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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 한산과 관련해 올리는 와키자카 명장설의 진실

작성시간22.08.03|조회수12,052 목록 댓글 14

 

 

영화 '한산' 의 와키자카 야스하루(변요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의 와키자카 야스하루(김명수)

 

예전에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 은 물론이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 '한산' 의 흥행과 담당 배우들의 명연기로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상대였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도 소위 '명장' 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겨났습니다.

 

이른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무사들이라 통칭되어지는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의 인원이었던 동시에

1,600 병력으로 5만의 조선군을 용인에서 무찔렀으니... 정말로 그는 당대 일본 최고의 명장이었을까요?

 

 

 

 

 

- 용인전투 -

 

용인전투도

 

와키자카 야스하루 제일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용인전투는 사실 어떻게 보면 일본 전체의 입장에서 따져도

'스스로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전투' 라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야 5만이나 되는 삼도근왕병이 궤멸당해서

한양 탈환의 기회를 놓친 희대의 패전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일분군에게도 불편한 진실이 있었습니다.

 

'5만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모인만큼 일본군도 포위 섬멸을 계획했으나 쌩뚱맞게 와키자카 군만 습격을 감행'

그래서 실제로 전투 당시의 5만이라는 큰 전력이 공중분해 되었다고는 하나, 그 실질적인 피해는 미미했으며

그 흩어진 전력들도 당시 호남과 호서 일대에서 일어난 유수의 의병장들에게 흡수되는 일이 많았던 겁니다.

 

즉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입장에서야 역사에 남을 대승이지만, 전반적인 전황을 일본군 입장에서 고려한다면

흩어져 유격전을 벌이는 수만명이나 되는 적의 신규병력이 더 생겼기에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또한 상대한 5만이라는 병사 자체의 '질' 도 생각해본다면 애초부터 전쟁을 대비하고 키워낸 정규군이 아니라

급히 농사짓던 일반 평민들을 겨우겨우 모아 갓 징집한 '어중이 떠중이' 라고 할 수 있었던 만큼, 실질적으로는

일본측에서도 임진왜란의 주요 승리로 선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용인전투 자체를 '해프닝' 정도로 규정하죠.

 

* 일본 측에서는 임진왜란 3대 승리를 '칠천량 해전, 사천성 전투, 울산성 전투' 로 규정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 히데요시의 최측근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

 

임진왜란 전후 시기까지의 인원별 최대 석고 달성 연령(출처 : 유투브 채널 아케치)

 

까놓고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 사람들이 전국시대에서 '도쿠가와 사천왕' 이나 '사나다 10용사' 라는 건 알아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이란 개념은 잘 모릅니다. 그 중에서 인지도 있는 후쿠시마 마사노리나 가토 기요마사도

그 칠본창의 일원이라는 걸 잘 모르고 있고요. 어쨌든 다음 단락에서 칠본창 내 와키자카의 비중을 따져보면...

 

실제로도 그 중 활약이 별로 없었기에 또다른 칠본창의 일원이던 가토 기요마사와 후쿠시마 마사노리로부터

"우리가 왜 저런 놈과 동급 취급을 받아야만 하나?" 란 굴욕적인 언급을 들을 정도로 취급이 좋지는 않았으며,

임진왜란 당시 출전한 일본의 다른 영주들과도 비교하게 되면 와키자카의 입지는 더더욱 초라했습니다.

 

 

 

 

 

- 그럼, 그런 장수와 치룬 한산대첩은 비중없는 해전? -

 

절대로, 당연히 아닙니다. 조선 정벌을 최종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결국 수륙병진책이 필수였습니다.

가뜩이나 이순신과의 수차례 해전에 엄청나게 깨진 만큼 일본 입장에서도 만전을 기할 수밖에 없었고요.

그런데 왜 그 일대 해상 전면전을 치루게 될 인물이 왜 '와키자카 야스하루' 인가 하면....

 

결국 히데요시 입장에선 '당대 정보력의 한계' 로 '용인전투' 의 진실된 내막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단순 수치상 '1,600의 병력으로 5만 대군세를 격파' 한 건 경악스럽고 엄청난 희대의 군공이었죠.

당시 이순신에게 깨지던 일본의 전황을 고려할 때, 막강한 전력을 지원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겁니다.

(물론, 혹시나 싶었던 마음에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를 동시에 붙이기도 했지만요.)

 

한 마디로 요약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사기당한' 겁니다.

즉,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아니?? 고작 1,600으로 5만의 조선군을 격파했다고? 와키자카에게 이런 면모가???

좋아, 그렇다면 와키자카로 하여금 그 이순신과 일전을 치룰 수 있게 밀어줘야겠군.

수군전력 지원 전폭적으로 해줘서 조선으로 파견보내."

 

구로다 칸베에

 

네... 알겠습니다. (와키자카가 그 정도의 용병 능력을 갖췄다고?...)

 

 

 

 

 

[한산해전 당시]

 

 

 

 

 

이순신

 

작정하고 일대 전면전을 준비한 만큼, 이번 적장은 상당히 신중한 작자일 터...

광양현감 어영담이 이끄는 판옥선 5척으로만 유인될 가능성은 낮을 수 있으니

어쩌면 전 함대가 견내량으로 들어가 유인작전을 감행할 가능성도 염두해...

 

어영담

 

쟤네 전 함대 73척이 그냥 따라 나오는데요???...

 

 

??!???!???!!??

 

 

 

 

 

그렇습니다... 즉, 어떻게 보자면 한산대첩은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훗날의 '칠천량 해전' 과도 그 결이 비슷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와키자카가 원균 급까지는 아닙니다. 적어도요...)

 

 

 

 

 

결론 : 한산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일대 대승인 건 맞다. 그러나 상대

'와키자카 야스하루' 는 미디어의 모습처럼 실제로 명장은 아니었다.

또 어떻게 보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패한 한산대첩은 훗날 있을

'칠천량 해전' 과도 그 양상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

 

ex. 지휘관 능력을 제대로 파악 못한 주군, 어쩌면 개인의 욕심만 많았을 지휘관,

실상은 전투 당시 부족했던 지휘관의 역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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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樂socc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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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댓글 리스트
  • 작성시간 22.08.03 씹좆균은 딱 중소기업에서 아무짝에도 능력없는데 자리 차지하고 있어서 정치질만 오지게 하는 팀장 새끼랑 똑같음
  • 작성시간 22.08.03 싯팔.. 복카이센..
  • 작성시간 22.08.03 사실 한산대첩 이후 와키자카의 표류기가 더 궁금
    대략 10일 정도 무인도까지 떠내려간 후 미역으로 연명해 탈출한 표류기가 더 궁금한데 영화로 안 나오나 ㅋㅋㅋ
  • 작성시간 22.08.03 이러나 저러나 해도 이순신 장군과 드라마틱한 인연이 있는 장수는 맞는듯 합니다
    한산에서 개쳐맞고 칠천량에서 개패고 명량에서 또 개쳐맞았으니
  • 작성시간 22.08.03 원균 그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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