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오 정치 칼럼 : 계산과 추측(2) 2003. 10. 17 (금)
제목 : 대통령, 조만간 하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6일 “재신임 결정은 정책평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불리한 정치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라며 “이를 통해 정치인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이 엄격해지기를 원하며, 많은 정치인들도 이에 따라 도덕적 기준을 올려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에서 재인용) 필자 역시 이 말을 믿는다.
그는 순수하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감탄하고 환호했다. 열정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진심으로 그를 믿고 신뢰했다. 그가 "한다면, 한다'라는 경상도 사나이의 기세를 낡은 정치판에서 처음 보여주었을 때 젊은이들은 감동했다.
이는 월드컵 축구의 국민적 정열과 사랑에 필적할 만한 쾌거였다. 그 때 젊은이들의 생각은 "노무현은 더러운 승리자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자가 될 것" 이라는 기대감이었다. 나 역시 지금도 이를 믿는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부산에서 DJ 당의 간판을 걸고 출마했을 때, 그러나 예상대로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낙방했을 때 국민들 모두 같이 울었다. 그 직후에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가 결성되었다. 그 이후 노무현이 정치쇼에서 사심을 버린 대결단을 통해 막판 뒤집기를 성취했을 때, 우리 모두 놀랐다.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기득권마저 포기했을 때 그에게는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후 노무현이 보여준 정치 리더쉽 부재는 그가 이 전에 불러일으킨 신선한 도덕적 충격에 반비례하여 실망으로 번져갔다.
우선 무엇보다 필자가 거론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과 민주당 신주류가 구주류를 끝까지 배척하고 결국 그들과 결별하여 노무현의 국회세력이 급속히 약화된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후단협 내지 동교동계가 보여준 방해와 무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노태우 정권과 김대중 정권 모두 초기에는 여소 야대의 의회 상태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을 얻어 먹어면서도 야당의원 빼돌리기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국면 전환을 도모했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상하게도 여소 야대의 상태에서 야당의원 빼돌리기는 커녕 다시 여당을 분열시켜 더 작은 여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 그는 불순 세력을 제거하는 일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불관용과 비타협을 노무현의 큰 결점으로 본다. 왜냐면 정치란 미워하는 원수도 대의와 목적을 위해서는 용납하고 수용하는 미덕이 필요한 법이다.
이런 면에서 양 김씨는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이회창이나 노무현 등은 싫어하는 인간들은 결코 감싸 안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가는 인내와 성숙이 부족했다. 노무현은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할 줄 모르는 독립투사 같은 인물이다. 물론 그런 성격은 일제시대 같은 국가의 위기 시에는 극히 중요한 미덕이나 평상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정치판처럼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각각 정파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곳에서는 협상과 타협 그리고 양보와 인내 등이 필수적인 덕목이다. 정치, 이는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의 대결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서로 다투는 상대적인 권력게임이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이름은 아름답지만 그 국민이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 문제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한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모두 정글의 동물들처럼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다. 이는 다윈의 말처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집단과 세력간의 대결과 투쟁은 필연적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제로-섬 게임을 요구한다. 이런 상충하는 사회적 집단 간의 이익 투쟁 혹은 생존 투쟁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정치의 힘인 것이다.
NEIS 파동이나 물류대란 혹은 새만금 개발 논쟁에서 노무현은 이질적 집단 간의 대결을 조정하는 힘이 부족함을 여실히 증명했다.
즉 NEIS 파동의 경우 전교조와 교육부의 갈등, 화물 연대의 물류대란에서는 차주들과 화주들의 갈등 그리고 새만금의 경우 환경운동과 전라북도의 이해 상충 등을 노무현 정부는 조정하고 통합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국민통합 이는 말은 쉬워도 실천은 극히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 그가 애용하는 소위 "코드 정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코드 정치는 대학 동아리나 향우회 같은 동질적 집단에서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의 투쟁이라는 생존 세계에서 code는 작동하지 않는다.
집 한 채를 폭탄으로 파괴하기는 쉽다, 그러나 집 한 채를 지으려고 하면 설계도부터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설계에 따라서 벽돌 한 장부터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노무현에게 부족한 것은 이런 건축적 , 생산적 이성이다. 그에게는 불의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한방에 날려 버리는 정의감은 있다. 그는 심지어 대통령직까지 헌신짝처럼 던지는 용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도덕성이 정치적 역량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노무현과 그 동료들이 내세운 재벌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부패정치 척결이니 하는 구호 역시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는 정경유착과 관치 금융의 악습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 역시 현대 기업과 DJ 측근들의 커넥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뿌리뽑기 어려운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상세히 토론하기로 하자.
이처럼 국민들은 노무현의 도덕적 감정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왕에 그가 제기한 정치도덕의 정립을 위해 선거 공영제나 부정 정치자금 방지 제도를 마련해 주고 조용히 하야하는 길이다.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제목 : 대통령, 조만간 하야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16일 “재신임 결정은 정책평가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니고, 불리한 정치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라며 “이를 통해 정치인에게 적용되는 도덕적 기준이 엄격해지기를 원하며, 많은 정치인들도 이에 따라 도덕적 기준을 올려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에서 재인용) 필자 역시 이 말을 믿는다.
그는 순수하다. 그래서 지난 대선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감탄하고 환호했다. 열정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진심으로 그를 믿고 신뢰했다. 그가 "한다면, 한다'라는 경상도 사나이의 기세를 낡은 정치판에서 처음 보여주었을 때 젊은이들은 감동했다.
이는 월드컵 축구의 국민적 정열과 사랑에 필적할 만한 쾌거였다. 그 때 젊은이들의 생각은 "노무현은 더러운 승리자보다는 차라리 깨끗한 패배자가 될 것" 이라는 기대감이었다. 나 역시 지금도 이를 믿는다.
그가 혈혈단신으로 부산에서 DJ 당의 간판을 걸고 출마했을 때, 그러나 예상대로 지역감정의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낙방했을 때 국민들 모두 같이 울었다. 그 직후에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가 결성되었다. 그 이후 노무현이 정치쇼에서 사심을 버린 대결단을 통해 막판 뒤집기를 성취했을 때, 우리 모두 놀랐다.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기득권마저 포기했을 때 그에게는 승리의 여신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 후 노무현이 보여준 정치 리더쉽 부재는 그가 이 전에 불러일으킨 신선한 도덕적 충격에 반비례하여 실망으로 번져갔다.
우선 무엇보다 필자가 거론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과 민주당 신주류가 구주류를 끝까지 배척하고 결국 그들과 결별하여 노무현의 국회세력이 급속히 약화된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후단협 내지 동교동계가 보여준 방해와 무시는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노태우 정권과 김대중 정권 모두 초기에는 여소 야대의 의회 상태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욕을 얻어 먹어면서도 야당의원 빼돌리기 등을 통해 인위적으로 국면 전환을 도모했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상하게도 여소 야대의 상태에서 야당의원 빼돌리기는 커녕 다시 여당을 분열시켜 더 작은 여당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해 그는 불순 세력을 제거하는 일을 묵인하거나 방조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불관용과 비타협을 노무현의 큰 결점으로 본다. 왜냐면 정치란 미워하는 원수도 대의와 목적을 위해서는 용납하고 수용하는 미덕이 필요한 법이다.
이런 면에서 양 김씨는 모범을 보였다.
그런데 이회창이나 노무현 등은 싫어하는 인간들은 결코 감싸 안고 자기편으로 만들어 가는 인내와 성숙이 부족했다. 노무현은 결코 타협이나 양보를 할 줄 모르는 독립투사 같은 인물이다. 물론 그런 성격은 일제시대 같은 국가의 위기 시에는 극히 중요한 미덕이나 평상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정치판처럼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각각 정파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곳에서는 협상과 타협 그리고 양보와 인내 등이 필수적인 덕목이다. 정치, 이는 절대적 선과 절대적 악의 대결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을 서로 다투는 상대적인 권력게임이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니 참여정부니 하는 이름은 아름답지만 그 국민이란 사람들이 각자 생각이 다르고, 더 문제는 그들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한다는 점이다. 국민들은 모두 정글의 동물들처럼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하고 있다. 이는 다윈의 말처럼 적자생존이라는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집단과 세력간의 대결과 투쟁은 필연적이다.
자본주의 경제는 제로-섬 게임을 요구한다. 이런 상충하는 사회적 집단 간의 이익 투쟁 혹은 생존 투쟁을 조정하는 것이 바로 국가와 정치의 힘인 것이다.
NEIS 파동이나 물류대란 혹은 새만금 개발 논쟁에서 노무현은 이질적 집단 간의 대결을 조정하는 힘이 부족함을 여실히 증명했다.
즉 NEIS 파동의 경우 전교조와 교육부의 갈등, 화물 연대의 물류대란에서는 차주들과 화주들의 갈등 그리고 새만금의 경우 환경운동과 전라북도의 이해 상충 등을 노무현 정부는 조정하고 통합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국민통합 이는 말은 쉬워도 실천은 극히 어려운 것이다.
이런 경우 그가 애용하는 소위 "코드 정치"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코드 정치는 대학 동아리나 향우회 같은 동질적 집단에서는 큰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권력과 이익의 투쟁이라는 생존 세계에서 code는 작동하지 않는다.
집 한 채를 폭탄으로 파괴하기는 쉽다, 그러나 집 한 채를 지으려고 하면 설계도부터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설계에 따라서 벽돌 한 장부터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 된다. 노무현에게 부족한 것은 이런 건축적 , 생산적 이성이다. 그에게는 불의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한방에 날려 버리는 정의감은 있다. 그는 심지어 대통령직까지 헌신짝처럼 던지는 용기가 있다. 그러나 이런 도덕성이 정치적 역량의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리고 노무현과 그 동료들이 내세운 재벌개혁이니 정치개혁이니 부패정치 척결이니 하는 구호 역시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부정부패 없는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는 정경유착과 관치 금융의 악습을 제거해야 하는데 이 역시 현대 기업과 DJ 측근들의 커넥션이 보여주는 것처럼 뿌리뽑기 어려운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상세히 토론하기로 하자.
이처럼 국민들은 노무현의 도덕적 감정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기왕에 그가 제기한 정치도덕의 정립을 위해 선거 공영제나 부정 정치자금 방지 제도를 마련해 주고 조용히 하야하는 길이다. 대통령의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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