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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스케치]090504-12 실크로드여행 2편/감숙성 돈황(양관&막고굴)

작성자구름/최상운|작성시간09.05.18|조회수94 목록 댓글 1

 우루무치에서 야간 침대 열차를 타고 밤새도록(약11시간) 고비 사막을 달려 돈황의 관문 유원역에 도착후 마중 나온

돈황가이드와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 관광 버스 편으로 2시간 여동안 고비사막을  달려 돈황에 도착 했다.

우루무치에서 유원으로 오는 도중 바람이 너무 심해서 예정 보다 1시간 정도 연착했다.

유원에서 돈황으로 가는 길은 포장한지 오래되고 20여년간 보수를 하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서도 전신 마사지를 받는

느낌이며 온몸에 힘이 들어가 긴장의 연속이다. 가는 길에 황사를 동반한 회오리 바람도 만나고 신기루도 볼수있었다.

 

돈황은 깐수성에 있으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답니다.

중국의 문물이 돈황을 거쳐 서역으로 나가고 서역의 문화가 돈황을 거쳐 중국으로 들어왔습니다.

돈황이라는 말 자체가 크게 번성하다는 뜻이며  옛부터 깐수성, 칭하이성,신장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다양한 문명이 뒤섞여 발전하여 '동서문명의 보물고'니 '사막의 대회랑' 이라는 호칭을 가지기도 합니다.

 

기원전 2세기 월지국을 가기 위해 군사를 이끌던 장건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메게 됩니다.

이때 병사 중 하나가 물을 발견하고 군대는 물가에 주둔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여기를 크게 흥한다는 의미의 돈황으로 부르게 되었다는군요. 이후 河西 4군의 하나인 돈황군을 설치하게 됩니다.

5호 16국 시대에는 전량(前凉)의 영토가 되었고 곧 전량의 도읍이 됩니다.

5세기 북위를 거쳐 당나라 초기에 전성기를 누리지만 이후 토번(티벳)에게 점령되고, 다시 11세기에 서하(西夏)가 190년간

통치하게 됩니다.

서하를 멸망시킨 원대에는 沙州로, 명대에는 사주위로, 청대에는 다시 돈황현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20만명에 달하는 주민 대부분은 한족이고 회족과 위그루족을 비롯한 소수민족은 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사막이면서도 곤륜산맥이 물이 당하를 통해 시내를 관통하여 목화와 과일 농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실제로 돈황은 깐수성 최대의 목화,과일 산지라고 합니다.   

 

 얼마동안을 달렸을까 나타간 휴게소엔 간이 화장실과 자판에 놓인 미지근한 생수와 몇몇 가지 식품들....

 양관 고성 /실크로드의 죽음의 사막"타클라마칸' 남쪽으로 가는 길의 시작 점이며 이곳을 통과 해야 서역과 중국본토로

왕래 할수있는 절차를 밟는 통관증이 주어졌다.

 

  우린 양관 고성 안에있는 박물관도 둘러보고 전동카를 타고 서역 통관 관제소도 둘러 보았다.

 

 양관을 지키던 군 초소...(옛날것이 아니고 재현 해둔 세트장이다)

 

 

 

 

 서역으로 떠나는 친구에게 만류하면서 글을 남겼다는 당대의 유명한 시인...

 

 

 

 옛날 모습 그데로 다소 허물어진 봉화탑...이곳은 강우량이 적어서 흙으로축조된 봉화탑이지만 그 모습이 1000년이 넘어도

형태를 유지...

 

 

 서역으로 가던 엣길 자리....

 

 

 

 

 

 

 

 백마탑...5ㅔ기에 서역 구지왕국 쿠무라습이 불교를 돈황지역에 전하면서 쿠우라습이 타던 신복 같았던 백마를 기념 해서

 만든 탑 /말이 유명하기 보다 쿠무라습이 유명 해서 이곳을 보호하고 있단다.

 한나라 성벽...토성이며 규모가 제법 크서나 오랜 세월 풍파에 모두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다.

 사막속 돈황 시내의 모습....연중 강우량이 20-40미리 정도이나 근처 산맥들의 만연설이 녹아 내린 물로 저수지를 만들고

식수와 농사물로 이용하고있다.

 

 

 돈황 사주 야시장...각종 먹거리와 기념품들이 푸짐 했다.

 

 

 

 불교의 요람 막고굴...

막고산이라 불리는 명사산 동쪽끝 절벽에 막고굴이 있다. 이곳은 천불동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에 있는

여러 천불동 중에서도  단연 첫손가락을 꼽아주는 곳이 바로 돈황 막고굴이랍니다.

 

막고굴은 4세기 중협 전진시대에 낙준(樂俊)이라는 승려가 만들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명사산과 막고굴의 맞은 편의 삼위 산에 천만불이 춤을 추는 모습이 보여 그곳에 불상을 모셔놓고 굴을 파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이후 원대까지 무려 1천년간 각 왕조에 걸쳐 계속해서 건설합니다.

지금까지 남은 석굴은 550개가 남아 있으며 474개의 굴에 불상과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막고굴은 동서문명교류의 중심이었던 돈황에 서역문명과 조화된 불교예술이 가장 화려하게 꽃을 핀 세계적인 불교유적이며

총면적이 무려 45000평방키로미터에 이르며 1961년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에 지정되고

1987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막고굴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한 형태의 소상과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소상과 벽화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돈황학'이라는 학문까지 탄생시킨 이른바 '돈황문서'입니다.  

한문부터 산스크리트어,위그루어 몽골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문서가 모두 3만점에 이릅니다. 

17번 석불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문서에는 프랑스인이 탈취해간 신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있었습니다. 

이 문서들의 상당부분은 영국의 스타인을 비롯해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오나티 미국의 워너, 러시아의

올덴부르그 같은 자들에 의해 약탈되어 그들의 모국으로 보내집니다. 

 이들은 또 많은 석굴을 파괴하며 벽화를 뜯어내어 상자에 담아가는 만행도 저지릅니다. 

그래서 막고굴은 문명의 약탈 파괴 현장이기도 합니다.

 

벽화보존 관계로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었으며 해설자의 설명을 들으며 다양한 석불을 둘러보고

설명을 듣으며 1000년도 넘의 벽화의 세밀함과 화려함에 다시 한번 놀랍니다.

막고굴의 벽화는 한줄로 배열하면 높이가 1m에 길이가 45km 정도의 화랑겔러리를 구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위 누각은 막고굴을 대표하는 누각으로 가장 큰 미륵불좌상이 있는 96호굴입니다.

이 불상은 측천무후원년인 695년 영은선사와 음거사가 만든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당시 황제가 여성인 탓에

불상도 여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엄청난 크기의 불상을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측천무후라.... 중국유일의 여황제. 남편과 아들까지 죽이고 황제에 오른 잔혹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7세기 중국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자가 황제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결국 권력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공포정치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貞觀)의 치(治)’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武周)의 치(治)’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 재위 712∼756) 때의 ‘개원(開元)의 치(治)’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함께 했던 일행분들...좌측 맨 아래 대륜 중학교 21년 선배 곽병화 교수님(고려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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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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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병기(02-427-8900) | 작성시간 09.05.19 잘 보았소...나도 중국은 좀 가보았는디...여기는...그 대가 부럽소...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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