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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소리 하고 있는 윤선도

작성자관악산|작성시간03.09.20|조회수107 목록 댓글 2
배부른 소리 하고 있는 윤선도
- 漁夫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漁父四時詞> -


구한말 때던가. 선교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구공을 치고 있을 때 이를 지켜보던 어느 고관대작께서 이렇게 말했단다. <그렇게 힘든 것을 뭐하려고 직접 하고 있소. 아랫것들이나 시킬 것이지......> 보길도 부용동 정원에서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내 버디 며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 동산(東山)에 달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 두어라 이 다섯밧긔 또 더하야 무엇하리>

고산(孤山)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이다. 고산이 56세 되던 해, 영덕의 유배지에서 돌아와 금쇄동에서 자연을 벗삼아 기거하며 지은 노래로 <산중신곡>이란 책에 실려 있는 연시조이다. 전체 여섯 수로 되어 있는 이 시조는 수,석,송,죽,월(水石松竹月 - 물,바위,소나무,대마무,달)의 다섯을 벗으로 하여, 서시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의 특질을 들어 찬미하고 있다. 물의 영원성, 바위의 변하지 않음, 소나무의 푸르름, 대나무의 곧음, 달의 광명 등을 이미지화하여 지은이의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조의 경지를 이들 작품 속에 잘 담아내고 있다. 특히 이 <오우가>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서 시조의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수작으로 고산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등학교 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사람이면 누구든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니, 이 시조 속에는 과연 그것 뿐일까?
이 시조를 두고 <자연에 대한 사랑과 관조>를 이야기하지만, 조금만 깊숙이 이 시조의 속으로 들어가 보면, 오죽했으면 인격체도 아닌 수석송죽월을 자신의 벗이라 했겠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렇게도 벗이 없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실 윤선도에게는 벗이 없었다. 자신은 수석송죽월을 자신의 벗이라고 노래했는지는 모르지만 수석송죽월 쪽에서는 윤선도를 벗으로 생각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윤선도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윤선도는 선조 20년(1587년)에 나서 광해군, 인조, 효종대를 거쳐 현종 12년(1671년)에 죽었으니 만 84년을 산 셈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고 시시콜콜 따지고 들어서 때로는 ‘도량이 좁다’는 평을 듣기도 했던 꼬장꼬장한 성격 탓도 있지만 어쨌건 그의 삶은 평탄하지 못했다. 그는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집안 출신으로,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벌가의 후손이었으나, 그가 살았던 때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정치적으로 당쟁이 심했고, 그 와중에 서인들이 득세한 시대였다. 그러나 윤선도는, 비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이었지만 남인이었다. 그러니 여러 차례에 걸쳐 총 20년을 유배지에서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48세 되던 해에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면서, 윤선도는 당쟁으로 인한 번잡한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세상을 멀리하며 숨어 살 생각이 들어 해남으로 내려가 은거했다. 하기야 대대로 내려오는 사대부 출신에 막대한 재산가의 후손이겠다, 국가에서 주는 녹으로 생활을 했던 것도 아니니 평생 놀면서 살아도 풍족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금쇄동에 들어가 자연과 벗삼아 살아간다.
인조 14년(1637년), 왕이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윤선도는 삼별초처럼 의병을 조직하여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더욱 세상을 멀리하고자 식솔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한다. 아니 도망간다.
제주도로 향하던 중에 발견한 보길도는 그의 눈에 무릉도원과 같았던 모양이다. 제주도행을 포기하고 그는 보길도에 정착하여 그곳을 그의 정원으로 꾸민다. 그럴 즈음 삼별초까지 붕괴되면서 난이 평정되었고, 그 동안 고초를 겪은 왕에게 문안을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으로 유배되었지만 1년 뒤에 풀려나서는 다시 보길도로 들어와 중간에 유배생활 8년을 제외하고는 죽을 때까지 보길도에 기거한다.
윤선도는 보길도를 어떻게 꾸몄는가. 그는 섬 전체를 자신의 정원으로 생각했다. 아니 그의 왕국으로 꾸미고 싶었다. 그 섬 안에서는 그는 분명 제왕으로 군림했다. 스스로가 제왕이고자 했다. 저 중국의 중원을 생각하며 중국의 당,명 시대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의 고사를 빗대어 보길도의 온갖 자연물에 그 스스로가 이름을 붙이고는 보길도를 자신의 정원이자 왕국 그리고 무릉도원으로 생각했다. 시냇물에는 중국의 강 이름을, 바위와 정자에는 중국 명승지의 이름을 그대로 붙였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스스로를 제왕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그러한 생각은 <세연정(洗然亭)>과 <동천석실>만 보면 추정할 수 있다. 우선 <세연정>을 보자.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 중에서 가장 공을 들여 꾸민 곳으로 그 본래의 모습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자연적인 시냇물(윤선도를 이를 중국에 있는 ‘계류’라 이름지었다)을 돌둑으로 막아 연못(세연지 : 이것도 윤선도가 지은 이름이다)을 만들고 다시 그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인공연못(회수담 : 중국의 ‘회수’는 유명하다)을 만든 후에, 두 연못 사이에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정자(세연정)을 지어 주변의 다양한 경관을 즐길 수 있게 해놓은 곳이다. 두 연못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있는데 이를 윤선도는 섬으로 생각했다. 너럭바위, 동대와 서대...... 이곳에서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면 윤선도는 정자 안에서 보고 들으며 취하면 그만이었다.
정자 안은 어떤가. 정자이니 자른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변 경관이 잘 보이게 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연정>은 온돌까지 마련되어 있다. 바로 정자 한가운데 사방 2.5m 정도의 온돌 방바닥을 깔아 정자 아래 아궁이에서 불을 때도록 되어 있어 한겨울에도 이곳에서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윤선도의 후손이 기록했다는 <보길도지>를 읽어보자. 윤선도는 “일기가 화창하면 반드시 세연정으로 향하되 첩은 오찬을 갖추어 그 뒤를 따랐다. 정자에 당도하면 자제들은 시립하고 기희(妓姬 : 기생)들이 모시는 가운데 못 중앙에 작은 배를 띄웠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채색옷을 입혀 배를 일렁이며 돌게 하고 공이 지은 가사로 완만한 음절에 따라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당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게 하였으며 여러 명에게 동,서대에서 춤을 추게하고 혹은 옥소암(세연정에서 올려다보이는 산 중턱의 흰 바위)에서 춤을 추게도 했다.” 윤선도는 “하루도 음악이 없으면 성정을 수양하며 세간의 걱정을 잊을 수 없다”고 했는지 모르지만, <세연정>을 둘러보며 <보길도지>에 기록된 윤선도의 풍류를 생각하면 사치도 그런 사치가 없다.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자제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어야 하고, 온갖 기생들과 악사들은 춤과 풍악을 연주해야 했다. 어린 아이(물론 노비의 자제겠지만)까지 동원하여 연못 위에 조그만 배를 저어야 했고, 세연정 바로 옆이 아니라 500m도 더 떨어진 곳에서 춤을 추어야 했고, 겨울이면 아궁이에 군불까지 지펴야 했다. 누가? 윤선도가? 아니 윤선도의 주변 사람들, 특히 아랫것들 즉 노비들이다. 춤을 추던 기생이 바위에 미끄러져 물 속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윤선도는 파안대소를 했다던가. 부러 바위가 미끄럽게, 그래서 춤을 추려 발을 움직였다간 미끄러질 수밖에 없도록 해 놓았다던가. 취미도 이 정도면 할 말을 잊게 한다. 사치의 극치, 그것이 <세연정>의 모습이다.
특기할 것은 이곳 <세연정>에서 기생들과 악사들이 노래를 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곡이 바로 <어부사시사>라는 점이다. 물론 지은이는 윤선도가 분명하다. 그런데 흔히, 고기잡이 나간 어부가 노를 저으며 부르는 노래라고 알고 있지만, <어부사시사>는 ‘어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윤선도 혼자만의 노래이다. 그것도 직접 바다로 배를 띄워 풍랑을 맞으며 혹은 고기를 낚으며 부른 것이 아니라, <세연정>에 앉아 연못에 떠 있는 조그만 배를 보면서, 노를 저어 가는 동자를 보면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존의 <어부가>를 풀어놓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윤선도는 분명 탁월한 능력이 있음이 틀림없다.
<어부사시사>를 보자. 이 노래는 효종 4년(1653년), 윤선도가 67세 이후 전남 보길도의 부용동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하,추,동 4 계절을 각각 10수씩으로 읊은 총 40수로 된 연시조로서, 고려 때부터 전하여 온 <어부사(漁父詞)>를 명종 때 이현보가 <어부가(漁父歌)> 9장으로 개작하였는데, 이것을 다시 윤선도가 후렴구만 그대로 넣어 40수로 개작한 것이다. 원가(原歌)와 이현보의 개작가는 한문 고시를 그대로 따서 토를 붙인 것에 불과하지만, 고산은 난삽한 한시구(漢詩句)를 대부분 우리말로 바꾸었다.
3장 6구의 시조 형식에 후렴구를 첨가한 형태의 이 노래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표현 기교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 윤선도를 국문학상 단가의 제일인자로 꼽는 데에 전혀 손색이 없도록 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몇 수만 읽어보자.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 돋 다라라 돋 다라라 / 동호(東湖)를 도라보며 서호(西湖)로 가쟈스라 / 지국총(至匊怱) 지국총(至匊怱) 어사와(於思臥) / 압뫼히 디나가고 뒫뫼히 나아온다 (봄 3)>

<세연정> 두 연못을 윤선도는 동호와 서호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 분명 바다 한가운데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 마라 / 닫 드러라 닫 드러라 / 청약립(靑蒻笠)은 써잇노라 녹사의(綠蓑衣) 가져오냐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무심(無心)한 백구(白鷗)난 내 좃난가 제 좃난가 (여름 2)>

양반이 어디 직접 먹을 것을 챙기겠는가. 연잎에 밥을 싸두라고 했지만 정말 윤선도가 연잎에 싼 밥을 먹었을까. 이 노래를 부를 때 윤선도는 옆에서 부채질해 주는 기녀를 끼고 산해진미 옥소반에 술잔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볏짚이나 갈대로 엮어 만든 청약립과 녹사의를 입어보았겠는가. 그저 그렇게 노래만 할 뿐이다.

<옷우희 서리 오대 치운 줄을 모랄로다 / 닫 디여라 닫 디여라 / 조선(釣船)이 좁다 하나 부세(浮世)와 얻더하니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내일도 이리하고 모릐도 이리하자 (가을 9)>

서리가 내리고 눈보라가 친다해도 윤선도가 추위를 느꼈겠는가. 뜻뜻한 아랫목에 배를 갈고 엎드려 밖에서 들리고 보이는 풍악소리와 기녀들의 춤을 구경하면 그만이었다. 오늘 그랬으면서 내일도 그렇게 하고 모레도 그렇게 하자고? 아랫것들은 죽을 맛이다.

<간밤의 눈 갠 후(後)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 / 이어라 이어라 / 압희난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난 첨첩옥산(天疊玉山) /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 선곈(仙界)가 불곈(佛界)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겨울 4)>

눈내린 경치가 나쁠 리 있겠는가. 윤선도의 눈에는 만경유리로 보이겠지만 쓸고 닦아야 할 아랫것들은 어떻겠는가. 그 속에 앉아 있으니 신선들과 부처들이 사는 세상이라 생각했겠지만 바로 문 밖에는 노비들이 추위에 떠는 인간들의 세상인 것을.

분명하게 단언하건데, <어부사시사>에는 결코 ‘어부’의 모습이 없다. 있는 것은 윤선도의 사치요, 환상일 뿐이다.
<동천석실>에 가보면 윤선도의 환상이 어떠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평지에서 약 7-80도 경사진 곳을, 그것도 온갖 활엽수가 자란 가파른 길을 약 20분 정도 올라가면 산 9부 능선 쯤에 커다란 바위가 불쑥 튀어나와 있는데 이곳이 바로 <동천석실>이다. 말이 석실이지 동굴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정자이다. 윤선도는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들어가 서안을 놓고 앉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앉을 공간이 없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여기까지 올라와 글을 읽어야 했을까. 윤선도가 개발한 도르레(요즘의 케이블카와 같은 것)로 음식을 날라 점심을 먹었다고 하는데, 좋게 보자면 그만큼 과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고 하겠지만, 이렇게 가파른 곳에 올라야 했을 아랫것들을 생각하면 윤선도가 야속하기만 하다. 사랑방에서 글을 읽으면 공부가 안되어서였을까. 집에 공부방이 있는데도 독서실을 고집하는 요즘 아이들의 투정이 생각난다. 왜 이렇게 가파른 길을 올라와 여기서 글을 읽으려 했느냐 이 말이다.
그러나 <동천석실> 안에 들어가 앉아 부용동을 바라보라. 보길도의 중심, 부용동이 한 눈에 보이는 곳.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옥좌에 앉은 제왕을 떠받치는 곳, 그곳이 바로 <동천석실>이다. 윤선도는 <동천석실>에 앉아 글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마치 옥좌에 앉은 듯, 부용동을 지긋이 내려다보면서 마치 제왕이나 된 듯한 환상에 젖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온갖 자연물을 일러 ‘이렇게 명명하노라’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이 부용동의 온갖 자연물을 창조나 해내듯이 이름을 붙이며 섬 전체를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고는 <동천석실>에 앉아 그 풍광을 굽어보면서 마음껏 환상에 젖었던 것이다.
이제 낙서재를 보자. 보길도에서 제일 높은 산봉우리 <격자봉> 아래에 위치한 낙서재는 섬의 중심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옛모습을 알 길이 없어 아쉽기는 하지만 <보길도지>에 의하면 궁궐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금쇄동에 있는 몇 십간 집을 그대로 뜯어 옮겼다는데 수레에 실어 그리고 배에 실어 옮겼을 광경을 생각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나 윤선도에게는 궁궐을 짓는 역사였으니 그 일이 얼마나 힘이 든 것인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낙서재>에 앉아 정사를 논하고, 심신이 피곤하면 <세연정>에 나가 풍악을 울리고, 그리고 이따금 <동천석실>에 올라 문무백관들의 조아리는 머리들을 굽어보면서...... 윤선도는 그렇게 살았다.
윤선도의 그런 삶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 보길도 바로 북쪽에 있는 <노화도(蘆花島)>이다. 갈대 노에 꽃 화. 갈대꽃이 만발한 섬. 참 아름다운 이름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노비 노에 불 화, 노비들이 불을 지르고 도망간 섬, 그것이 바로 노화도(奴火島)이다.
윤선도가 식솔들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하다 보길도를 발견하고 들어왔다는 것은 앞에서 밝혔다. 당시 노화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을 동원하여 윤선도가 육지의 재물을 보길도로 옮겨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어가면서 보길도를 중심으로 노화도에도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고 전한다. 물론 어부들이었을 것이다. 윤선도가 살아 있을 당시에는 분명 보길도가 그곳 주변의 중심이었다. 그만큼 윤선도의 명성과 재산은 그 주변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윤선도가 죽고 난 후. 윤선도의 집에 속해있던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본가인 <낙서재>에 불을 지르고, <동천석실>과 그 주변의 도르레 장치를 무너뜨렸으며 <세연정>에도 불을 질렀다. 그리고 노비들은 가솔들을 데리고 이웃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 정착했다. 언제부터인지,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 섬을 <노화도(奴火島)>라 불렀다. 그들이 사는 섬을 무엇이라 부르건, 그들에게는 고기를 잡아 사는 것이 윤선도 집안의 노비보다 행복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고, 보길도가 점점 퇴락할 때에 노화도는 점점 번창했다. 그렇게 화려했던 보길도도 현재는 전남 완도군 노화읍(노화도)의 보길도이다.
그랬다. 윤선도의 세도와 재산에 억눌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던 노비들, 제왕의 말 한 마디에 생명이 오고갔던 시절을 뚫고 그들은 어느 개인의 왕국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세연정>과 <동천석실>이 너무 오래되어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말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전통 건축 양식을 모르고 하는 소리들이다. 천년을 버티고 있는 우리의 전통 건축을 보지 않는가. 노비들이 불지르고 달아났다는 말을 하기 부끄러워서였을까. <낙서재> 역시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은 노비들이 그만큼 철저하게 불을 지른 탓일 것이다. <세연정>과 <동천석실>은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기록을 토대로 1993년 복원되었지만, <낙서재>는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 이외에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복원하지 못한다고 한다. 윤선도가 자신의 왕국의 궁궐로 생각했을 것이니 그 규모는 분명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노화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 그들의 조상은 분명 노비들이었고, 그 노비들은 보길도 전체를 불지르고 건너왔다는 이야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윤선도와 보길도. 윤선도가 거닐었을 부용동 정원을 돌아보면서 윤선도에게 품었을 노비들의 한을 생각한다.
다시 한 번 <오우가>를 읽어보자.

<내 버디 며치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 동산(東山)에 달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 / 두어라 이 다섯밧긔 또 더하야 무엇하리>

오죽했으면 인격체도 아닌 자연물 다섯만을 벗으로 생각했을까. 윤선도는 진정 그 다섯을 벗으로 여겼을까. 아니 그 다섯은 윤선도를 벗으로 여겼을까. 윤선도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을까.
보길도에서 노화도를 바라보며, 그리고 <오우가>를 읽으며 분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윤선도는 퍽이나 외로웠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어부사시사>에는 ‘어부’가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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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안재오 | 작성시간 03.09.09 이럴 수가! 고산 윤선도가 그런 제왕같은 생활을 즐겼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 작성자muse | 작성시간 03.09.12 이런 것들이 소위 지식인들의 한계입니다. 영시에도 이런 것들이 있어요. 가뭄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농사를 망치게 되었는데도...즐거운 농촌에서 살자는...현실성이 너무 떨어진 문학은 제 생각에는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문학이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의 민중의 마음을 감싸주어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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