾸 떨리는 손

         그대의 죽음을 어루만질 수 없다

                                                          -「許筠. 2」 전문


  주자학 이데올로기의 세계에서 반항의지를 과감히 표출했던 허균과 <돌든 학생들>을 한 공간에 배열하면서 그들의 동류의식을 현실의 아픔으로 융화 시키고 있다. 더불어 시인은 돌 던지는 학생들의 대열에 동참하는데 <사방을 둘러보면 사방에서 / 내가 아우성치고 있>는 자신의 직접체험과 함께 분노하는 그들 곁에는 <끓지 않는 것> 들이 <텔레비젼 앞에서 웃고 있> (「新楚辭」)음도 동시에 포착해 낸다. 이는 <그대의 죽음은 단순하>지만 <그대의 죽음을 어루만질 수 없>는 의식의 혼선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잠과 대치된 모든 모순속으로> 뛰어드는 시인의 모습에서 예상된 것이었다.


         아아 病든 말[言]이다

         발바닥이 식었다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

         마른 바람이

         하루종일 이리저리

         눈을 몰고 다닐 때

         저녁에는 눈마다 흙이 묻고

         해 形象의 해가 구르듯 빨리 질 때

         꿈판도 깨고

         찬 땅에 엎드려

         눈도 코도 입도 아조 아조 비벼버리고

         내가 보아도 내가 무서워지는

         몰려다니며 거듭 밟히는

         흙빛 눈이 될까 안 될까

                                        -「계엄령속의 눈」 전문


  계엄령이라는 차가운 현실이 설정되어 있다. (矛盾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끓지 않는 것)들이 웃고 있는 상황, 언제나 그런 것이지만 분노하는 사람들의 주변에는 그저 방관자의 위치에서 그것을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여기는 사람들조차 있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이 현실의 압력과 합세하여 의식을 조여올 때 시인은 <단순한 남자가 되려고 결심한다> <내가 보아도 내가 무서워지는> 실천과 언어의 괴리에서 오는 절망은 <아아 병든 말[言]이다>라는 탄식으로 변하며 의식의 뜨거움에 그 한계를 느낄 때 <발바닥이 식>어버리는 전율은 두려움의 형상화로 전개되면서 여태까지의 치열성이 오히려 후퇴하는 양상을 드러낸다. 이러한 시인의 결벽성이 현실에 더 깊이 내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다.


  나는 요새 무서워져요.   모든 것의 안만 보여요.   풀잎 뜬 江에는 살없는 고기들이 놀고 있고 江물위에 피었다가 스러지는 구름위에선 문득 暗號만 비쳐요.  읽어봐야 소용없어요.  혀 잘린 꽃들이 모두 고개들고, 不幸한 살들이 겁없이 서있는 것을 보고 있어요.  달아난들 추울 뿐이예요. 곳곳에 쳐있는 細그물을 보세요.  황홀하게 무서위요. 미치는 것도 미치지 않고 잔구름 처럼 떠있는 것도 두렵쟎아요.

                                                                                      -「楚歌」 전문


  이것은 표면뿐만이 아니라 배후에 또아리틀고 있는 현상의 실재를 확인해야 하는 시인의 운명을, 그래서 고통스러운 존재방식을 드러내어준다. <暗號>를 <읽어봐야 소용없>는 한계상황과 더불어 <달아난들 추울 뿐>이라는 의식은 <곳곳에 쳐놓은 細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황홀>한 무서움 속에서 <다들 망거질 때 망거지지 않는 놈은 망거진 놈 뿐이야>(「1974년 여름」) 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런 강한 부정의식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와의 유대의식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역사속에서 공동체의 존재근거를 읽어낸 시인은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그대>와 <서울 近郊의 산이 모두 얼어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편에 밀려 남아있는 그대의 언덕> (「金洙暎의 무덤」)을 잊지 않는다.

 

 누군가 땀 흘리며 얼굴을 지운다.   먼저 입과 코가 지워지고 눈이 지워지고 記憶의 가장자리 表情이 지워지고 드디어 <너>도 <나>도 지워진다.   위를 둘러보라, 어느 샌가 (우리)만 남아, 아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돌 主題로 한 다섯 번의 흔들림」  에서 <항상 더불어>, 일부


  공동체의식에 대한 인식의 확산과정에서 <너>와 <나>라는 개체의 독자성을 희석시키고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면 거기엔 결국 <항상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할> <우리>라는 소박한 <사랑>이 남는다.

  그러나 시인은 곧 <이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사랑의 뿌리」)라는 부정의식을 노출시킨다. 이런 역설은 그의 시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이지만 사랑이 믿음을 그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은 응당 문제가 된다.


         이 세상에서

         도둑처럼 살며

         열린 집 열린 사람 만나면

         온몸으로 떨고

                                     -「우리는 수상한 아이들」 일부


  <사랑>이 <아이>로 연결되면서 구체적인 심상을 표출하는 것은 당연한 연상 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상한>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한 아니들임은 단순한 시의 전매장치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는 불신이 그 바탕에 깔려있는 현실의 이중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랑의 뿌리에서 <아아 이뻐라 / 우리는 열려 있다>는 긍정의 시각과 함께 다음과 같이 동정에 대해 달갑지 않은  시각이 병존하는 것은 <矛盾 속으로> 뛰어든 혼란의 한 패턴을 재확인케 한다.


         버스 정류장 옆에 그 소년이 없다

         목발 짚고

         일간 스포츠 곁에 붙어서 있던 아이

         대신 가죽잠바를 입은 사내가 앉아 있다


         없으면 없을수록 마음 가볍지

         난 예수가 아니야

         로마병정도 아니고

         예루살렘 대학에서

         아랍어를 가르치고

         별들이 무사한 것을 보고

         행복하지 않고

         불행하지도 않고


         내가 만만하게 차서 발이 아플

         돌멩이는 없었어

                                                         -「지붕위에 오르기」 일부


  적어도 현대인의 고질병이 조그만 동정조차 허용하지 않는, 허용해야  무력감만을 확인하게 되는 무관심임을 이 시는 암시하고 있다. 이는 역사의 의미 속으로 침잠했던 시인이 새로운 차원의 인식을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징이라 하겠다.

  현실인식에서 비롯한 사랑에 대한 관심이 부정어로 형상화 됨과 동시에 그 모순의 불협화음 극복을 위한 자아의 재확인 작업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관심을 동반한다. 의식은 <無量面 淨土里>(「망초꽃」)을 지향하는 데 현실은 그 방향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데서 <사랑>에서 나타난 부정의식은 계속된다.


         앞길이 보이지 않는다

                                              ---「줄타기」


         더러운 중년이라 욕하지 말아다오

                                              ---「아파트 生傳」


         살아있는 것은 늦 겨울 바람속에 세워논 몸 뿐

                                              ---「아파트 生傳」


         被害妄想家 예 있소, 소리칠 것인가

                                              ---「歌尺行」


         우리 모두 뚫어논 길만 다니는 자들이다, 소리칠 것인가

                                              ---「歌尺行」


  이 쯤 되면 자학에 가깝다.   외부로 지향했던 의식이 극복의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을 때 야기되는 좌절의 한 모습을 본다.   말하고자 하는 의지의 파탄은 <중얼거림보다 더 캄캄한 / 중얼거림>(「아파트 生傳」)으로 귀결되어 <들리지 않게 중얼거림만 남은 곳이 / 바로 죽음>이라는 의식, 곧 무서움이 죽음으로 큰 변화를 보이면서 시인은 <더 큰 침묵을 향하여 / 걸어가>려고 한다.


         단단한 것은 모두 녹이 슬었다

         砲들을 위장하듯 마음 구석구석에 감추어둔

         감추고 검은 풀로 덮어둔

         發火의 말뭉치들을 찿아보아라

         여기저기 겨울을 지난 거미줄들 날아다닌다

         마른 풀들도 날아다닌다

         마음의 뚜껑을 잠시 열고

         옷깃 여미고

         國道 벗어나 멀리 가지 못하고 주저앉은

         마을을 벗어나 말없음을 벗어나

         더 큰 침묵을 향하여

         걸어가 보아라

         지리산 중턱에는 아직 눈과 바람이 남아있지만

         강건너 복숭아밭의 검은 줄기들은

         꿈의 문자들처럼 싱싱하다

         싱싱하다, 생전 처음보는 낙서처럼 신나게

         읽어 보려무나

         물가에, 신발 가지런히 벗어놓고

         전쟁예보와 비누로 더러워진 옷도 벗어놓고

         마음은 뚜껑 열린 채 내던져 놓고

         뒤돌아보지 않고

         눈감고 혼자 초봄 저녁강을 건느는 자의

         뼈시린, 뼈시린 따스로움

         돌들이 걸린다

         발가락들이 전부 살아있었구나, 속삭이듯

         속삭이듯 길 하나 없는 이 길의 편안함

                                                    -「눈감고 섬진강을 건너다」


  제목부터가 시사성이 강하다. <눈감고 섬진강을 건너> 어디로 가는가? 현실에서 부딪힌 장벽은 부정어를 던져주었을 뿐 극복의 열쇠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결국은 하고픈 <發火의 말뭉치들을> <砲들을 위장하듯 마음 구석구석에 감추어두)고 (마을을 벗어나) 부질없는 (말없음을 벗어나) 걸어간 곳은 (더 큰 침묵) 곧 풍장이라는 세계이다.   (들리지 않게 중얼거림만 남은 곳이)(「아파트 生傳」) 풍장의 죽음으로 옮겨간다.


    4. 물음의 메아리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 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 가을 차가운 햇빛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 뜨리고

         바람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퉁퉁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 조각도

         바람속에 빛나게 해다오

         바람을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으로 몸의 피가 다 마를 때까지

         바람과 놀게 해다오

                                                          -「風葬. 1」 전문


  풍장을 통하여 의식의 분열을 체험하고 있다. 분명 시인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인칭 화자가 되어 죽음 자체의 의식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시인의 의도성이 있다. 이는 유기체적 생명의 단순한 종말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의 죽음임을 뚜렷이 부각시켜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태가지 그의 존재를 유지해 오던 현상태의 의식의 죽음을 상징한다는 해석외에 달리 뾰족한 방도가 없다. 그가 풍장이라는 방식을 택하는 의도에서 이 점 더욱 뚜렷해진다. 서해 도서 지방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풍장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덧없는 살, 혹은 외양만의 형체를 거부하고 본래의 “자기골격”을 확인하려는 자기자신에 대한 항의를 함축한다. 이는 까마귀들에게 <한 눈 팔다가 한 눈 파먹히고> <한 눈으로 보는 세상>이 <뛰고 날고 참 잘들 논다!>(「風葬. 5」)는 그의 태도에서 확인된다.

  초기 존재의 허무, 비애에서 역사의 의미속으로, 공동체의 밑뿌리가 <사랑>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딪힌 벽은 의식의 죽음이라는,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 혹은 후퇴라는 결론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여기의 죽음은 적어도 현상태의 의식이 한계에 와있음을 뜻하며, 죽음이라는 마지노선을 설정해야 할 만큼 그의 위기 의식은 강렬한 상황으로 보인다.

  죽음은 대리연출이 불가능한 체험의 일회성과 그 직접성으로 인하여 인간의 한계상황을 가장 명료하게 깨닫게 하며 이러한 사고를 통하여 현실과 존재에 대한 애착은 더욱 강화된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죽음에 집착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명징한 삶을 투시하기 위한 일보 후퇴이다. 더우기 살아있는 유기체의 종말이 아니라 죽음 당사자에 의해 조작된 죽음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현실의 한계상황을 넘어 새 차원으로의 도약을 위한 움츠림을 예고한다. 죽음에로 의식을 후퇴시킴으로써 현실에 무관심한 표정을 짓지만 죽은 후의 의식은 부단히 현실과 연계되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해달라는 요구가 온통 시를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 ...

         검색이 심하면

         곰소 쯤에 가서


에서 보듯 太平歌에서의 <到處鐵組網 皆有檢問所>라는 패턴이 반복되면서 죽음조차도 검색을 피해야 하는 현실을 시인은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세계인 죽음에 집착함은 제의의 몸짓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제의를 통하여 그는 새로운 변신을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제의의 구조는 어떠한 것인가?

  문화인류학자들의 업적은 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 원시사회에서의 성인의식이나 다른 모든 의식, 또는 현대사회의 종교 행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즉 제의는 <분리 → 전이 → 귀환>의 3단계 기본과정으로 구성된다. 제의의 참가자는 기존의 위치에서 일정한 다른 장소로 분리된다. 거기에서는 일상 생활속의  시간과 공간이 배제되고 신성한 의식이 지배한다. 여태까지 이어져온 삶이 거부, 소거되고 고독과 위험이 수반되는 일련의 수련을 거쳐 처음의 장소로 귀환한다. 그러나 귀환후의 삶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황동규에게 현실과 부딪히는 것은 적지 않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는 현실앞에서 위압감을 계속 체험하면서 그 과정에서 따르던 허무, 비애, 사랑의 양상이 마침내 죽음이라는 현실의 <멈춤>속으로 귀결된다.  이를 도식화 시키면 다음과 같다.

 

 

   존재와 삶의 의미망 속에서 원환고리를 이루며 시의 양상을 재배하는 비애, 허무, 사랑의 끝간 데가 풍장이라는 죽음의 세계로 집약되면서 시인은 내면의 자기모험을 감행한다.  죽음은 여태까지 이어져온 존재, 그 의미 일반에 대해 소거 내지는 대폭 수정을 가하는 부활을 위한 후퇴를 뜻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죽음의 제의를 통하여 제 3의 세계로 나아갈 것이 예상된다.

  그러나 절망에 익숙한 시인의 의식이 오히려 장애가 되는 역기능 또한 배제 할 수 없다. <난간 위에 눈을 조금 쓸고 / 목숨 내려놓고>(「風葬. 4」)라는 구절이 보여주듯이 시인은 자기 목숨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다. 삶은 부담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유도된다. 이 의식이 죽음이라는 제의로 안내하지만 <“내가 채 죽지 않았다면 / 이건 참 큰 일인 걸”>(「風葬. 8」)과 같이 제의에 적극 참여를 방해하는 요소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이런 조바심은 죽음이라는 틀 속에서 느긋함을 체험하는 놀라움으로 변한다.


         말할 수 있을 때 말하고

         말할 수 없을 때

         마음 놓고 중얼거린다

         (아직도 놓은 마음이 있다니!)

                                                 -「風葬. 10」 일부


  <아직도 놓을 마음이 있>는 여유의 심리는 <죽음을 통하지 않고 곧장 승천하는>(「風葬. 15」) 소망으로 연결된다. 앞의 도설을 참조하면 그러한 승천이란 <가>에서 <나>를 거쳐 <다>로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상성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귀환을 위한 웅크림이 의미없는 시도일 가능성조차 배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유희로서 제의는 그 의미가 무산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삶의 치열성에서 낙오하거나 현실도피를 정당화하는 길을 가게 된다.

  시인이 죽음에 집착하면서 그 이후의 시엔 죽음이라는 양상이 하나 더 첨가된다. 「魂없는 者의 魂노래」 연작과 「점박이눈」, 「첫 봄비」를 통하여 시인은 죽음에 계속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그의 시엔 죽음 이전의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면이 발견된다. 질문을 통한 의미의 강화가 그것이다. 특히 역설의 상황을 만들면서 이 질문은 생각을 요구한다.

  현실과 맞부딪혀 감당하기 힘들다고 판단될 때 존재를 포기하거나 현실에 무조건 순응하는 두 갈래길에서 그는 제의를 통해 사망신고를 한다. 여기서 그의 부활은 곧 질문이라는 형태로 집약됨을 알 수 있다. 꽤 긴 시에 속하는 「악어를 조심하라고?」의 경우, 표면적인 물음의 형태를 띤 문장이 15차례나 등장한다. 시인은 <지금 정신상태를 제대로 보여줄 객관적 상관물>로 <악어>를 설정하고 있다. <제일 길 안 드는 게 악어>라는 발언은 현실에 대한 반발 내지 항의를 내포하고 있지만 그 <앨리게이터 악어>는 난폭하다거나 험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이 그 악어보다 더 난폭하고 험악하다는 짙은 암시 때문이거니와 동시에 그것은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라 현실의 압력에 버티려는 의식<다분히 김수영을 연상시키는>의 '객관적 상관물'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사람들이 사랑과 진실에 빠져있을 때> <옥상>에서 악어가 <서울의 불빛을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질문은 잘 길들여지지 않는 악어를 길들이려는 매스컴의 성황에 비례해서 그 만큼의 <외로운 악어>가 되어 <종묘앞 싸락눈>을 맞는 자신의 상태를 독자의 폐부 깊숙히로 찔러주는 의미심장한 메아리이다. <상처받은 자들이 많더>라는 김수영의 물음에 되뇌어 보는 <우린 다 잘 있는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황동규의 현실인식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죽음 이전의 물음과 죽음 이후의 질문의 양상을 대비시켜보면 쉽게 드러난다.


         나는 지금 깨었는가 꿈을 꾸었는가

                                         ---「아파트 生傳」


         눈 뜨고 캄캄히 뒤돌아 볼까

                                         ---「어린 시절 애인의 죽음」


         태어남, 만남, 그리고 모든 것의 시적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인

         가

                                         ---「겨울의 빛」


         被害妄想家 예 있소, 소리칠 것인가

                                         ---「歌尺行」


         우리는 모두 뚫어논 길만 다니는 자들이다, 소리칠 것인가

                                         ---「歌尺行」


  풍장 이전의 물음이 넛두리의 어조를 띠고 있음에 반하여 풍장 이후의 물음은 감추어진 의미를 거꾸로 강화하는 무기임이 드러난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물음이라는 은폐의 방식을 통하여 의미의 공명을 일으키도록 탈바꿈 했음을 시들은 보여준다.

  역시 긴 시에 속하는 「淸冷浦」에서도 물음을 기본 선율로 하여 현실과 역사의 사실을 교직시키는 교묘한 변주가 시도된다.  단종의 유배지로 시인이 간다는 행위부터가 다분히 복선을 깔고 있거니와 죽음의 체험뒤에 현실감각과 역사 인식이 더 명료 해졌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플라톤의 시인 추방을 상기시키면서 가장 날카로운 의식의 더듬이를 지닌 시인들이 상징성을 띤 장소 <영월 淸冷浦로 보내지>는 현실을 환기시킨다,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 이 밖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을”>이라고 쓰여있는 금표비(禁標碑)가 시인의 눈에 포착되어 갈등을 야기하는 현실의 구조를 표면화, 구체화 시켜준다. 죽음 이전의 현실인식이 보다 더 명징하게 시작되고 있음을 이 시는 보여준다. 그 전과는 다른 양상임은 물론이다. 이는 그 물음의 차이에서 발생하며 아울러 풍장 이후의 시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앞으로 전개되는 시세계는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5.   맺음말

 

  인간에게, 특히 시인에게  어떤 대상과 만나는 접근법은 항상 문제가 된다. 대상과의 간격을 좁히려는 주체의 태도에 따라 삶은 다양한 폭으로 전개되며 그것은 시를 통해 독자에게 제시된다. 황동규의 초기 시가 다소 모호하고 불투명한 인상을 주는 것은 바깥 사실에 눈놀림이 아니라 존재와 삶 그 자체라는 내면의식에 대한 집착이 빚은 결과이다. 그의 시는 바깥 현실의 철저한 내면화라는 말로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지향점이 내면탐구로 돌아섰을 때에는 불투명함을 수반하지만 반면 현실세계로 지향할 때는 허황되지 않은 현장감과 절실한 설득력을 얻는 장점이 된다.

  초기의 허무, 비애에서 그의 시선이 현실과 역사의 지평으로 전개되면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현실의 중압감이 크게 작용하는 위치에서 <사랑>은 확인되고 이 사랑에 대한 달갑지 않은 시각은 두려움을 낳으면서 <죽음>의 세계를 준비한다.  이 죽음이 갖는 의미는 <矛盾 속으로>(「逃走記」) 뛰어든, 혹은 뛰어들 수 밖에 없었던 그의 행동의 연장선상에서 그 파악이 가능하며 이 의도된 죽음속엔 부활이라는 은밀한 의지가 스며있었음을 풍장 이후의 시는 보여준다. 어떻게? 물음 그 자체의 역동성에 의존함으로써다.  풍장 이전의 자조하는 듯한 물음 양식은 그 후 의미전달의 새 장치로 전환된다. 위장된 <發火의 말뭉치들>이 물음이라는 매개항을 통해 독자의 내면속으로 메아리쳐 가는 효과를 노린다.

  우리는 황동규 시의 변모를 통해서 현실의 한 단면을 투시하게 되며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끝없이 나아가는 건전한 정신세계를 만난다. 그의 시에 나타난 기교는 격앙된 정서를 직접 발산하는 태도가 반드시 초래하는 ‘감상주의’라는 낙인을 극복한다. 이는 시가 정서만의 산물이 아니라 지성의 통제가 요구되는 ‘통합된 감수성의 세계’라는 극히 당연한, 그러나 지키기 어려운 원론을 다시 확인케 한다. 아울러 물음으로 제시되는 시인의 의도는 동시대인에게 부단한 경종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서정시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그의 의식에 따르는 시는 보다 깊은 주목을 요한다 하겠다.

                                            ( 1987년  봄 )  충북대 신문문학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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