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우리는 화창한 벚꽃과 투명한 햇빛이 어우러진 점심시간에 그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만개한 벚꽃이 눈부셨고 멀리에서는 마산만의 푸른 바다가 눈부셨다.
“야 우리, 모임 이름 하나 만들까?”
고개를 내밀고 담장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던 호진이가 불쑥 말했다.
“어 그래, 그거 재밌겠다. 이름 만들어서 티셔츠도 같이 사 입자.”
남수가 맞장구를 쳤다.
수많은 이름들이 튀어나왔지만 너무 장난스러운 이름은 하지 말자는 정호의 뜻에 따라
게 중 가장 반듯한 ‘한마음회’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재미없다. 한마음에서 마음을 마음 심 자로 바꿔서 ‘한심회’로 하면 어떻겠냐?”
호진이의 제안에 대해 모두들 찬성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심한 사람들이 되었지만 모두들 낄낄거리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봄 소풍 때까지 단체 티셔츠를 맞춰 입기로 했다.
“내 꿈이 뭔지 아냐?”
모임 이름을 정하고, 티셔츠를 맞추고,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다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며 다음 화제를 찾고 있을 때 호진이가 말했다.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호진이를 쳐다봤다.
“나는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어마어마한 부자가 될 거야.
그런 다음에 저기 저 바다를 막고 있는 저 호텔을 사들여서 허물어버릴 거야.
그래서 학교에서 바다가 잘 보이게 말이야.”
학교에서 내려다보면 마산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학교와 바다 중간에 아주 높은 호텔이 하나 있었는데 그 호텔 때문에 바다의 일부가 가려져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교실에 앉아서 볼 때는 그래도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렇게 담벼락에 서서 볼 때는 바다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이 가리고 있었다.
“그거 훌륭한 생각이다. 내가 너 돈 많이 벌도록 적극 후원해주마.”
“야야, 아서라. 너 율산 신선호 망해서 잡혀간 거 봤지?
너도 신선호처럼 돈 벌려고 하다가 잡혀가면 우리가 면회 가야할 텐데 난 그거 싫다.”
“그래, 돈 많아 봐야 좋을 거 없다. 효주 양 납치된 거 봐라. 너도 돈 많으면 네 자식 납치될지도 모른다고.”
친구들은 좋은 화젯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찧고 까불었지만 나는 호진이가 말한 ‘꿈’에 대해서 혼자 생각에 빠져들었다.
호진이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어떤 꿈을 가지고 있는가?
전에 종수 형이 말했던, 그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생각났다.
종수 형이 말한 게 결국 꿈이었던가? 꿈을 위해서 공부하라는? 그럼 내 꿈은 뭐지?
나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꿈인데.......
내 꿈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좋은 대학엘 들어가기 위해 공부한다는 말이잖아.......
생각은 계속 원점으로 돌아오기만 했다.
문제는 내가 그 꿈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꿈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에 맞는 꿈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들, 꿈이란 게 도대체 뭐냐? 호진이 너는 아까 그게 네 꿈이라고 말했는데 그 꿈의 정의가 뭐냐?”
시끄럽던 친구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다들 멀뚱히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집을 나서는데 걱정이 앞섰다.
나는 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는데, 비만 오면 버스 정류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우리 학교 근처에는 남학교가 두 개, 여학교가 세 개 있었다.
그들이 모두 비슷한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야 하니 평소에도 콩나물시루 같았는데,
비가 오는 날에는 다른 때는 걸어 다니던 학생들까지 버스를 타니 콩나물시루 두 배쯤 되는 밀도로 밀착되어
수직을 유지하고 서 있기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우산에서 묻어나는 물기와 축축한 공기 때문에 불쾌지수는 끝없이 상승해서
조그만 일에도 서로 짜증을 내고 목청을 돋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해서 학교에 가면 아침부터 파김치처럼 축 쳐져서 하루 종일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학생들을 쳐다봤다.
그러면서 다음 버스, 다음 버스 하면서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조금만 더 늦으면 지각할 상황까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아수라장에 뛰어들 용기는 차마 없었다.
그렇다고 택시를 탈 형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차를 얻어 타고 가는 것뿐이었다.
학교 방향으로 가는 차가 있다면 불가능한 방법도 아니었다.
그건 참, 무모한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하는데,
첫째 우리 학교 방향으로 가는 차일 것, 둘째 나를 태워줄 아량을 베풀만한 사람일 것이었다.
내가 학교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를 관통해서 더 지나가야 하는데,
당시 차를 가진 사람이라면 시내 어딘가를 목적지로 할 확률이 거의 100%였다.
그래도 나는 그 아수라장에 뛰어드느니 차라리 요행을 바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반응을 보이는 차는 한 대도 없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져갔다.
시계를 보니 이제는 버스를 탄다고 해도 이미 지각이었다.
그렇다면 용돈을 털어서라도 택시를 타고 가야하는 게 아닌가.
나는 며칠 치 용돈을 날려버리게 만든 내 무모한 도전을 후회하며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택시 대신 까만 승용차 한 대가 내 앞에 와서 섰다.
‘이건 뭐야’라는 생각으로 차를 쳐다보는데 조수석 창문이 열리며 운전석의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학생, 학교에 가나?”
“네.”
아저씨는 나를 조수석에 타게 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아저씨에게 크게 인사를 했다.
“인석아, 우리 아가씨가 네가 불쌍해 보였는지 태워주자고 해서 태운 거야. 인사는 아가씨께 해.”
그러고 보니 뒷좌석에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돌려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고 했었는데 차 안이 어두워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갸름한 윤곽과 단아한 자세로 앉아있는 모습만 느껴질 뿐이었다.
알 수 없는 설렘 같은 것이 서늘한 바람처럼 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내가 승용차에서 내리는 것을 몇 친구가 본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내 주변으로 모여들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나는 아침의 일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여학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눈을 반짝이며 캐물었다.
“어느 학교야?”
“OO여고.”
여학교는 학교마다 교복이 달랐기 때문에 교복만으로도 어느 학교인지 알 수가 있었다.
“야, 얼굴은 봤어? 예쁘디? 이름표는 봤냐? 몇 학년, 이름이 뭐데?”
“아, 몰라. 그냥 인사만 하느라 얼굴도 못 보고 이름표도 못 봤어.”
나는 차 안에서 뒤돌아볼 때 얼굴을 보려고만 했지 그 애의 이름표를 확인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이런, 멍충아. 너를 어여삐 여겨 차까지 태워줬는데 통성명은 했어야지.
나아가 만날 약속도 정하고 말이야. 어떻게 맺어진 인연인데 그렇게 쉽게 차버리냐?”
“야 야, 만나기는 뭘 만나냐. 그리고 인연은 무슨 인연?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