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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의 꿈

4월, 흔들리는 봄(4)

작성자gionex(12윤선호)|작성시간17.04.22|조회수39 목록 댓글 3

주변을 둘러보니 형 말대로 책에서 본 이름들과 책 제목들이 서가에 가득 꽂혀 있었다. 

책들이 나에게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고3이 시험에 나오지 않는 책을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 말씀은 알겠지만 지금 제가 그럴 시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대학 가서 그러면 안 될까요?”

형은 다시 빙긋 웃었다.

“그건 네 선택이야. 나는 다만 네가 고민하는 그 꿈과 공부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을 뿐이고.”


나는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형은 꿈이 뭐예요?”

“내 꿈은....... 모든 사람이 다 자기만의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내 꿈이지.”

형은 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형의 대답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아리송한 말이었다. 

자기의 꿈이야 당연히 자기가 꾸는 거지.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도 자기가 하는 거지.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나는 생각을 멈추었다. 

내 생각만 하기에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형의 꿈까지라니, 그건 형에게 맡기자고. 

나는 형에게 인사를 하고 서점을 나섰다. 

힘없이 돌아서는 내게 형은 책을 한 권 선물해주었다. 

구라타 하쿠조(倉田百三)라는 일본 철학자가 쓴 ‘사랑과 인식의 출발’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이 네 고민을 해결해줄지, 아니면 고민을 더 키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떤 방향으로든 너에게 도움은 될 거야. 잘 읽어봐.”

나는 집에 오자마자 옥상에 올라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펼쳐 들었다. 

말이 어려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나는 밤에도 내 방 책상머리에 앉아 그 책을 읽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또 그 책을 읽었다. 

그렇게 해서 일요일이 끝나가는 즈음에 그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책이 나의 고민에 대해서 뭔가 해답을 줄 것이라 생각하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니 오히려 머리가 지끈거렸다.

헝클어진 실타래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틀었다. 

경쾌한 디스코 리듬의 비지스가 흘러나왔다. 

몇 소절 따라 흥얼거리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해답은 없다는 것이었다. 

종수 형은 말했다.

“사람이 생긴 것도 다 다르고 생각하는 것도 다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 다른데 

그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해답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냐?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너만의 해답인 거야.”


글쎄,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본 효과라고 해야 할까, 

나는 복잡하기만 하던 내 머릿속을 조금씩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내 꿈이 무언지 찾는 작업을 멈추지는 않는다. 

다만 지금은 너무 깊이 그 고민에 빠지지는 않는다. 

둘째, 서점에 가서 학교 공부와 상관있건 없건 하여튼 많은 책을 읽는다. 

종수 형은 서점에 와서 책 보는 것은 얼마든지 하라고 말해주었다.


평일에는 학교가 늦게 마치니 서점에 갈 시간이 없었다. 

나는 토요일이 되면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는 바로 서점으로 갔다. 

그리고 일요일에도 거의 하루 종일, 밥 때만 빼고 서점에 가서 살았다.

“형, 내가 서점 볼 테니 일 있으면 다녀오세요.”

어느 날, 나는 책만 보기가 미안하여 형에게 그렇게 말했고 형은 잠깐 생각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이렇게 할까? 주말에는 네가 와서 우리 서점을 좀 봐주고, 나와 형수는 네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주는 걸로? 

어때, 영어와 수학은 본고사 때문에 좀 더 깊이 공부해야 하는 거잖아, 그치?”


그렇게 해서 나의 서점 아르바이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의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 

예전에 가끔씩 서점을 봐 줄 때에는 주로 만화를 보았지만 

이제는 문학, 철학, 역사, 예술 등 형이 말했던 책들을 주로 읽어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를 하나도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클로버 문고를 비롯해 새소년, 소년중앙, 어깨동무 등에 연재되는 만화도 두루 섭렵했다.


어느 일요일, 김춘수 시집을 읽고 읽는데 한 아이가 들어와 소년중앙을 사갔다. 

나는 무심코 그 아이에게 한 권을 준 다음 나도 한 권을 집어 들고 그 자리에 서서 만화를 보기 시작했다. 

만화의 단점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선 채 만화를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면서 누가 들어왔다.

 나는 얼른 보던 책을 펼친 채 뒤집어 내려놓았다. 

한 여학생이 문 앞에 서서 나와 소년중앙을 번갈아 보더니 작게 ‘풋-’하고 웃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데자뷰. 


나는 헛기침을 하며 여학생을 쳐다봤다. 

까만 단발머리에 지혜로워 보이는 커다란 눈, 그리고 실내의 형광등 불빛을 받은 하얀 얼굴. 

여학생은 고개를 돌려 책꽂이에서 생물 참고서를 한 권 꺼내 돈과 함께 내게 내밀었다. 

내가 공부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고3인 모양이었다. 

나는 가격을 확인하고 책과 거스름돈을 내 주었다.


여학생이 나간 후 나는 멍 하니 여학생이 나간 문 쪽을 쳐다봤다. 

여학생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는 작고 귀여운 얼굴, 

맑고 투명한 표정과 쳐다보는 사람의 기분까지 밝아지는 환한 웃음... 

여기서 책을 산다는 것은 이 동네에 산다는 것이고, 이 동네에 산다면 오다가다 한 번쯤은 마주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다.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4)


그 때까지 내 마음 속에 있던 승용차의 그 여학생은 지워져버리고 

새롭게 나타난 이 여학생에 대한 생각이 온통 내 마음을 사로잡아버렸다. 

나는 책을 보면서도, 집에 와서 밥을 먹으면서도, 공부를 할 때에도, 잠자리에 들어서도 그 여학생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느냐고 말이라도 붙여볼 걸 그랬다고 후회에 후회를 거듭했다. 

어떻게 이름이라도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다음에 서점에 오면 말을 붙여 볼까? 

그런데 그 전에 분명 보았다면 그 때는 왜 내 심장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는지 참 이상했다. 

그러므로 이번에 처음 본 것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아마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 전생에서라도 엮어진 적이 있던 운명적인 만남이기 때문에 전에 본 듯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별별 생각을 다 하면서 틈만 나면 서점에 가서 그 여학생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공부하는 학생이 이렇게 서점엘 안 와도 되는 거야? 

공부해야 할 책이 얼마나 많은데 책을 안 사면 도대체 뭘로 공부를 하겠다는 거야? 

나는 말도 안 되는 화를 내며 씩씩거렸지만 결코 그 여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4) 사랑이야 - 송창식(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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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고명심(6회 조제순) | 작성시간 17.06.11 드디어 하나의 사랑이 그대 맘 속에 스며들기 시작하는군요.
    4월말, 벌써 계절은 초하의 물결로 가득해 지고 있는데 말이조.
  • 작성자마리사(7회 왕혜경) | 작성시간 17.04.24 한동안 카페엘 들어오지 못해 3회분을 한꺼번에 읽었는데 재미있네요.
    고 3 시절이 생각납니다.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체 그냥 무작정 공부하란 말만
    지겹도록 듣던 그 시절,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가출도 하고 자살시도도 했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사춘기를 심하게 앓았다 싶은데 그래도 그 시절이 , 그 시절의 열정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 작성자바다(13변해숙) | 작성시간 17.04.26 지금 생각해보면 전 행복한 고3생이었습니다.
    부모님이 공부하란 말 한마디 안하셨으니... 다만 그 평온함이 갑갑해 기를 쓰고 상경하려 했던 거 같습니다. 방학 때면 서울서 내려와 무용담을 늘어놓던 돝섬 선배들도 크나큰 동인이었죠~
    고3아들에게 그런 동인이 없다는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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