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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작, 회인시편

경로당 / 한 잎 피반령 / 봄 / -2번지 감나무 / 우레실에서 / 웃복우실에서 / 갈티에서 / 철쭉꽃 / 동헌 뜰 / 5월의 과수나무

작성자정진명|작성시간08.10.24|조회수76 목록 댓글 0

경로당

 

 

네모반듯한 지어진 붉은 벽돌집 경로당 지붕에는 깃발이 세 개 꽂혀있다.

태극기를 가운데 두고, 새싹 도안의 새마을 기와 벼 포기 도안의 충청북도 기가 나란히 서서 시멘트 가루처럼 삭아 내리는 시간의 갈피를 뒤척인다.

심각한 저출산이 발등에 불똥을 떨군 지금,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목청 푸른 새마을 새싹은 바람이 더는 불지 않는 하루의 대부분을 접힌 채 걸려있다.

 

지루함을 못 견디겠다는 듯이 흔들리는 깃발 밑에는 중세의 나팔을 닮은 확성기 셋이 삼각대에 얹혀, 나라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신속하게 짖어댈 듯한 태세로 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방향을 각기 겨누었다.

한 번은 스위치를 내리지 않아 점심끼니의 간으로 쳐진 할머니들의 입담이 마을 전역에 삐라처럼 뿌려진 적이 있다.

그때처럼 허둥거리는 일만 빼면, 나팔이 주둥이를 나불거릴 일 없는 지루한 시간이 햇살을 조명으로 이 집을 스쳐간다.

 

느린 몸짓과 고요한 정적이 차지한 이 집도 바빠질 때가 있다.

선거철이면 미끈한 신사들이 베짱이처럼 들락거리고, 지루함에 지친 깃발들이 일제히 펄럭거린다.

거리 가득 나부끼던 선거공약과 함께 이들의 발길 철거되면, 집은 다시 고요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산소 호흡기 호스처럼 뚫린 실골목 저 끝을 자꾸만 내다본다.

 

스레트와 돌기와집 위로 머리 헝클어진 감나무들이 언니들처럼 서 있고, 그 사이 깃발 셋이 나란히 옷깃을 펄럭이며 시간 속을 걸어간다.

몸통이 빠져나간 시간의 허물을 뒤로 길게 남기며.

4339. 4. 19.

 

 

자국

 

 

큰길 뒷골목 벽의 뜻 모를 낙서들 중,

흰색 스프레이가 서둘러 뿌린 ‘김두한’의 ‘ㄴ’을

방앗간 뒤에서 마주친 할머니의 손가락이 가리킨다.

거기가 80년 물난리 때 잠긴 높이이다.

고사별에서 일가족 열다섯을 산사태로 덮어버린 물은

웃수머리의 몇 백 년 생 느티나무 두 그루를 뿌리째 뽑아

바디울 앞의 개울가로 옮겨놓았다.

넘실거리던 홍수의 물높이에서 냇둑을 따라

피반령을 넘어온 차들이 콸콸 흘러간다.

 

세월 앞에 풍상을 겪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어서,

잘린 팔 몇 개 옹이로 삼킨 늙은 느티나무에서는

경건한 신의 냄새가 난다.

옛 둑에 서서 몇 차례 홍수를 이겨낸 그 두 그루에도

어느덧 봄이 온다. 그늘 바깥으로

물줄기를 밀어낸 둑이 나무의 허리까지 올라갔지만,

하류 쪽의 나무가 먼저 잎을 피운다.

그것이 흙탕물을 먼저 맞아야 하는 쪽의 움츠림 때문이라면

피반령을 넘어오는 또 다른 홍수를 예감하는 것이리니,

소용돌이치며 밀려드는 세월의 밑바닥으로

마을은 높여진 둑만큼 가라앉는다.

 

맞은편으로 옮겨간 손가락 끝의 조립식 주택과

말끔히 단장한 시멘트 담벼락은 97년 물난리의 흔적이다.

80년과 97년 사이의 징검돌을 디디며

손가락 끝이 몇 차례 더 짚어내는 홍수의 이빨 자국이

골목의 풍경 어딘가에 틀니처럼 남아

살아남은 자의 주름 잡힌 말 속에서

뿌연 앙금을 일으키는 중.

4339. 4. 20.

 

 

한 잎 피반령

 

 

나뭇가지 사이로 굽어보는 피반령은

그대로 한 닢 고운 잎사귀다.

 

산줄기는 굽이굽이 잎맥을 따라

깔깔한 하늘 끝으로 달려가고,

 

갈라진 잎맥 뒤에서는 개미 떼처럼

차들이 꼬리를 물고 올라온다.

 

바람 불면 나뭇가지 대신

하늘 땅땅 만한 잎이 통째로 흔들린다.

 

그 잎 전체를 떠받친 자루 끝에

진딧물처럼 붙어서, 나는

 

부푸는 마음의 봉지에 담는다.

느낌표처럼 떨어지는 시의 수액을.

4339. 4. 21.

 

 

 

 

회인 초입 웃수머리에는

늙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부부처럼 서있다.

손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봄이 오는 속도는 달라서

파릇한 물이 한 닷새

남쪽 나무의 꼭대기까지 천천히 물들인 뒤에

옆 짝꿍의 아랫도리로 비로소 건너간다.

두 나무 사이에 가만히 서서 눈을 감으면

봄은 촉촉한 촉수를 구석구석 털끝까지 뻗어

제비가 끌고 오는 강남의 풍광을

겨우내 메말랐던 몸속 가득 채운다.

지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몸속의 수 천 겹 필름에

감전 당한 형광 빛 봄기운을 인화시키며

옆 나무로 지지직 건너가는

4월 24일, 오전 11시 12분 경.

4339. 4. 24.

 

 

-2번지 감나무

 

 

중앙리 124-2번지 행랑채는

감나무 옆구리에 매달려있다.

발등을 밟은 흙벽은 물론 그 옆의 대문까지

나무가 한 발만 빼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다.

제게 기댄 행랑채와 돌담을 마다 않고

나무는 열심히 걸어간다.

몇 십 년 걸어도 이 골목을 벗어나진 못하지만,

철따라 가지 끝에 찾아오는 변화로

나무는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안다.

옹이가 만든 구멍 안을 향해 점점 들어가다가

제게 기댄 모든 것과 함께 폭삭 무너지는 것이

이 긴 나들이의 종착점임을 알지만,

거기에 이르기도 전에 길동무들이 먼저 떠날 것임을

나무는 아는 것일까? 오늘 아침,

정오를 향해 걸어가는 나무의 그늘이 무겁다.

햇빛에 숭숭 뚫린 얼룩무늬 그늘 모자를 쓴

-2번지 집이 나무의 옆구리에 매달려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제 품에 든 집채를 어미닭처럼 품는다.

4339. 4. 28.

 

 

우레실에서

 

 

용머리 마을에서 번개무늬처럼

지그재그로 올라간 길의 끝이 우레실이다.

거기서 무엇이 울려는지 모르지만,

동네 어귀엔 용을 꼭 닮은 짐승 하나 웅크려

벌써 몇 억 년째 지축이 울릴 우레 소리를 기다린다.

장마철 천지가 안개비에 지워지고

신도들이 푸른 가지를 흔들며 신들린 듯 춤추면

천둥소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날아올랐다가

번쩍하는 순간,

번개가 쪼갠 틈서리로 잽싸게 빠져나간다.

날이 개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허물이 이 녘에 남아

눈꺼풀이 잠시 여닫는 망막에 씻은 듯이 걸려있다.

번쩍 하는 사이 몇 십 년이 흘렀으니,

번쩍 하는 사이 몇 십 년이 또 흐르리라.

그 틈바구니로 빠져나가기 위해 잠시 머문

이 세상의 풍경은 서럽도록 아름다운데

우레실에서 번개무늬 따라 흘러내린 실개울은

쇠푼이에서 오는 물줄기와 만나

아닌 척 잠든 용머리를 적시고 대청호로 들어간다.

영원을 향해 고개 돌린 용이

고요한 강물의 흰 유리 한 장 입에 물고

번개무늬 틈으로 순간마다 날아간다.

그 유리에 얼비치는 시간의 허물 속에 내가

한 점 개미처럼 찍혀있다.

4339. 4. 29.

 

 

웃복우실에서

 

 

깊은 골짜기에서 솟구쳐 오른 길 끝에

복우실 마을이 맺혀있고,

거기서 두렁길로 탈탈거리며 한 참을 더 들어가면

마을이 또 나타난다. 웃복우실이다.

하늘이 이마 높이로 내려오고

산들이 배꼽 높이로 성큼 내려가는 마당가에는

노인 셋이 나란히 앉아 낯선 손을 신기한 듯 쳐다본다.

더는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묻는 내게

검게 탄 수수깡 손이 뒷집 처마 밑을 가리킨다.

새잡는다고 손전등 비추며 들쑤시던 곳이다.

동네엔 우리 같은 늙은이덜 베끼 없어.

다들 밖으루 나가구 온 동네가 텅 볐어.

처마 밑 길 따라 동네 뒷꼭지로 올라가지만

문득 늙어버린 마음은 영감님들 옆에 쪼그리고 앉아

무릎까지 내려간 산들을 굽어본다.

하품하는 내게 누군가 와서 길을 묻는다면

합죽이가 된 입을 오물거리며 들릴 듯 말 듯

더는 길이 없다고 말해주리라.

그래도 등살 훈훈해지는 햇볕이 있어

푸르러가는 논밭을 온종일 바라보다가

장기판을 쓸고야 마는 마누라의 등쌀에 떠밀려

처마 밑 낡은 둥지로 돌아가는 곳.

아랫복우실 지나 웃복우실에는

미처 데려오지 못한 마음이 남아

나 대신 저 혼자 늙어가고 있다.

4339. 5. 1.

 

 

갈티에서

 

 

숲 사이로 갑자기 나타나는 동네

한 복판의 경로당 앞을 지나간 노인들이

비탈 밭에 간신히 매달려 비닐을 씌운다.

흙 묻은 돌을 길바닥에 대추씨처럼 뱉어놓고

봄물을 촉촉 머금은 다락 논은

곧 개구리 울음 속에 파묻힐 것이다.

벗어날 수 없는 하늘은 항아리 속처럼 오목하고

까치만 짖지 않는다면 평생

동구 밖을 내다볼 일이 없는 곳,

어딘지 모르고 도착한 마을에 잠시 서서

갈 곳을 잃는다. 갈티라?

화살처럼 날아든 골짜기 따라

조금 더 가자면 하궁(下弓)이고

돌아가면 방금 지나온 웃보고실이겠지만,

내 갈 데는 그런 곳이 아니어서

숨 한 번 크게 들이쉬어 본다.

갈 곳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세월의 바깥에 신의 배꼽처럼

갈티는 조용히 놓여있다.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붉은 벽돌과 깃발만 아니라면

세월을 알 수 없는 경로당 마당으로

나아갈 길과 돌아갈 길이 모여들어

저무는 봄 햇살을 과녁처럼 받는다.

그 한 복판에 살촉마냥 꽂힌 채

정처를 잃은 마음의 골짜기에

이름 모를 새 울음이 쟁쟁 날아든다.

4339. 5. 1.

 

 

철쭉꽃

 

 

점심시간 끝을 알리는 종소리에 쫓겨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수돗가에는

미처 다 못 잠근 수도꼭지가 꼭 있다.

졸졸졸 새는 그 꼭지를 꼭 잠근다.

 

수돗가 철쭉이 활짝 꽃 피운 날.

4339. 5. 1.

 

 

동헌 뜰

 

 

하루 묵은 인산객사를 나와

의관정제하고 삼문 자리를 건너면

따봉노래방과 장미양품 사이

 

실골목 끝에서 동헌이 나타난다.

왕눈이개구리 같은 백성들의 운명이

춤추는 곤장 밑에서 결정되던 벼랑 끝.

 

지금은 세로 간판에 적힌 ‘회인양조장’에서

썩은 권력이 제 기둥뿌리까지 뽑은 옛 세월을 뉘우치는지

술독마다 맑은 눈물이 고인다.

 

다시 100년 후의 눈물이

오늘의 무엇에서 발효되는지 알 수 없어

어둠이 빈집마다 누룩처럼 쌓이는 저녁,

 

통인 아이가 머물렀을 곁채를 한 동안 바라보다가

취한 걸음으로 앞서는 바람을 따라나선다.

목련이 담장 너머로 한 때의 영화를 내다버린다.

4339. 5. 2.

 

 

5월의 과수나무

 

 

5월의 과수나무들은 모두

태극권 수련 중이다.

 

공태원 비닐하우스 안의 대추나무들은

흰 학이 외발로 서서 한쪽 날개를 올린 백학량시 자세를 잡고

비탈 밭 민정이네 사과나무들은 고탐마 자세로

탐스런 봄바람의 말 잔등을 어루만진다.

그 옆의 복숭아나무는 해저침이라고,

손끝을 바다 밑까지 내려 바늘을 찾는 중이다.

대회라도 나가려는지 배나무는 더욱 과감해져

방금 지나간 바람의 관자놀이를 양 주먹으로 지그시 마주 누른 뒤

몸 틀고 손발 올리며 쌍봉관이에서

전신등각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몸짓이다.

 

24식이라거나 42식 중의 한 자세를 취하고

나무들이 가을을 향해 명상에 잠겨있다.

 

고수의 동작은 흐르는 물과 같다.

바람이 불면 나무들은 일제히 몸놀림을 바꾸며

천지의 변화에 따라 제 안의 길로 기운을 뻗는다.

뿌리에서 올라온 땅의 기운이

가지 끝으로 내려온 하늘의 기운과 만나

저에게 허락된 꽃을 매듭마다 피운 나무들이

내 안으로 들어와 팔다리를 올리고 허리를 비틀며

이리저리 일그러진 나를 교정해준다.

잠시 후에 회음에서 백회까지 임독을 열며

몸 속 구석구석에 꽃이 핀다.

 

5월의 과수나무들이 갖가지 동작으로 내 안에 들어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꽃을 피운다.

4339. 5. 4.

*太極拳 白鶴亮翅, 高探馬, 海底針, 雙峰貫耳, 轉身蹬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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