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민족의 노래 - 동요
산딸기 있는 곳엔 뱀이 있다고
누나는 그러지만 나는 안속아
내가 따라 갈까봐 그러는 게지
어린 시절에 즐겨 부르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기억되니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던 모양인데, 요즘의 어린이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 하면, 이 동요는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데에는 형제자매도 없다는 식이다.
‘산딸기’. 어린 시절 이맘때쯤, 우리들에게는 산에만 가면 늘 따먹을 수 있는 군것질거리가 바로 산딸기였다. 사실, 이제 곧 들에는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열릴 것이고, 가을이면 온 산에 ‘개암’이 널릴 것이다.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는 주식만이 아니었다. 산과 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군것질거리를 제공하는 낙원이었다. 어쨌건 초여름 산딸기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따먹을 수 있는 맛있는 열매였다.
마을마다 혹은 산마다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산딸기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발견한 산딸기를 누가 먼저 따먹을까봐 아직 채 익지도 않은 것까지 따먹은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살던 곳에도 산딸기가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게 혹은 아주 극명하게 표현한 동시가 앞에 제시한 노래이다.
우연히 산에 갔다가 산딸기를 보았다. 누이는 어린 동생과 빨갛게 익은 것들을 골라 맛있게 따먹었다. 며칠이 지나고 누이는 다시 산으로 간다. 바로 이제는 다 익었을 테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따라오려고 한다. 동생을 데리고 가면 자신이 먹을 양이 줄어들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동생을 떼어놓고 혼자 가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산딸기 있는 곳엔 뱀이 있다>고 동생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누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누이 혼자만 먹으려고, 나를 떼어놓고 혼자만 가려고 그러는 게라고 생각한다. 그 누이에 그 동생이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산딸기로 배를 채우려했으며, 오죽했으면 어린 동생까지 떼어놓고 혼자만 가려고 했을까. 가난이 가져온 어린 마음의 이기심이 그대로 드러난 이 동요를 지금의 어린이들은 모른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전쟁 당시 며칠씩 굶었던 기억을 말하자 어린이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굶어요? 밥이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내용이 이 노래에는 담겨 있다.
그런데 앞에 지적한 동요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래 동요를 찾아보면 거의 대부분의 노래들이 그 표현을 천진난만하게 혹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바로 우리들의 궁핍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동요. 그것은 동시에 멜로디가 붙은 것이다. 동요의 가사는 모두가 동시이고 그 동시는 분명 문학의 한 갈래인 시의 하위 갈래이다. 동시는 어린이가 쓴 것도 있지만 어른들이 어린이의 눈높이로 쓴 것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어린이의 귀로 혹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대상을 읊은 것이 바로 동시이다. 그 동시에 곡이 붙을 때에 비로소 동요가 된다. 바로 그 동시, 동요에 우리의 궁핍한 삶이 배어 있다면, 그래서 동요를 부르며 그런 궁핍한 삶의 모습을 우리의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계속 반추해간다면, 우리의 희망인 어린이들이 시나브로 찌든 삶을 되뇌인다면...... 참으로 큰일날 일이다.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동요부터 보자. 그것도 오랜 옛부터 전해오는 전래동요이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주께 새집 다오
모래더미에 손을 넣고, 그 위에 모래를 얹어 굴을 만들며, 손등의 모래를 토닥이며 부르는 노래.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더 이쁘게 만들겠다는 속마음을 두꺼비에게 보낸다. 두꺼비가 아주 멋진 굴집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어떤 놈이 ‘헌 집’ 주는데 ‘새 집’을 주겠는가. 이 노래에는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새 집에서 살고 싶었으면 이런 노래가 나왔겠는가.
달타령도 마찬가지이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달나라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계수나무 한 그루에 토끼 두 마리. 그 두 마리의 토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것이다. 바로 떡방아를 찧고 있다. 바로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달나라에는 계수나무 밑에서 두 마리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떡방아일까. 그만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먹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나라에만 가면 토끼가 찧어주는 떡방아를 보며 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땋겠네
신발타령이다. 닳고닳은 신발을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뛰어가면 벗겨지고 뚫린 구멍으로는 발가락까지 삐져나왔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으니 그 신발을 또 신을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새 신을 사다주었다. 새 신을 신은 기분. 아! 그만 하늘까지 뛰어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명 상표가 아니라고 투정하는 요즘의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다.
우리의 동요는 대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의식주(衣食住) 타령들이다. 의,식,주. 엥겔지수를 들먹이지 않아도 생존의 기본이 되는 요소라는 것은 다 알 것이다. 궁핍한 삶을 살았던 우리 민족은 가난을 벗삼아 살아가면서도 그저 언젠가는 잘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참아냈다. 바로 가난한 삶의 서글픔을 이런 노래들로 풀어낸 것이다.
서구의 동요나 동시들을 보면 꽃은 늘 머리에 꽂거나 앞가슴에 붙여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사랑을 고백하며 상대에게 주는 징표 즉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동요에 나오는 꽃들은 어떻게 된 것이 모두 입으로 들어간다. 꽃도 음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꽃만이 아니다. 하다못해 산 속의 물 한 모금까지 누가 먹을 것인가 궁금해했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깨끗한 산 속 옹달샘의 물. 세수하러 왔다가 세수할 물이 아닌 것을 알고 <물만 먹고> 가지 않는가.
가난한 삶 속에,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배고픔 속에 우리들은 그렇게나마 삶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먹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슬며시 드러낼 뿐이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
젓가락 두짝이 똑같아요
똑같이 생긴 것으로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바로 젓가락이다. 먹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물. 양반네들이야 방 안에 앉아 보이는 것이 다 똑같았을 것이다. 천장의 문양, 문에 수놓아진 모양, 두 개의 촛대, 책도 옆으로 누운 것이 똑같았을 것이지만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겨우 눈에 뜨이는 것이 밥상 위에 놓인 젓가락이다.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토끼야 토끼야
산 속에 토끼야
겨울이 오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은 농한기이다.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겨울로 들어서면 그해의 수확을 갈무리하여 추위를 이겨낸다. 이 때 문득 산 속의 토끼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얼 먹고 사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자신이 먹을 게 충분하지 못하니 다른 사물들도 그럴 것이라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더 물어본다. <흰눈이 내리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고 말이다.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가.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도 귀엽다는 표현보다는 저것이 점심을 굶지는 않을까가 걱정이다. 바로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점심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도토리 점심 가지고>가 바로 자신의 욕망이다. 자신은 소풍 갈 형편이 안된다. 그러니 나도 점심을 준비해서 놀러갈 수만 있다면, 하고 노래만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한 삶의 모습은 겨울에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보면서 부르는 노래에 이르면 극에 달한다. <펄펄 눈이 옵니다 / 하늘에서 눈이옵니다> 얼마나 좋은가.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준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눈송이가 우리들의 눈에는 무엇으로 보였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그 눈 역시 먹을거리, 바로 음식이었다. 꽃도 귀한 음식이지만 눈 역시 맛난 음식이었다. 그러니 하늘에서 선녀님들이 <떡가루를 뿌려줍니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눈을 보며 떡가루를 연상했는지. 그것은 숨겨진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눈이라도 한웅큼 삼켜야 했으며, 그렇게 눈을 먹으며 그 눈이 떡가루이기를 생각했겠는가. 정말이지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표현해 낸다는 동요들. 그 동요들 속에는 참으로 비참했던 우리의 가난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런 노래나마 부르며 가난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런 동요들을 어린이들이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하기야 요즘의 어린이들이 랩이나 테크노를 부르지 어디 동요를 부르겠는가마는, 학교에서는 음악 시간에 가르치고 배울 것이니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요즘에는 많이 변한 모양이다. 위에 열거한 동요들 중에 아직도 즐겨 부르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노래들보다는 조금은 밝고 명랑한 노래들을 내 아들딸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를 모르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우리도 좀 잘 살게 되었는가보다고 자위해 본다.
우리의 동요와 동시. 그것은 우리들의 가난한 삶의 모습들이며, 그런 동시와 동요를 통해 우리 민족은 궁핍함을 이겨냈다. 남들은 자연을 아름답게 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마시고, 먹고, 입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견뎌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부끄럽다기보다는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들이지 않은가.
산딸기 있는 곳엔 뱀이 있다고
누나는 그러지만 나는 안속아
내가 따라 갈까봐 그러는 게지
어린 시절에 즐겨 부르던 동요의 한 구절이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기억되니 교과서에도 실려 있었던 모양인데, 요즘의 어린이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 하면, 이 동요는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배고픈 데에는 형제자매도 없다는 식이다.
‘산딸기’. 어린 시절 이맘때쯤, 우리들에게는 산에만 가면 늘 따먹을 수 있는 군것질거리가 바로 산딸기였다. 사실, 이제 곧 들에는 뽕나무 열매인 ‘오디’가 열릴 것이고, 가을이면 온 산에 ‘개암’이 널릴 것이다. 자연이 주는 먹을거리는 주식만이 아니었다. 산과 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군것질거리를 제공하는 낙원이었다. 어쨌건 초여름 산딸기는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고 따먹을 수 있는 맛있는 열매였다.
마을마다 혹은 산마다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산딸기가 지천으로 깔려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발견한 산딸기를 누가 먼저 따먹을까봐 아직 채 익지도 않은 것까지 따먹은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살던 곳에도 산딸기가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를 그야말로 천진난만하게 혹은 아주 극명하게 표현한 동시가 앞에 제시한 노래이다.
우연히 산에 갔다가 산딸기를 보았다. 누이는 어린 동생과 빨갛게 익은 것들을 골라 맛있게 따먹었다. 며칠이 지나고 누이는 다시 산으로 간다. 바로 이제는 다 익었을 테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어린 동생이 따라오려고 한다. 동생을 데리고 가면 자신이 먹을 양이 줄어들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동생을 떼어놓고 혼자 가야 더 많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산딸기 있는 곳엔 뱀이 있다>고 동생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누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누이 혼자만 먹으려고, 나를 떼어놓고 혼자만 가려고 그러는 게라고 생각한다. 그 누이에 그 동생이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산딸기로 배를 채우려했으며, 오죽했으면 어린 동생까지 떼어놓고 혼자만 가려고 했을까. 가난이 가져온 어린 마음의 이기심이 그대로 드러난 이 동요를 지금의 어린이들은 모른다고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한국전쟁 당시 며칠씩 굶었던 기억을 말하자 어린이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왜 굶어요? 밥이 없으면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요.> 그런 어린이들이 이해하기에는 힘든 내용이 이 노래에는 담겨 있다.
그런데 앞에 지적한 동요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전래 동요를 찾아보면 거의 대부분의 노래들이 그 표현을 천진난만하게 혹은 솔직하고 담백하게 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바로 우리들의 궁핍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다.
동요. 그것은 동시에 멜로디가 붙은 것이다. 동요의 가사는 모두가 동시이고 그 동시는 분명 문학의 한 갈래인 시의 하위 갈래이다. 동시는 어린이가 쓴 것도 있지만 어른들이 어린이의 눈높이로 쓴 것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어린이의 귀로 혹은 어린이의 마음으로 대상을 읊은 것이 바로 동시이다. 그 동시에 곡이 붙을 때에 비로소 동요가 된다. 바로 그 동시, 동요에 우리의 궁핍한 삶이 배어 있다면, 그래서 동요를 부르며 그런 궁핍한 삶의 모습을 우리의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계속 반추해간다면, 우리의 희망인 어린이들이 시나브로 찌든 삶을 되뇌인다면...... 참으로 큰일날 일이다.
그런데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동요부터 보자. 그것도 오랜 옛부터 전해오는 전래동요이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주께 새집 다오
모래더미에 손을 넣고, 그 위에 모래를 얹어 굴을 만들며, 손등의 모래를 토닥이며 부르는 노래.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더 이쁘게 만들겠다는 속마음을 두꺼비에게 보낸다. 두꺼비가 아주 멋진 굴집을 만들어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 세상에 어떤 놈이 ‘헌 집’ 주는데 ‘새 집’을 주겠는가. 이 노래에는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배어 있다.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았으면, 얼마나 새 집에서 살고 싶었으면 이런 노래가 나왔겠는가.
달타령도 마찬가지이다. 전래 동화에 나오는 달나라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계수나무 한 그루에 토끼 두 마리. 그 두 마리의 토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잘 알 것이다. 바로 떡방아를 찧고 있다. 바로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달나라에는 계수나무 밑에서 두 마리의 토끼가 떡방아를 찧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이면 떡방아일까. 그만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먹을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달나라에만 가면 토끼가 찧어주는 떡방아를 보며 떡을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망이 담겨있는 것이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땋겠네
신발타령이다. 닳고닳은 신발을 얼마나 오래 신었는지, 뛰어가면 벗겨지고 뚫린 구멍으로는 발가락까지 삐져나왔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으니 그 신발을 또 신을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새 신을 사다주었다. 새 신을 신은 기분. 아! 그만 하늘까지 뛰어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명 상표가 아니라고 투정하는 요즘의 아이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다.
우리의 동요는 대부분이 바로 이와 같은 의식주(衣食住) 타령들이다. 의,식,주. 엥겔지수를 들먹이지 않아도 생존의 기본이 되는 요소라는 것은 다 알 것이다. 궁핍한 삶을 살았던 우리 민족은 가난을 벗삼아 살아가면서도 그저 언젠가는 잘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안고 참아냈다. 바로 가난한 삶의 서글픔을 이런 노래들로 풀어낸 것이다.
서구의 동요나 동시들을 보면 꽃은 늘 머리에 꽂거나 앞가슴에 붙여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아니면 사랑을 고백하며 상대에게 주는 징표 즉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동요에 나오는 꽃들은 어떻게 된 것이 모두 입으로 들어간다. 꽃도 음식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꽃만이 아니다. 하다못해 산 속의 물 한 모금까지 누가 먹을 것인가 궁금해했다.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깨끗한 산 속 옹달샘의 물. 세수하러 왔다가 세수할 물이 아닌 것을 알고 <물만 먹고> 가지 않는가.
가난한 삶 속에,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은 배고픔 속에 우리들은 그렇게나마 삶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먹고 싶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사물이 그렇게 한다는 것을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슬며시 드러낼 뿐이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은가
젓가락 두짝이 똑같아요
똑같이 생긴 것으로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바로 젓가락이다. 먹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사물. 양반네들이야 방 안에 앉아 보이는 것이 다 똑같았을 것이다. 천장의 문양, 문에 수놓아진 모양, 두 개의 촛대, 책도 옆으로 누운 것이 똑같았을 것이지만 우리 가난한 백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겨우 눈에 뜨이는 것이 밥상 위에 놓인 젓가락이다. 바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토끼야 토끼야
산 속에 토끼야
겨울이 오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은 농한기이다. 가을에 추수를 끝내고 겨울로 들어서면 그해의 수확을 갈무리하여 추위를 이겨낸다. 이 때 문득 산 속의 토끼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얼 먹고 사느냐> 하고 물어보는 것이다. 그래도 걱정이 된다. 자신이 먹을 게 충분하지 못하니 다른 사물들도 그럴 것이라 걱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한 번 더 물어본다. <흰눈이 내리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고 말이다.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
도토리 점심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가. 그 귀여운 모습을 보면서도 귀엽다는 표현보다는 저것이 점심을 굶지는 않을까가 걱정이다. 바로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 점심을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도토리 점심 가지고>가 바로 자신의 욕망이다. 자신은 소풍 갈 형편이 안된다. 그러니 나도 점심을 준비해서 놀러갈 수만 있다면, 하고 노래만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가난한 삶의 모습은 겨울에 눈이 내리는 광경을 보면서 부르는 노래에 이르면 극에 달한다. <펄펄 눈이 옵니다 / 하늘에서 눈이옵니다> 얼마나 좋은가.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준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눈송이가 우리들의 눈에는 무엇으로 보였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그 눈 역시 먹을거리, 바로 음식이었다. 꽃도 귀한 음식이지만 눈 역시 맛난 음식이었다. 그러니 하늘에서 선녀님들이 <떡가루를 뿌려줍니다>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눈을 보며 떡가루를 연상했는지. 그것은 숨겨진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오죽 먹을 것이 없었으면 눈이라도 한웅큼 삼켜야 했으며, 그렇게 눈을 먹으며 그 눈이 떡가루이기를 생각했겠는가. 정말이지 피눈물이 날 지경이다.
민족적 정서를 그대로 표현해 낸다는 동요들. 그 동요들 속에는 참으로 비참했던 우리의 가난이 담겨 있다. 우리는 그런 노래나마 부르며 가난을 이겨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그런 동요들을 어린이들이 부르지 않기를 바란다. 하기야 요즘의 어린이들이 랩이나 테크노를 부르지 어디 동요를 부르겠는가마는, 학교에서는 음악 시간에 가르치고 배울 것이니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요즘에는 많이 변한 모양이다. 위에 열거한 동요들 중에 아직도 즐겨 부르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러한 노래들보다는 조금은 밝고 명랑한 노래들을 내 아들딸이 부르는 것으로 보아, <산딸기 있는 곳에 뱀이 있다고>를 모르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우리도 좀 잘 살게 되었는가보다고 자위해 본다.
우리의 동요와 동시. 그것은 우리들의 가난한 삶의 모습들이며, 그런 동시와 동요를 통해 우리 민족은 궁핍함을 이겨냈다. 남들은 자연을 아름답게 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마시고, 먹고, 입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견뎌내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부끄럽다기보다는 더욱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들이지 않은가.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