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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 이론이 막힐 때 주류 경제학은 '남 탓' 프레임을 발동한다
- 피에트로 마시나 나폴리동양학대 교수
https://pietromasina.substack.com/p/thailand-and-the-myth-of-the-middle
태국은 흔히 '중진국 함정'의 교과서 같은 사례로 불린다.
수십 년간 고속 성장과 수출 확대를 이뤘지만, 더 이상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 생산성은 제자리걸음인데 국내 혁신 없이 임금만 올랐으니 그럴만하다.
하지만 이 진단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역사적으로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막대한 비용과 첨단 기술이 필요해지는 전환점은, 지금 동남아 국가들의 소득 수준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나타났다. 태국의 진짜 문제는 추상적인 소득 함정이 아니다. 외국 자본에 철저히 의존하는 '종속적 개발' 모델이 내부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 본질이다.
이 주장을 검증하려면 먼저 '중진국 함정'이라는 프레임이 어디서 왜 만들어졌는지 파헤쳐봐야 한다.
◇중진국 함정의 발명
국가가 중진국 수준에서 정체된다는 이론은 겉보기에 매우 객관적인 분석처럼 보인다. 쉬운 성장이 끝나면 혁신 없이는 저임금 국가와 선진국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어 갇힌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 프레임은 결코 정치적으로 무해하지 않다.
이 담론은 2000년대 후반 세계은행과 주류 정책 기관들이 주도해 퍼뜨렸다. 당시는 이들 기관이 깊은 당혹감을 느끼던 시기였다.
1990년대만 해도 세계은행은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시장 친화적이고 외국인 투자(FDI) 중심적인 산업화'의 모범으로 떠받들었다. 국가의 개입 없이도 개방과 수출, 거시경제 안정이 성장을 보장한다는 증거로 삼았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는 이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위기 이후 복구는 더디고 불균형했다. 동남아 후발 주자들은 과거 한국이나 대만 같은 동북아 신흥국들의 추격 경로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선진국과의 격차는 여전했고 기술과 생산성은 정체했다.
동남아를 성공 모델로 홍보하던 이들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중진국 함정'이다.
모델 자체의 결함을 인정하는 대신, 책임을 현지 국가로 떠넘겼다. 교육 부족, 경직된 노동 시장, 취약한 혁신 시스템 등 '국내적 결함' 때문에 정체됐다는 핑계다.
이 프레임은 정체를 '글로벌 하청 구조의 결과'가 아닌 '개별 국가의 개혁 실패'로 포장해, 생산 네트워크의 권력과 위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차단했다.
또한 불편한 실증적 사실도 가린다. 함정에 빠졌다는 동남아 국가들은 과거 선진국들이 정체를 겪기 시작했던 소득 수준보다 훨씬 밑바닥에 있다. 기술적 한계에 도달해 멈춘 게 아니라, 애초에 그 기술 한계 근처에 접근하도록 허용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중진국 함정은 개발 단계가 주는 천장이 아니다. 개발 모델 자체가 만들어낸 쇠창살이다.
◇이 개념이 위험한 오해를 낳는 이유
중진국 함정 이론의 핵심은 간단하다. 저임금 매력과 수입 기술이 바닥나면 자체 혁신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직관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전환이 '언제' 족쇄가 되느냐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후발 공업국들은 1인당 소득이 선진국 턱밑까지 육박했을 때 비로소 고도화 압박을 받았다. 한국과 대만이 그랬다. 높은 임금을 감당하기 위해 자본·지식 집약적 산업에서 경쟁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반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당시 한국과 대만의 소득 수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태다. 제조업은 단순 조립 공정에 머물러 있고 자생적인 대기업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이들을 동일 선상에 놓고 '함정'을 논하는 것은 범주의 오류다.
태국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기술이 너무 고도화돼서 정체된 게 아니다. 산업화 자체가 현지의 기술 학습을 철저히 차단하는 방식으로 설계됐기 때문이다. 너무 높이 올라가서 멈춘 것이 아니라, 애초에 더 높이 올라가지 못하게 묶여 있었을 뿐이다.
주류 경제학은 글로벌 가치사슬 참여가 기술 축적으로 이어지는 탄탄대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현대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의 철저한 '갑을 관계'를 외면한 소리다. 다국적 기업은 핵심 기술을 통제하며 부가가치가 낮은 찌꺼기 작업만 하청 공장에 배분한다. 지식은 자동으로 확산하지 않는다.
단순 조립 기지로 편입된 국가에 생산성 정체는 미스터리가 아닌 예정된 수순이다. 중진국 함정이라는 개념은 이 구체적인 정치적·제도적 선택의 결과를 단계별 필연으로 포장해 진짜 의문을 가린다. "왜 이 개발 모델은 동반 성장 없는 껍데기뿐인 성장만 낳았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태국의 실제 성장 경로
198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태국은 '태국의 기적'이라 불리며 아시아의 스타로 군림했다. 외국인 직접투자가 쏟아졌고 제조업과 수출이 폭발했다.
하지만 이 기적의 밑바닥은 동북아와 전혀 달랐다.
한국과 대만은 강력한 국가 주도 산업 정책을 펴서 자국 기업을 육성하고 독자 기술을 축적했다. 반면 태국은 성장의 엔진 자체를 외국계 대기업에 완전히 맡겼다.
1997년 금융위기는 돌이킬 수 없는 분수령이었다.
가까스로 성장은 회복했으나 과거의 역동성은 사라졌다. 산업 구조는 글로벌 가치사슬의 단순 조립 활동에 완전히 고착됐다. 한국과 대만이 선진국 격차를 좁힐 때, 태국은 추격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몸집만 불렸다.
제조업은 여전히 일본이나 글로벌 대기업이 장악한 자동차·전자제품 조립, 농산물 가공에 머물러 있다. 연구개발은 없고 기술 챔피언 기업도 보이지 않는다.
태국은 기술적 한계에 부딪힌 것이 아니라, 그 한참 미치지 못하는 밑바닥에서 공전하고 있다. 수십 년의 산업화에도 왜 자생적인 기술 역량을 확보하지 못했는지, 그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
◇종속적 발전과 속 빈 강정인 산업화
태국의 발전 경로는 자본주의 선진 단계로 가다 좌절한 게 아니라, '종속적 산업화'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결과다.
공장은 늘었고 수출은 늘었지만, 알맹이가 없다. 처음부터 태국은 독자적 산업 그룹을 키우기보다 외국 자본을 접대하는 데 집중했다.
FDI는 자동으로 기술을 이전해 주지 않는다. 다국적 기업은 핵심 설계와 엔지니어링 지식을 본사에 꽁꽁 숨긴 채 하청 공장에는 규격화된 조립과 테스트만 맡긴다. 이 속에서 현지 기업들은 납기를 맞추는 수준의 기능은 배우지만, 스스로 제품을 기획하고 시장을 지배할 기술력은 절대 얻지 못한다.
태국이 바로 그렇다. 수십 년간 공장을 돌렸음에도 브랜드나 유통망을 통제하는 국내 기업이 없다. 가치사슬 고도화는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이는 강력한 국가적 수단으로 자본을 통제하고 기술 습득을 강제하지 않은 결과다. 태국 정부는 선별적 개입 대신 개방성과 거시경제 안정에만 매달렸다. 결과적으로 제조업의 규모는 '조밀'하지만 고부가가치 통제권은 외부에 가 있어 뼈대가 '얕은' 구조가 됐다. 성장은 가능하지만, 선진국 추격은 불가능한 종속의 본질이다.
◇개발의 위기가 낳은 정치적 폭발
태국의 고질적인 정치 혼란은 흔히 엘리트 투쟁이나 도시·농촌의 양극화로 설명되지만, 실상은 '개발 모델의 위기'다.
과거에는 고속 성장의 결실이 불평등과 제한된 민주주의를 덮어주며 국가의 정당성을 유지해 줬다. 신분 상승의 희망이 일종의 사회적 합의였다. 하지만 금융위기가 이 합의를 깨뜨렸다.
기적은 끝났고 성장은 불평등해졌다. 통합의 마법이 풀리자 노골적인 분배 갈등이 터져 나왔다.
2000년대 초 포퓰리즘 정치의 부상은 성장의 혜택을 나누고 소외된 유권자를 대변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는 기득권 엘리트들의 폭력적인 저항을 불렀다.
끊임없는 시위, 쿠데타, 헌법 개정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성장 모델의 잿더미 위에서 벌이는 생존 투쟁이다. 사회적 합의가 무너진 성장 체제의 고사 직전 증상이다.
◇불편한 추격자 베트남
베트남은 단순한 비교 대상이 아니라 태국의 목줄을 죄는 현실적인 위협이다.
지난 10년간 태국은 외국인 투자와 조립 일자리를 빠르게 베트남에 뺏겨왔다. 글로벌 기업들은 더 저렴한 임금과 젊은 노동력, 적극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베트남으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태국이 베트남에 밀리는 진짜 이유는 높은 임금 때문이 아니다. 태국 제조업 대부분이 대체 가능한 '쉬운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기술 손실 없이 공장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은 태국 산업 구조에 독자적인 고부가가치 지식이 전혀 없음을 증명한다. 자체 기술 없이 외풍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FDI 주도형 종속 개발의 민낯이다.
태국이 투자를 빼앗기는 것은 너무 발전해서가 아니다. 충분히 고도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속적 모델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제조업 위계 속에서 서서히 쇠퇴하는 일만 남았다. 베트남은 태국에 던지는 마지막 경고장이다.
◇종속의 늪을 탈출하는 법
태국의 진짜 문제가 중진국 함정이 아닌 '종속적 개발의 함정'이라면, 치료법도 주류 경제학의 처방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
껍데기뿐인 교육 제도 개편이나 규제 완화가 아니라 '자생적인 독자 기술력'을 쌓는 것이 유일한 해법이다.
이를 위해 단순 투자 유치를 넘어선 국가적 산업 정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전략 분야를 찍어서 장기 투자를 조율하고 자국 기업을 독하게 밀어줘야 한다. 고도화에 실패하는 기업은 가차 없이 퇴출시키는 규율도 필수적이다.
당연히 이는 기존 단물에 젖어있던 외국인 투자자와 기득권 대기업들의 거센 저항을 부를 것이다. 기술 관료의 행정 처리가 아니라 피 터지는 정치적 결단이다.
또한 노동 시장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저임금 쥐어짜기로 굴러가던 기존 구조를 깨고 인적 자원에 투자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할 때만 고도화가 가능하다.
단순히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 저절로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환상은 깨야 한다. 독자적인 기술력 확보 없이 공장만 돌리면 평생 을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태국은 자국 개발을 둘러싼 이 추악한 정치경제적 민낯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가 있을까. 이게 진짜 질문이다.
*피에트로 마시나는 동남아 전문가로 나폴리동양학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친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꼬마타고 작성시간 26.06.17 본문 몇개 발췌해서 수능 영어지문으로 만을면 애들 좋아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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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잉여의정점 작성시간 26.06.17 좋은글 욕심갖은 중국 같은 국가가 되거나 아님 태국처럼되거나..잘되면 베트남 한국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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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꿀빨고싶다 작성시간 26.06.17 자원많은 후진국들도 그래서 요즘 자원만 안팔고
정제시설까지 들여오는 나라들한테 파는중 -
작성자Deadpool 작성시간 26.06.17 ㄷ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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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FastAnt 작성시간 26.06.17 그런데 이글의 부족해보이는 부분으로 베트남이 그대로 반론이지 않을까..
베트남도 마찬가지로 기술적 종속으로 성장하고있었지만 빈그룹이 탄생하기도 한거같은데.
그냥 쿠데타에 미친 정치와 썩어빠진 왕족제도 등으로 인한 정치후진국이라 뒤로 밀린거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