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정! 자리에서 일어나 봐.”
아침 조례 시간이었다.
날은 점점 따뜻해져서 우리는 이미 하복을 입고 있었고
활짝 열어젖힌 창으로 초여름의 더운 기운이 아침부터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이것저것 전달사항과 훈시를 끝내고선 갑자기 나를 불러 일으켜 세웠다.
나는 갑자기 호명되어 영문도 모른 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짧은 순간 아무리 생각해봐도 잘못한 건 없었다.
잘못한 게 없는데 이름이 불리었다는 사실이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온 반 친구들도 눈을 멀뚱히 뜨고 나를 쳐다봤다.
선생님은 내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 모두 저 주정뱅이 박영빈을 위해 박수 한번 치자.”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뭔가 감이 잡힌다는 듯이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지난 5월 본고사 대비 모의고사에서 우리의 저 박주정이 전교 성적을 50등 이상 끌어올렸다.
이렇게만 한다면 제 놈이 술주정한 대로 지 원하는 의대에 충분히 갈 수 있다.
앞으로 이 분위기 계속 이어가도록! 박주정, 알겠나?”
“예.”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낮게 대답했다.
나중에 들은 말에 의하면 아침 교무회의에서 내 성적이 단연 화제가 되었다고 했다.
내 성적이 그렇게 급상승하자 나를 적극 옹호했던 담임선생님과 이문섭 선생님이 그것 보라며,
정신을 차릴 수 있을 만큼만 가벼운 처벌을 내린 덕분에 공부에 더 집중해서 이런 성적을 얻은 게 아니냐며 득의만만했던 반면,
중징계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던 학생주임 등 몇몇 선생님들은 그저 입맛만 다시며 먼 데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나는 내 등수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세 자리 숫자에서 두 자리 숫자로 급상승할 만큼 특별나게 더 열심히 한 것도 없었다.
그냥 평소대로 했을 뿐이었다.
이번 모의고사에서 특히 수학 점수가 많이 높아서 전체 성적이 오른 것이었는데 거기에 바로 운이 작용했던 것이다.
나는 3학년이 되면서부터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전국 대학교의 본고사 기출 문제를 집대성해놓은 책을 펼쳐서 아무 페이지에서나 눈에 띄는 문제를 하나 외워 나왔다.
어려운 문제일수록 문제는 간단해서 외우기가 쉬웠다.
그리고는 등교 시간 버스 안에서, 쉬는 시간에 혼자 있을 때,
하교 시간 버스 안에서 계속 그 문제를 생각하다가 집에 들어가서 종이 위에 풀어보고 답과 맞춰보곤 했다.
매일 그렇게 하지는 못했고, 문제를 외우고 나와도 전혀 생각을 못하기도 하고,
어느 날엔 심지어 문제가 뭐였는지 잊어먹기도 했지만
나는 3월 첫 시험을 망친 이후로는 가능한 한 하루도 빼먹지 않고 그렇게 하려고 많이 애를 썼다.
그랬는데 이번 모의고사에 내가 최근에 풀었던 문제 하나와 거의 유사한 문제가 출제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건 점수가 제일 큰 30점짜리 문제였던 것이다!
나는 그날 점심시간에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1층으로 내려가 교무실 앞으로 갔다.
교무실 앞 게시판 중간에 내 이름이 당당히 적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경쟁을 부추기기 위해 매시험마다 결과가 나오면
3학년만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교무실 앞의 게시판에 이름을 적어놓았다.
재수생을 제외하고도 100명 이상이 서울대에 들어가니 게시판에 이름이 올랐다는 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보증이나 마찬가지였다.
3, 4, 5월의 시험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내 이름이 거기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지만
어쩌다 지나가다 보면 항상 이름이 올라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등수가 뒤로 갈수록 이름이 올랐다 빠졌다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3학년이 되고 한 번도 알림판에 내 이름을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내 성적이 그럴 정도가 되지도 않았지만 그걸 목표로 해본 적도 없었다.
그저 막연히 성적을 더 올리자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 이름이 알림판에 올라있는 것을 보니 묘한 자부심과 함께
이 알림판에서 다시는 이름이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강한 열망이 일었다.
학교에서 노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한 번 단맛을 본 사람은 결코 그 단맛을 잊지 못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를 괴롭게 하는 건 현실의 냉정함이었다.
마침 내가 최근에 풀었던 문제와 유사한 문제가 있었기에 이런 성적을 낼 수 있었지
평소의 나라면 참 쉽지 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애써 한 번 맛 본 단맛을 좇아 허둥지둥하다 결국에는 좌절하고야 말 것 같은 불안함도 있었다.
게시판의 앞부분에 늘 이름을 올리는 어떤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밤에 혼자가 되면 문을 걸어 잠그고 그날 목표량만큼 공부를 다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든다고 했다.
목표량을 못 채우면 밤을 새기도 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공부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그렇게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단맛을 계속 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
종수 형은 내 이야기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현충일 오후였다.
나는 종수 형 내외와 함께 영어와 수학 공부를 같이 한 후 종수 형과 서점에 나와 앉았다.
나는 내 성적이 그렇게 오른 것과 그걸 계속 유지할 자신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건 네가 매일 그렇게 한 문제씩 씨름하면서 공부를 했으니 그렇게 된 거지 그걸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는데?
네가 앞으로 그런 식으로 문제를 더 많이 풀어보면 네가 공부한 문제가 나올 확률도 그만큼 더 커질 거 아냐.
그렇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해 밤새 공부하는 것에는 나도 반대다.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중요한 게 얼마든지 있거든.”
그 때 서점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본 순간 나는 그만 숨이 멎고 말았다.
그 여학생이었다.
“안녕하세요?”
그 여학생은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고개를 돌려 종수 형을 보고 웃으면 인사를 했다.
주변이 다 환해지는 웃음이었다.
“어, 그래. 진희 왔구나. 오랜만이야.”
두 사람은 서로 반갑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릿속은 혼자만의 생각으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알지?
참, 이름이 뭐랬더라....... 진희? 맞아, 진희.
근데 나를 모르는 건가? 나는 자기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내가 그토록 애태우며 보고 싶어 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니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나 혼자 만리장성을 쌓았던 것이지
그 여학생이 나를 알고 또한 나를 의식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언니는 안 계신가 봐요?”
진희가 안채로 통하는 문을 보며 종수 형에게 물었다.
“아니야, 있어. 내가 불러줄게. 여보! 진희 왔어요!”
잠시 후 안채와 통하는 문이 열리고 형수가 나타났다.
형수도 진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또 눈만 끔벅거리며 그들을 쳐다봤다.
“자, 그럼, 우리는 두 분께 자리를 맡기고 잠시 산책 좀 하고 올게요.”
종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툭 치며 나가자고 눈짓을 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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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gionex(12윤선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6.03 많이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끝까지 재미 있게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최기석 작성시간 17.06.03 윤선호님, 반갑습니다. 4회 최기석입니다.
'벚꽃의 꿈' 연재를 통해 당시의 학창시절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됩니다.
작중인물중 '종수 형'이 돝섬의 김종수는 아니겠지요? 기수차이가 있어서.
처음부터 작품을 읽지못해서 죄송!
그땐 그래도 낭만이 있었지요? 그것도 순수한!
그간 선호님의 연재글을 챙겨 읽지 못해 미안한 마음입니다.
추억의 글,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돌아가 시간나는대로 챙겨 읽을께요.
언잰가 한번은 뵙게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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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gionex(12윤선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6.03 선배님, 반갑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종수 형은 제가 좋아하는 선배님 두 분의 이름을 조합한 것입니다.
죄송하게도 김종수 선배님은 잘 알지 못합니다.
제가 지금 사는 곳은 원주이고 일은 포항과 서울에서 하고 있어 모임에 나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음에 기회가 되면 꼭 나가서 선배님들께 인사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재미 있게 잘 읽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작성자마리사(7회 왕혜경) 작성시간 17.06.04 연재 횟수가 벌써 제법 되네요.
조회 회수도 계속 올라가고 있고요.
성과나 실적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큼 관심과 흥미를 갖고 읽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이니
좋은 현상입니다.
절대 부담 갖지 말고 자기 색깔대로 ...
써놓은 글을 올리는 지, 매번 새롭게 쓰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작성자최기석 작성시간 17.06.04 아우님, 답신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한 번 뵙고 싶네요.
인연이 닿을 날이 있겠지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