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우리 공부도 안 되는데 007 보러 갈까?”
토요일이었다. 오후에 정호의 하숙방에서 월례고사를 대비한 공부를 하다가 남수가 불쑥 말했다.
“그거 재밌다더라.” 호진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야야, 다음 주면 월례고산데 영화는 무슨 영화냐? 공부나 하자.”
정호가 말렸지만 사실 나도 공부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상태여서 좀 쉬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투표 결과 3대1로 영화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교복을 입고 갈 수는 없어서 우리는 다 정호의 사복을 하나씩 빌려 입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모험이 필요한 일이었다.
비록 007이 청소년 관람가의 영화였지만 개인적으로 영화관에 가는 것 자체가 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극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골목에 몸을 숨기고 혹시 단속 나온 선생님이 있는지 한참을 지켜봤다.
아무 이상이 없었다.
우리와 같은 짧은 머리의 학생들이 몇 명 들어갔지만 잡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골목을 빠져나와 매표소로 갔다.
“학생 네 명이오.”
남수가 미리 걷은 돈을 매표소 창구로 내미는 순간 어디선가 벼락같은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 자식들, 어느 학교 학생이야?”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웬 아저씨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우리 등 뒤에서 소리를 치며 우리를 잡으려고 손을 내뻗고 있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튀었다.
극장 앞 광장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 숨을 돌리고 뒤돌아보니 아뿔싸, 남수의 뒷덜미가 그 아저씨의 손 안에 들어있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골목에 몸을 숨긴 채 남수와 그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 아저씨는 남수를 차렷시켜 놓고 한참을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남수는 차렷 자세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그 아저씨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들 힐끗 남수와 그 아저씨를 쳐다봤다.
그 아저씨가 마침내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무엇인가를 적었다.
그리고 남수는 그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그 아저씨는 극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혼자 남은 남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우리를 찾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남수가 잘 볼 수 있게 골목에서 좀더 빠져나온 후 남수에게 손짓을 했다.
남수는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야, 이 의리라고는 참새 오줌만큼도 없는 자식들아. 내가 그렇게 잡혀 있는데 너희들끼리만 도망가? 응?
그게 청춘을 함께 하는 동지로서 할 짓이냐?”
남수는 우리에게 오자마자 거칠게 숨을 내쉬며 소리를 질러댔다.
“야, 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후퇴하자. 우리 집으로 다시 가자.”
정호가 남수를 말렸다.
우리는 패잔병처럼 고개를 숙인 채 다시 정호의 하숙방에 모였다.
가는 동안 내내 남수는 한 마디 말이 없었다.
남수가 말을 안 하니 우리라고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남수는 담배를 하나 물었다.
몇 모금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인 다음 담배를 끄고 우리에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오늘처럼 다 각개 전투로 도망가라.
생각해 보니 다 같이 걸리는 것보다 혼자 걸리는 게 낫지 않겠냐?”
“그 아저씨는 누구라던데?”
정호가 물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더라.”
“그래? 딱 보니 자기도 영화 보러 온 것 같던데 잡기는 왜 잡냐.......”
호진이가 푸념하듯 말했다.
“하여튼, 뭐라 그러던데?”
내가 물었다.
“다음 주면 월례고사라는 거 다 아는데 공부는 안 하고 영화나 보러 다니냐고.......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겠냐,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실망하시겠냐......,
한참 그러더니 학년, 반이랑 이름 적어갔다. 우리 학교에 알리겠다고.......”
“야, 야. 걱정 하지 마. 학교에 알리긴 뭘 알려. 그런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우리는 그렇게 남수를 위로했지만 걱정되는 건 남수와 마찬가지였다.
“괜찮아. 내가 먼저 영화 보러 가자고 했으니 어쩌겠냐? 내 업보다, 업보. 내가 다 받아들여야지.......”
남수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우리도 따라서 웃어보였지만 서투른 연기자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남수가 뭔가 생각난 듯 웃으며 말했다.
“참, 그 선생님이 그러더라. 위급한 상황에서 친구 놔두고 도망간 너희들과는 앞으로 절대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하하하!”
우리는 다들 머쓱해져서 뒤통수를 긁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우리는 학교에서 선생님이 남수를 부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오히려 남수는 마음이 편한 것 같았다.
우리보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월례고사 준비나 잘 하라고 위로해주었다.
월례고사를 마칠 때까지 선생님은 남수를 부르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항상 월례고사를 마치면 영화를 한 편씩 보여주었다.
주로 ‘닥터 지바고’ 같은 예술성 있는 영화나 ‘머나먼 다리’ 같은 전쟁 영화,
또는 ‘성웅 이순신’ 같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영화들이었다.
우리는 월례고사를 마치고 또 무슨 재미없는 영화를 보여 주려나 하고 마산에서 개봉 중인 영화들을 죽 떠올려봤다.
‘깊은 밤 깊은 곳에’, ‘디어 헌터’, ‘나자리노’, ‘도시의 사냥꾼’, ‘당산대형’ 등이 있었고
우리가 보려다 실패한 영화, 007이 있었다.
우리는 점점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갈만한 영화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마침내 종례 시간, 우리는 우리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음을 알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단체 관람할 영화 제목이 ‘007’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3학년들은 단체 관람에서 제외시키려고 했지만 학교 전통이 있으니 이번만 허락해주는 거다.
물론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은 가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다음 달부터 본고사 끝날 때까지 영화는 없다. 알겠나?”
남수는 거의 좌절하여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가면서 내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에 대해서 울분을 토해냈다.
지난 며칠간의 불안감을 보상 받으려면 그렇게라도 악을 쓰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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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리사(7회 왕혜경) 작성시간 17.05.01 하하하. 내가 몰래 영화보러 갔다 잡힌 상황과 어찌 이리 흡사한 지..
원래 나쁜 짓도 매일 하는 놈은 안잡히고 '어쩌다 한 번..' 정말 '어쩌다 한 번' 간 놈이 꼭 뒷덜미를 잡힌다니까...
이대 미대를 간 오경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 지 소식도 모르지만
좀은 엉뚱한 구석이 있는 걔랑 둘이 몰래 영화 보러 갔다가 학생부 선생님에게 잡혀서...
많이 순진했던 나는 밤잠을 설치며 처벌 걱정을 했는데 걔는 담담..
벌 빡세게 받고 그 때부터는 오히려 자유로워져 학생부를 별 겁 안내기도,,
옛날 생각이 소올 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