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점을 나서서 개천을 따라 걸었다.
방향은 자연스럽게 무학산 쪽을 향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었다.
봄꽃은 다 지고 그 자리에는 푸른 잎사귀들이 뜨거운 햇빛을 받아 광합성에 열중하고 있었다.
종수 형은 무척이나 많은 이야기를 했고 나 또한 그랬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진희뿐이었다.
개천을 따라 점점 올라가서 산자락에 이르자 인공 축대는 사라지고 크고 작은 바위 틈새로 맑은 물소리가 들리는 계곡으로 변했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시야가 탁 트인 널따란 바위 위에 앉았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시원했다.
내려다보니 마산 시내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보고 있는데 종수 형이 뭐라고 말했다.
다른 내용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지만 ‘진희’라는 단어는 내 귀에 쏙 들어왔다.
나는 종수 형을 돌아봤다.
“네?”
종수 형이 장난스런 표정으로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영빈이 너, 진희랑 몇 번 마주쳤지? 너 지금 진희한테 관심 있는 거 맞지?”
속이 뜨끔했다.
나는 대답도 못한 채 그저 얼굴만 푹 숙였다.
나도 몰래 점점 얼굴이 달아올랐다.
종수 형은 뭐가 그리 유쾌한지 껄껄 웃더니 내 어깨를 토닥거렸다.
“내가 형수 통해서 진희 한번 만날 수 있게 주선해볼까?”
조금 느려졌던 내 심장의 움직임이 그 말에 다시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얼굴뿐 아니라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가 서점으로 돌아왔을 때 진희는 없었고 형수만 혼자 있었다.
종수 형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크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영빈이가 진희를 짝사랑한대요. 우리가 만나게 안 해주면 얘 상사병으로 죽을지도 몰라.”
형수가 그 말을 듣고 따라 웃었다.
“잘 됐네요. 아까 두 사람 나간 다음에 진희도 영빈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관심 있는 눈치던데.”
두 사람은 나를 앞에 두고 연신 웃으며 나를 들었다 놨다 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른 채 얼굴만 빨갛게 상기되어 그냥 고개만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진희가 나에 대해서 물어보더라는 말은 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벅차올라 몸이 점점 풍선처럼 가벼워지더니
마침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
다음 일요일 오후, 안방에서 종수 형과 수학 공부를 마친 나는 서점으로 나왔다.
서점에는 내게 먼저 영어를 가르치고 종수 형과 교대한 형수가 앉아 있었다.
종수 형은 형수 옆의 의자에 앉았고 나는 엉거주춤 통로에 서 있었다.
형수가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올 때가 됐는데......, 하며 혼잣말을 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점점 더 심하게 벌렁거려서 이대로 더 있다가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그냥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 지경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서점 문이 열리며 진희가 나타났다.
평소와 달리 긴장한 듯한 얼굴에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리며 웃는 모습이 어색했다.
긴장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웃으며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고 표정 하나 바꿀 수가 없었다.
종수 형 내외만 유쾌하게 웃으며 분주히 몸을 움직였다.
“자, 이쪽은 □□고 3학년 박영빈 군. 그리고 여기는 OO여고 3학년 이진희 양.”
“두 사람이 초면은 아니지? 이야기 들어보니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것 같던데.
천천히 이야기 좀 나눠 봐. 두 사람이 좀 통할 것 같던데.”
종수 형과 형수는 우리 둘을 그렇게 소개하고는 밖에 볼일이 있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
우리 둘은 그렇게 서점에 남겨졌다.
나는 계산대 뒤에 나란히 놓여있던 의자를 통로로 옮겨 서로 마주보게 배치하고 진희를 그 한 쪽에 앉게 했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의자에 앉으려다 너무 가까운 것 같아 의자를 조금 더 뒤로 물려서 그 위에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힐끔 쳐다보니 진희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앞에 두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아 약간 마음이 상한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진희가 작은 소리로 웃더니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화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네? 만화요?”
기습 질문에 당황한 나는 대답을 이을 수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진희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크고 맑은 눈가에는 약간의 장난기와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다시 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제가 여러 번 봤는데....... ‘바벨2세’, ‘도깨비 감투’, ‘대야망’... 게다가 ‘유리의 성’까지....... 훗.”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와서 나를 보았단 말인가.
내가 이 서점엘 들락거리기 시작한 거의 초창기부터 쭉 나를 지켜봤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겨우 목에 걸린 말을 뱉어냈다.
“아니, 그, 그럼 저를 계속 지켜보셨다는 겁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지켜보려고 해서 지켜본 건 아니고요,
책 사러 올 때 자주 그쪽이 보이기에 어떤 사람인가, 무슨 책을 보나, 해서 약간 관심을 가졌었죠.”
하, 그것 참. 내가 만화만 본 건 아닌데.......
그렇다고 굳이 변명할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만화를 좋아하니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뒤통수를 긁었다.
“집이 서울이라고 들었는데, 그럼 여기서는 하숙하세요?”
“네.”
“종교는 있으세요?”
“아니, 없습니다.”
주로 진희가 질문하고 나는 대답을 했다.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것, 알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머릿속이 뻣뻣하게 굳어서 진희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나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억지로 쥐어짜서 내뱉은 말은 그러나 질문과는 동떨어진 말이었다.
“편지를 쓰게 해주십시오.”
“네?”
느닷없는 말에 진희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람.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이었고, 어쩌면 그게 사실은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마산에 혼자 있으면서 참 많이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누군가에게 편지라도 쓰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진희 씨가 그 대상이 되어 제 편지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네....... 편지를 쓰는 것이야 영빈 씨 마음이니 그렇게 하셔도 상관없지만......,
두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 편지를 저는 집에서도 받기 곤란하고 학교에서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저는 글을 잘 못 써서 답장을 하겠다는 약속을 못 하겠는데요.”
“그런 건 문제도 아닙니다.
일단 편지는 제가 여기 서점에 맡겨놓을 테니 언제라도 지나가실 때 들러서 찾아가시면 되고요,
답장을 안 하셔도 저는 전혀 섭섭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그렇다면 그렇게 하세요. 어떤 편지가 올지 벌써 기대되는데요? 후후.”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는 진희의 모습은 내 가슴을 하염없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