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fmkorea.com/9934620560
◇개발 경제 시리즈
①"한국·대만·싱가포르는 왜 경제 개발 직전 오른팔을 잘랐나" (https://www.fmkorea.com/9894107417)
②"가난한 나라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왜 14개국만 가능했나" (https://www.fmkorea.com/9898151708)
③"한국·대만·싱가포르가 입증한 '행정 시스템'의 중요성" (https://www.fmkorea.com/9904354962)
④"한국식 모델 없이도 성공했다…폴란드·에스토니아·모리셔스는 어떻게 발전했나" (https://www.fmkorea.com/9908647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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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제도보다 중요한 국정 기조
-스티븐 브라이언 개발 경제 전문가
https://hiddenrules.substack.com/p/why-governing-orientation-comes-first
통치 시스템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핵심적인 변수는 '국정 기조'다. 국정 기조란 정치 시스템이 진정으로 달성하려는 목표다.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위기 순간의 결정과 행동을 보면 진짜 목표를 알 수 있다. 왜 국정 기조가 제도나 정책보다 앞서는 근본 원인인지 알아보자.
지난 30년간 개발도상국들은 서구 개혁 프로그램의 조건을 충실히 따랐다. 필수 제도를 도입하고, 원조국이 요구한 기관을 세웠으며, 조건부 목표도 달성했다. 겉보기엔 성공적이었지만, 실질적인 구조 변화는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순서가 틀렸다. 국정 기조는 제도 설계보다 앞선다. 기관을 세우고 인력을 배치하는 모든 결정은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가'라는 근본 질문에 종속된다. 둘째, 제도가 같아도 결과는 달라진다. 제도적 틀이 그대로여도 국정 기조는 바뀐다. 즉, 제도 개혁은 국정 기조의 하위 변수일 뿐이다.
◇ 같은 도구, 엇갈린 운명
1960년 한국과 필리핀은 똑같이 가난했다. 두 나라 모두 원조에 의존했고, 냉전 동맹을 맺어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1972년 10월 유신과 9월 마르코스의 계엄령으로 거의 동시에 권위주의 체제를 굳혔다. 중앙은행, 기획 부처, 수출 진흥 기관을 둔 것도, 국유 은행으로 자금을 통제하고 5개년 계획을 세워 수출 단지를 조성한 것도 같았다.
오늘날 한국의 1인당 명목 GDP는 필리핀의 9배다. 두 나라는 같은 도구, 같은 체제, 같은 동맹을 갖췄다. 제도의 형태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한다면 두 나라의 성적표는 비슷해야 한다.
한국 대통령은 자금 지원에 철저히 성과를 요구했다. 국가 지원은 법으로 보장하되, 목표를 달성해야만 혜택을 줬다. 기업이 실적을 못 내면 지분과 사업권을 다른 곳에 넘겼다. 1965년부터 직접 주재한 월간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장관급 인사들과 함께 목표 달성 여부를 챙겼다. 신진자동차가 현대 포니에 밀려 파산하자, 정부는 산업은행을 통해 신진의 지분을 대우에 넘겼다. 조건은 이처럼 가혹하고 실질적이었다.
반면 마르코스는 똑같은 제도를 정치적 측근 챙기기에 썼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생산성 향상이 아니라 정권 유지였다. 설탕과 코코넛을 독점한 측근들이 위기에 처하면 경영진 교체 없이 구제 금융을 퍼줬다. 1979년 시작한 11개 주요 산업 프로젝트를 정권 핵심 세력에게 나눠줬고, 1983년 이들이 줄도산했을 때 경쟁자에게 넘기는 대신 수십억 페소를 들여 살려냈다.
한국 지도자의 시스템은 '지원-성과-책임'으로 이어졌지만, 마르코스는 '충성-특혜-면책'으로 돌아갔다. 똑같은 제도가 한국 기업에는 치열한 학습 경쟁을, 필리핀 기업에는 기득권 챙기기를 불렀다. 운명을 가른 것은 제도가 아니라, 이를 지휘하는 국정 기조였다.
물론 한국에는 필리핀에 없는 두 가지 유리한 유산이 있었다. 1949~1950년 농지개혁으로 산업화에 딴지를 걸 지주 계층이 사라졌다. 또한 국가가 주도적으로 경제를 조율하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관료제 틀을 물려받았다. 둘 다 필수 조건이었다. 이 두 가지가 없었다면 한국 대통령의 성장 주도 기조도 거대한 기적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론의 부정이 아닌 확장
기존 국가 발전 이론은 바로 이런 역사적 유산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국정 기조 이론의 든든한 밑바탕이다.
착취적 제도가 한번 자리 잡으면 이를 유지하려는 세력이 계속 재생산된다는 식민지 기원론, 정치 질서에는 이권 분배 논리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 발전의 핵심만 쏙 빼낼 수 없다고 지적한 이론이 있다. ' 정치적 타협' 이론은 집권 세력과 소외 계층 간의 권력 분배가 정책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한다.
각 이론은 국가마다 출발선이 왜 다른지 잘 설명한다. 국정 기조 이론은 이 구조주의 이론을 부정하거나 수정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닿지 못한 더 깊은 곳까지 분석을 확장한다.
기존 이론의 한계는 '비슷한 조건 속의 다른 결과'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제한된 환경에서 각기 다른 선택을 내렸는지 답하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구조적 설명은 단순한 역사 기록으로 전락하고 만다.
물론 한국이 누린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과 베트남 전쟁 특수는 마르코스보다 컸다. 하지만 마르코스에게도 비슷한 자원이 있었고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과거의 유산은 성장의 한계치를 정할 뿐, 국정 방향 자체를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결국 왜 다른 선택을 했는지 일관되게 설명할 핵심 열쇠가 필요하다. 결과가 나오기 전의 행동 패턴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예측할 근거가 되는 요인이다. 그것이 바로 '국정 기조'다. 정치적 타협이 제도의 범위를 정한다면, 국정 기조는 그 범위 안에서 집권 세력이 실제로 어디로 움직일지 결정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실험
한국과 필리핀 사례만으로는 외부 요인을 완벽히 통제했다고 보기 어렵다. 기조가 완벽한 독립 변수임을 증명하려면 환경이 똑같은 사례가 필요하다. 나이지리아 중앙은행(CBN)이 딱 맞는 사례다. 기관, 권한, 국가가 모두 똑같은 상황에서, 연속해서 취임한 두 총재의 기조만 달랐다.
사누시 총재(2009~2014년 재임)는 물가 안정을 챙기며 중앙은행의 본분에 충실했다. 2014년 정부의 석유 수익금 횡령 정황이 드러나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그 대가로 그해 2월 대통령에게 해임됐다. 후임인 에메필레 총재(2014~2023년 재임)는 통화 정책 권한을 넘어 정치권과 줄이 닿는 곳에 외화를 몰아줬다. 중앙은행 본연의 임무보다 정권 유지에 치중한 그는 결국 체포됐다.
기관도 헌법도 같았다. 통화 정책의 법적 근거는 그대로였다. 바뀐 것은 오직 기관을 이끄는 국정 기조뿐이었다. 희생을 각오하고 공식 목적을 지켜내려 했던 사누시는 생산적 기능을 향했지만, 에메필레는 기득권 특혜 분배에 몰두했다.
다만 두 총재가 겪은 유가 변동 등 재정 압박 수준은 달랐다. 정치적 외풍까지 완벽하게 통제된 비교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런 현상은 브라질 중앙은행(BCB)에서도 나타났다. 권한은 같았지만 기조가 달랐다. 호세프 정부 시절 통비니 총재(2011~2016년) 때는 정치적 입맛에 맞춰 금리를 내렸다가 2015년 물가 상승률이 10.7%로 치솟았다. 반면 캄포스 네투 총재(2019~2024년) 때는 본분에 집중했다. 대통령의 거센 압박에도 금리를 2%에서 13.75%까지 올려 물가를 다시 잡았다.
같은 나라, 같은 제도 안에서도 국정 기조는 변하며, 그 변화가 모든 결과를 좌우한다.
◇자원도 지정학적 위치도 핑계가 안 된다
앞선 중앙은행 사례가 단일 기관의 비교였다면, 다음은 국가 차원의 비교다. 자원, 지리, 역사적 배경이 전혀 다른 나라들을 살펴보자.
-인도네시아와 나이지리아는 비슷한 시기에 석유 붐을 맞았다. 국영 석유 회사, 전담 부처 등 막대한 오일머니를 굴리는 제도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이 제도를 굴리는 기조가 달랐다.
인도네시아는 석유 수익을 농업과 비료 보조금에 투자했다. 수출 경쟁력을 지키려고 도시 소비자의 수입 물가 상승을 감수하며 자국 통화 가치를 고의로 낮췄다. 그 결과 1984년 쌀 자급자족을 이뤘고, 1990년에는 제조업이 석유를 제치고 최대 외화 수입원이 됐다.
나이지리아는 전담 위원회를 통해 오일머니를 굴리며 특권층 배불리기에 썼다. 농산물 수매가를 국제 시세보다 후려쳐서 생산력을 꺾는 대신 측근들에게 이익을 몰아줬다. 고평가된 통화 가치로 수출 경쟁력은 무너졌고 수입업자만 배를 불렸다. 석유 붐이 꺼지자 농업도 산업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돈을 쓸 때마다 기조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인도네시아는 석유가 고갈된 후의 경제를 고민했지만, 나이지리아는 지금 당장 누가 이권을 차지할지만 따졌다. 한쪽은 국가 경쟁력을 키웠고, 다른 한쪽은 이익 집단만 키웠다.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도 식민지 역사, 1950년대 소득 수준, 국가 기관 형태가 쏙 빼닮았다. 둘 다 농업 수출 중심 경제에 세금 및 기획 제도도 비슷했다.
코스타리카는 1948년 군대를 폐지하고 안보 위험을 무릅쓰며 교육, 의료, 국가 시스템 강화에 돈을 쏟았다. 그 덕에 한 세대 만에 경제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문해력과 보건 지표를 달성했다.
니카라과는 비슷한 자원을 군대 육성과 소수 권력자의 기득권 유지에 탕진했다. 교육과 생산 투자는 뒷전으로 밀렸다. 1950년 이후 두 나라의 운명을 가른 건 제도가 아니라 국정 기조였다.
세상에 완벽히 똑같은 비교 사례는 없다. 하지만 이 사례들이 명확히 보여주는 것은 자원이 넘치든 부족하든, 동아시아든 남미든, 강력하게 반복되는 하나의 패턴이다.
그 패턴이 바로 국정 기조다. 정치 환경이나 역사적 유산은 제도가 작동할 판을 깔아줄 뿐, 그 판 위에서 결과를 가른 핵심은 언제나 국정 기조였다.
◇제도 위에 군림하는 우선순위
위 사례는 국정 기조가 의사 결정의 최상위에 있다는 걸 증명한다. 집권 세력이 제도를 만들고 사람을 뽑기 전에 이미 '무엇을 이룰 것인가'는 목표는 정해져 있다. 이 보이지 않는 기준이 이후의 모든 결정을 지배한다.
국정 기조는 모든 제도의 작동 원리다. 기조에 맞는 기관과 행동은 예산 벼락을 맞으며 굳건해지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예산이 깎이고 서서히 말라 죽는다.
두 중앙은행 사례를 보자. 기조가 바뀌자 아래 모든 것이 뒤집혔다. 나이지리아는 사누시가 쫓겨나자마자 기득권 퍼주기 기관으로 전락했다. 기관은 법 조항이 아닌 작동 기준을 따랐다. 브라질에서는 정반대였다. 정권의 눈치를 보던 통비니에서 벗어나 캄포스 네투가 물가 안정이라는 본분에 충실했다.
◇구조 자체가 특혜를 보장할 때
국정 기조는 임기 중에는 잘 안 바뀐다. 인물이 교체될 때 바뀐다. 기존의 구조적 유산은 새로운 기조가 작동할 범위를 제한한다. 기조가 시스템에 뿌리내리는 방식은 세 가지이며, 이에 따라 개혁의 도달 범위가 정해진다.
첫째, 한국이나 필리핀처럼 집권 세력의 의지인 경우 정권이 바뀌면 기조도 바뀐다. 둘째, 사누시나 에메필레처럼 개인의 성향에 기댄 경우, 그 사람이 떠나면 기조도 사라진다. 셋째, 헌법의 기본값으로 굳어진 경우다. 지도자나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을 만큼 가장 지독하다.
헌법이나 국가 시스템 자체가 특혜 분배를 보장하도록 짜여 있다면, 훌륭한 지도자가 잠시 이를 막을 순 있다. 하지만 그가 떠나면 시스템은 잔인할 만큼 빠르게 기득권의 품으로 돌아간다.
나이지리아 헌법이 바로 그렇다. 연방 수익을 모든 계층에 권리로 떼어주는 공식(FAAC)은 국가 재정의 목표를 아예 '나눠 먹기'로 못 박았다. 임명직을 민족별로 강제 할당하는 제도(Federal Character) 역시 인사 권한을 분배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이 둘이 결합해 특혜 배분을 아예 국가의 기본값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통화 정책이나 수출 장려책 따위를 고치는 개혁은 헛다리만 짚는다. 제도의 꼭대기에는 국정 기조가 버티고 있고, 그것이 헌법에까지 박혀 있다면 문제는 한참 더 위에 있다.
◇수십 년 구조 개혁이 실패한 진짜 이유
만약 구조 개혁이 진짜 건드려야 할 국정 기조를 외면했다면, 개혁 조건을 다 지키고도 나라는 안 바뀌는 촌극이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지난 30년간 그 예측은 소름 돋게 들어맞았다.
제도 껍데기와 통치 방향은 얼마든지 따로 놀 수 있다. 이권 챙기기에 혈안이 된 정권도 겉으로는 원조국이 내건 조건을 완벽하게 따른다. 기획 위원회를 만들고 성과 관리팀을 꾸린다. 하지만 속내는 어차피 그 기구들을 특혜 분배에 써먹으려는 것뿐이다.
서류상 조건을 맞추는 건 누워서 떡 먹기다. 개도국들은 1980년대와 90년대에 평균 7번이나 구조조정 대출을 받았다.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제도도 고치고 목표도 달성했지만, 영구적인 변화는 없었다.
핵심을 찌르지 못한 개혁은 껍데기뿐인 순응만 낳는다. 특혜 배분 시스템의 껍데기만 벗겨내서 발전의 정수를 이끌어낼 순 없다. 국정 기조는 누구도, 어떤 안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권력자들이 제도를 만들고 사람을 앉히기도 전에 모든 걸 결정해버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기 때문이다.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30년간의 개혁이 겉핥기식 흉내 내기로 끝난 이유는 간단하다. 통치 시스템의 말단만 만지작거렸을 뿐,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뿌리인 '국정 기조'는 단 한 번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스티븐 브라이언은 영국, 중동, 아프리카의 정부 기관 및 개발·전략 분야에서 '레가툼 번영 지수(Legatum Prosperity Index)'를 이끌었다. 영국 사회보장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