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떠나던 날,
상혁이 형과 승은이 누나가 집으로 왔다.
둘은 내가 하숙하는 집의 자녀들로 상혁이 형은 휴가로, 승은이 누나는 여름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들이 있는 동안 나는 상혁이 형과 방을 같이 쓰기로 했다.
“영빈아, 난 며칠만 있다가 부대 복귀할 거니까 불편해도 조금 참아라.
집에 있는 동안에도 조심조심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상혁이 형은 방에 짐을 풀면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친했던 형이지만 한 번도 같이 생활해본 적이 없다 보니 한 방에서 생활하는 게 서로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고3 수험생이니 말이다.
형은 내 신경을 건들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나와는 생활 패턴이 아주 달랐다.
형은 아침에 내가 등교 준비할 때는 자고 있었고, 밤에도 거의 통금 가까운 시간에 들어와 1층 마루에서 놀다가 자곤 했다.
그러니 나와 마주칠 시간도 별로 없었고 따라서 불편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승은이 누나였다.
누나는 수시로 내 방에 들어와 “얘가 언제 이렇게 컸대? 몇 달 만에 어른이 다 됐네.”라거나
“얘, 얘,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좀 나가서 놀기도 해.” 라면서 나에게 말을 걸고 나를 귀찮게 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이 차이가 채 한 살도 되지 않는데
자기는 대학생이랍시고 고등학생인 내게 제대로 누나 노릇을 하려고 들었다.
하긴 고등학생이던 지난 해와는 완전히 다른 긴 머리에다 옅은 화장까지 하고 있어서
까까머리인 나보다 훨씬 더 어른스러워 보이기는 했다.
“누나, 나 기말고사 준비해야 돼. 방해 좀 하지 마. 아저씨한테 이른다.”
“이런 녀석 보게, 누나한테 말버릇 하고는.......
알았어. 나도 옆에서 조용히 책 보고 있을 테니 간식 생각나면 말해. 내가 해다 줄게.”
하지만 누나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내려가서 과일을 가져오고,
또 내려가서 음료수를 가져오고, 또 내려가서 과자를 가져오곤 했다.
알아서 간식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으니 편하고 좋긴 했다.
누나는 또 자기 방 책장을 뒤져서 지난해에 자기가 쓰던 참고서며 노트들을 가져다주었다.
어릴 때부터 두 살 터울의 상혁이 형보다 더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던 누나답게 참고서며 노트가 정말 잘 정리되어 있었다.
“어, 고마워 누나. 큰 도움 되겠다.”
“그래, 공부하다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선생님이 대기하고 있을 테니.”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밤이 되어도 덥고 끈적한 공기가 가득했다.
나는 공부를 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이라도 좀 쐬어야지 살 것 같았다.
“영빈이 너 어디 가려고?”
내가 일어서는 걸 보고 누나가 물었다.
“더워서 바람 좀 쐬려고. 옥상에 갈 건데 같이 갈래?”
누나는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옥상에 한 번도 올라와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야, 우리 집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바람도 시원하고 전망도 좋고. 앞으로 자주 올라와야겠다. 근데 왜 의자가 하나뿐이야?”
“당연하지. 내가 앉으려고 사다 놓은 거니까.”
“그럼 이 의자 앞으로 내꺼 할 테니까 너는 새로 하나 사든지 그냥 바닥에 앉든지 해.”
“그런 게 어딨냐?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네. 누나는 개학하면 서울 갈 건데 뭐 하러 하날 더 사?”
“그렇군. 그럼 좋아. 내가 봐준다. 같이 쓰는 걸로 해. 내가 허락할게.”
“이 아줌마가 정말. 여보세요. 이건 원래 내꺼거든요?”
우리는 옥신각신하다가 멈추고 멀리 하늘을 봤다.
어두운 하늘에는 별빛도 찾을 수 없었다.
한바탕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였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축축한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가 도로 나왔다.
심호흡을 하니 진희 앞에서 떨며 심호흡하던 생각이 났다.
진희를 마주하면 심호흡을 하게 되고, 심호흡을 할 때면 진희가 생각났다.
진희를 생각하면 언제나 조건반사처럼 입가에 웃음이 머금어졌다.
나는 동네의 불 켜진 집들을 살펴보았다.
어쩌면 저 불 켜진 집들 중 하나가 진희네 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불 켜진 창 안에서 진희가 내 생각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 편지를 읽고 있을 수도 있겠지.
나는 다음에 진희를 만나면 꼭 집이 어딘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기말고사가 끝났다.
마지막 시간 끝나는 종이 울릴 때, 후련함과 허탈함, 아쉬움이 뒤범벅이 되어 낮은 탄식으로 새어나왔다.
다른 친구들처럼 죽어라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생각도 많이 했던 1학기여서 후회는 크지 않았다.
지나간 몇몇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약간의 아쉬움이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아직 방학은 하지 않았지만, 기말고사를 끝으로 3학년의 반을 마친 것이었다.
이제 이 끔찍한 고3 생활도 한 학기밖에 남지 않았다.
진희와 나는 기말고사가 끝난 일요일에 진해로 놀러가기로 했다.
벚꽃이 필 시기도 아닌데 굳이 진해를 선택한 것은 선생님들의 눈을 피하기도 하고,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곳에서 여행의 기분도 좀 느껴보고 싶었던 내 제안에 진희가 동의하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