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밤마다 편지를 썼다.
편지라기보다는 일기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것 같다.
그날 학교 가는 길에 있었던 일들, 학교에서 친구들과의 일들,
내 머릿속에서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생각들,
찬란한 햇빛과 맑은 하늘, 찰랑이며 빛나는 바다의 움직임,
학교 뒤로 우뚝 솟아있는 무학산의 푸르름, 나뭇잎을 스치며 살랑거리는 바람 소리,
밤하늘의 별들, 늦은 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이런 것들이 내 편지의 소재가 되었다.
나는 거의 매일 편지를 서점에 갖다놓았다.
우리는 종수 형의 허락을 받아 책장 한 귀퉁이의 빈 칸에 빈 하드커버 책 케이스를 꽂아놓고 편지함으로 사용했었는데
다음 편지를 갖다놓으러 가서 보면 편지함은 항상 비어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내 일상의 느낌을 진희도 내 편지를 통해 그대로 느낄 것이란 생각은
우리 둘이 하나가 된 것 같은 동질감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우리는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후에 서점에서 만났다.
우리 덕분에 종수 형과 형수는 바깥일을 볼 수 있어서 좋았고 우리는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아니, 어쩌면 종수 형은 우릴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만나서 공부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읽은 책 이야기를 했다.
진희는 덧붙여 내 편지를 읽은 느낌과 내 글 솜씨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나는 쑥스러움과 뿌듯함으로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는 진희의 칭찬에 힘입어 더 정성스레 편지를 썼다.
내가 좋아하는 시를 옮겨 적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하는데 한 고등학교 밴드가 나와서 직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문득 귀에 전해지는 가사의 내용이 내 마음에 깊이 파고들었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나는 쓴다 너의 이름을.......
제목을 듣지는 못했지만 누구의 시라는 소리는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생각나는 가사를 종이에 휘갈겨 메모했다.
몇 번이나 읽어봐도 진희에 대한 내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한 가사가 아니던가.
나는 진희의 이름과 가사가 적혀있는 종이를 고이 접어 가방에 갈무리했다.
다음 날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서점에 들러 종수 형에게 그 시에 대해 물어봤다.
형은 깜짝 놀라며 어떻게 그 시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라디오에서 들었다고 말했다.
종수 형은 야릇한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더니 구석진 책장에서 시집 한 권을 꺼내주었다.
폴 엘뤼아르라는 시인의 ‘이곳에 살기 위하여’라는 시집이었다.
“거기서 ‘자유’라는 시를 찾아봐.”
세상에, 나는 그 시가 절절한 사랑의 노래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자유에 대한 노래라니.
하지만 시가 세상에 나온 이상, 그것은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다.
내가 그것을 사랑 노래라고 읽고 느끼면 그건 사랑 노래인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배울 때,
아무리 선생님이 ‘님’은 잃어버린 조국을 상징한다고 주입시켜도
호진이가 그 시를 볼 때마다 자기를 차버린 이웃 학교의 여학생을 생각하며 한숨짓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 나는, 폴 엘뤼아르의 ‘자유’를 슬쩍 ‘진희’로 바꾸어 읽어버렸다.
그리고 또 실제로 나는 어디든 공간만 있으면 진희의 이름을 쓰고 쓰고 또 쓰고 했으니까.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
그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일생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태어났다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자유여.(8)
진희는 이 시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은 시를 알려줘서 고맙다고 말하면서 막 만개한 꽃처럼 활짝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또 진희 몰래 심호흡을 해야 했다.
***
햇살이 눈부신 아침이었다.
일요일이었다.
나는 책 몇 권과 카세트라디오를 챙겨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종수 형 내외가 일이 있어 공부를 쉬기로 한데다가 진희는 교회에서 행사가 있어 서점에 올 수 없다고 했었다.
그래서 나는 서점엘 가는 대신 학교에 갈까 집에 있을까 하다가 그냥 집에 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옥상에는 내가 사다놓은 철제 접이 의자가 하나 있었다.
나는 카세트라디오를 헤드폰으로 연결해서 들으며 의자에 앉아 책을 보았다.
2학년 어느 땐가부터 반복해서 보았던 ‘종합영어’ 책은 내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면서 나달나달거렸다.
나는 한 단락을 읽고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봤다.
참으로 맑고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한 줄기 실바람이 불어와 내 살갗을 어루만지고 가니 괜히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진희도 이 하늘을 보고 있을까.
생각의 촉수가 한 번 진희에게 닿자 마치 무한 루프에 빠진 것처럼 진희의 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사실, 굳이 그 생각에서 빠져나올 이유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책을 덮고 진희의 생각에 집중했다.
카세트라디오에서는 윤형주와 박인희가 부른 ‘사랑의 찬가’가 흘러나왔다.
가사가 어찌나 가슴에 와 닿는지.
나는 나지막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눈을 감았다.
진희의 웃는 얼굴과 그 맑은 눈이 또렷하게 보였다.
들어봐요 내 마음을, 밀려오는 파도소리
바람처럼 소곤대는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바라보면 맑은 눈동자,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
호수처럼 깊고 깊은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세월 가고 내 마음은 떨어지는 한 잎 낙엽
꽃잎처럼 불태워요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9)
누구를 생각만 하는 것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쿵쾅거릴 수가 있다니.
아직 사랑이란 말을 쓰기에는 어릴지 모르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감정은 틀림없는 사랑, 그것이었다.
나는 북받쳐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의자에 앉은 채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바람이 소곤대며 지나갔다.
어디선가 파도소리도 들렸다.
나는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8) 자유 - 폴 엘뤼아르(1942)
(9) 사랑의 찬가 - 윤형주/박인희(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