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은 못 봤지만 차의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 단아한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습만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야, 나는 말이야. 영빈이 저놈 신나게 승용차 타고 오는 동안에 버스 안에서 여학생 하나하고 얼마나 싸웠는지 몰라.
그래서 아침부터 기분 완전히 가라앉았다.”
남수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내게서 더 이상 흥미거리를 찾아내지 못해 시큰둥하던 친구들이 일제히 남수를 쳐다봤다.
“아침에 버스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냐?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겨우 버스를 탔는데 내 앞에 바로 여학생이 하나 서 있었던 거라.
그 만원 버스 안에서 서로 밀착해서 마주보고 서 있는 걸 한 번 상상해봐라.
아주 난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좋았겠네, 부럽다 등등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좋기는 뭐가 좋냐?
난 밀착된 상태가 너무 불편하고 민망해서 엉덩이를 자꾸 뒤로 빼는데 내 뒤도 사람으로 꽉 막혀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거야.
그래도 어떡하냐?
그냥 그대로 있다가는 당장에 뺨 맞을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그래서 억지로 몸을 움직여서 엉덩이를 뒤로 뺐지 뭐냐.”
“야, 그거야 인간의 본능인데 뭘 어쩌겠냐? 그래서 잠시 잠깐 즐거웠다 이거야?”
“아니, 그게 다가 아니야. 더 들어봐.
그렇게 몸을 막 움직여서 엉덩이를 빼는데 뒤에서 갑자기 웬 여자가 소리를 지르는 거야.
왜 자꾸 내 엉덩이로 자기 몸에 대고 비비느냐고 말이야.
아, 나 참. 내가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어떻게 알겠냐?
나는 그저 앞에 있는 여학생하고 떨어지려고 발버둥쳤을 뿐인데 말이야.
그래서 억울한 마음에 나도 같이 소리지르다 보니 싸움이 돼버린 거지.”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학교 운동장에는 떨어진 벚꽃잎들이 빗물과 함께 쓸려 내려갔다.
벚꽃은 그렇게 아주 잠깐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
연분홍 벚꽃이 지면 연초록 잎이 나온다.
벚꽃은 그렇게 해서 벚나무가 되는 것이다.
나는 토요일 오후에 혼자 벚나무 아래 벤치에 길게 드러누워 아직은 이파리들로 다 가려지지 않는 하늘을 멍하니 쳐다봤다.
작고 푸른 이파리 사이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살랑이며 스쳐가는 바람에서 찬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정말 봄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봄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이번 모의고사도 역시 내 기대와는 한참 동떨어진 성적표로 돌아온 것이었다.
꿈, 공부, 성적...
나는 친구들과의 대화 이후로 꿈에 대한 생각에 몰두했지만 내 꿈이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선생님들은 다른 잡생각은 다 버리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다그쳤다.
선생님 말대로 공부에 매달렸지만 달라지는 건 없고 마음속에는 공부에 대한 회의와 절망감만 가득했다.
속은 견디기 힘들만큼 쓰라렸고 머리도 터질 것처럼 아팠다.
나는 공부를 포기하고 가방을 싸들었다.
집으로 가려다가 서점으로 갔다.
마침 종수 형이 혼자 서점을 보고 있었다.
“이야, 영빈이 오랜만이다. 근데 그 꼴이 뭐냐? 실험실 해골이 걸어오는 줄 알았다. 어디 아픈 덴 없어?”
나는 종수 형에게 나의 상황에 대해서 장황하게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공부를 왜 하냐는 형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에 나눴던 친구들과의 대화, 그리고 혼자 생각한 것들을 쉼 없이 쏟아내었다.
형은 가끔 혀를 차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내 말을 들어주었다.
“그래서요, 형. 내 꿈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내 꿈이 뭔지, 그게 공부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러면 도대체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나는 말을 마치고 형을 쳐다봤다.
나의 이 답답한 심정을 형이 해결해주기를 바랐다.
형은 빙그레 웃으며 일어나더니 느닷없이 내 이마에 꿀밤을 하나 먹였다.
“너, 이 자식. 공부하기 싫으니 엉뚱한 생각만 하는구나?”
나는 속이 뜨끔했다.
사실 공부가 하기 싫었다.
해도 해도 성적은 오르지 않고 도대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이 고3 생활이 지긋지긋하게 싫었다.
그러니 어쩌면 꿈이니 뭐니 하는 생각들은 공부를 피하기 위한 핑계거리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나는 내 속을 들킬까봐 눈을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 형이 공부를 왜 하냐고 묻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흘깃 본 종수 형은 선 채 나를 내려다보며 계속 웃고 있었다.
“얘가 계속 내 핑곌세그려. 그거야 이런 거지.
봐라, 길을 가는데 어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것과 정확한 목적지를 알고 가는 것하고 어느 편이 더 빨리 잘 가겠냐?
나는 그걸 생각해보라고 한 거지.”
형이 다시 내 앞에 앉았다.
“영빈아, 잘 들어봐라.
네가 꿈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 그거 참 좋은 거야.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지.
근데 꿈이 뭔지 아직 모르겠다고?
그것도 당연한 거야.
왜냐?
넌 여태 공부하라는 소리만 들었지 꿈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도, 또 꿈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기 때문이야.
그러면 도대체 꿈이란 건 뭐냐?
꿈이란 인생의 목표라고 할 수 있지.
그 목표는 삶의 지향점과 삶의 방법, 이 두 가지로 구성되는데 나는 무엇이 되겠다, 라는 것과 나는 어떻게 살겠다, 라는 것이지.
나는 사람이 의미 있는 삶,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인생의 목표, 즉 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고 사소한 것들도 꿈이라 말할 수 있지만 보다 크고 높은 인생의 가치를 꿈꾸는 것이
너나 나처럼 젊은 사람들한테는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꿈이 뭔지 모르겠는데, 그럼 어떻게 내 꿈을 찾을 수 있는 거죠?”
“계속 생각을 해봐야지.
네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네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들을 통해서 네 스스로도 보람을 느끼고 가족과 이웃과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봐야지.
그것이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일 수도 있지만 그 중에서 네가 정말로 열망하는 무엇, 그게 바로 네 꿈이 아닐까?”
“그럼 그 꿈을 찾을 때까지는 공부는 좀 소홀히 할 수밖에 없겠네요?”
“이런 이런, 또 샛길로 빠지고 있어. 공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기초 학문과 응용 학문이지.
기초 학문이란 문학, 역사, 철학, 예술처럼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우리 인생의 선배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남겨놓은 것들이지.
그리고 응용 학문은 우리가 대학엘 가서 전공하는 그런 전문 분야의 지식을 말하지.
그런데 기초 학문은 전문 분야의 지식을 쌓는 데 있어서 또한 기초가 되는 것이야.
이렇게 생각해 보자고. 집을 지을 때 바닥에 축대를 쌓든 어떻든 해서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다음에 집을 지어야 튼튼할 거 아냐?
기초 학문도 마찬가지야.
기초 학문이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전문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다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또 그렇게 기초가 튼튼해야 이런 집, 저런 집, 자기가 원하는 어떤 형태의 집이라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기초 학문이 튼튼해야 네가 어떤 꿈을 가지더라도 그 꿈을 향해 잘 갈 수 있는 거지.
그러니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냐, 안 드냐?”
“글쎄요, 제가 지금 학교에서 배우는 게 별로 기초 학문 같지는 않은데요.......”
“봐라, 세상에 알아야 할 것들은 많은데 고등학교 3년은 너무 짧거든.
그러니 교과서에서는 대표성을 띤 인물이나 사건, 문장들만 보여줄 수밖에 없어.
나머지는 자기가 직접 찾아봐야지.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하는 거야. 여기를 봐봐.
네가 교과서에서 배운 이름들이나 사건들, 책 제목들이 주변에 빼곡하지 않냐?
‘종합영어’니 ‘수학정석’ 같은 것들만 보지 말고 그런 책들을 보라는 이야기야.
내가 말하는 공부란 바로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거야, 대학을 가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인생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