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산은 지리산
그즈음 산이 나에게 다가왔다. 어렸을 때부터 내 곁에는 배경처럼 산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산을 벗어나 언제나 낯선
세상을 갈망했다. 그런 나에게 산이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 건 내 안에 오랫동안 웅크리고 있던 어떤 갈증 때문이었다.
문학과 철학, 그때까지 내 삶을 지탱해주던 것들로는 해소되지 않는 갈증. 그 갈증은 나를 나이게 했던 모든 것을 넘어서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원하는 것에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시작은 지리산이었다. 너무 유명해서 누구라도 한 번은 들어봤을 그 이름. 산을 정말 몰랐기에 첫 산행지로 선택한 그 이름.
지리산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했다. TV 방송 시작과 끝 애국가 영상에서나 보아 온 장관이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펼쳐졌다.
그 장면을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말 그대로 산이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어느새 나는 지리산을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찾고 있었다.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경로와 방법과 목적과
이유로 지리산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지리산을 다녀온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다니.
그중 거듭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화대종주’ 였다. 화엄사에서 대원사까지, 지리산 서쪽 끝자락에서 동쪽 끝자락까지,
45킬로미터에 이르는 주능선 위 봉우리들을 연달아 오르내리는 길이라고 했다. 출발지와 도착지 두 사찰의 앞 글자를 딴
이 화대종주를 사람들은 지리산 등산의 정석으로 꼽았다. 높은 능선을 타고 넘는 코스라 중간에 포기해도 내려오는 것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첫 산행지로 지리산을 꼽은 것도 무모했는데 하필 화대종주가 눈에 들어온 것이었다.
지리산 종주 후기들을 속독하며 몇몇 인터넷 산악회에 접속했다. 중장년층 남성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커뮤니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싸이월드 클럽에서 ‘일촌 산악회-7585 정상에 선 사람들’ 을 발견했다. 이름처럼 1975년에서
1985년 사이의 출생자만 가입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나름 젊은 산악회인 듯했다.
회원 가입을 하고 사이트를 둘러봤다. 마침 지리산 화대종주에 함께 할 산행 멤버를 모집한다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글을 올린 사람에게 조심스럽게 쪽지를 보냈다.
“혹시 함께 할 수 있을까요?”
즉각 답장이 왔다. “반갑습니다. 산행하신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지리산은 몇 번째인지?”
자판 위 나의 손은 분주했다. 키보드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지우고 입력했다 지우길 반복했다. 뭐라 대답해야
이 사람들과 같이 지리산에 갈 수 있을까? 2년? 두 번째?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자. “저, 산은 처음인데요….”
답장을 기다리며 심장은 마구 뛰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고백하고 그의 대답을 기다릴 때처럼. 과연 나는 지리산에
갈 수 있을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지리산은 등산을 많이 해 본 사람에게도 무척 혹독한 산이거든요. 다음 기회에
뵐게요.”
순간 철렁했다. 도대체 지리산이 뭐라고? 의자에 반쯤 누운 채 모니터 속 지리산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계속 봐도 아름다웠다.
보면 볼수록 가고 싶어졌다. 어떻게든 가고 싶었다.
까짓것 혼자라도 가 보자! 그렇게 작정하고 며칠동안 지리산 산행 정보를 스크랩했다. 일단 구례구역으로 가야 한다는 것,
구례구역에 내려서는 등산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택시 합승을 한다는 것,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 7킬로미터는 꼬박 가파른
오르막이라는 것, 노고단에 가면 식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노고단에서 정상인 천왕봉까지는 삼도봉, 토끼봉, 명선봉, 형제봉 등
열 개가 넘는 고산 준봉을 오르내려야 한다는 것…. 정보가 하나 둘 모이자 꽉 막혀 시야를 가리고 있던 구름이 조금씩 걷히는 것
같았다.
이어 장비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배낭. 학창 시절에 야영할 때 쓰던 르까프 50리터 배낭이 생각났다. 배낭은 패스. 침낭은
아쉬운 대로 대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인도 배낭여행 중 썼던 녀석이 있었다. 침낭도 패스. 산에서 꼭 캠핑용 식기를 써야 할까?
부엌에서 스테인리스 냄비와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나왔다. 이렇게 저렇게 챙겨서 늘어놓고 보니 제법 산에 가는 냄새가 났다.
그런데 너무 무겁다. 아직 먹을 것은 챙기지도 않았는데. 3분 카레, 햇반, 스팸…,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해 먹지? 휴대용 버너도
없다.
아웃도어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휴대용 버너를 검색하던 중에 가격 대비 추천 장비 게시글을 보러 오랜만에 다시
‘일촌 산악회-7585 정상에 선 사람들’ 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틀 전에 쪽지 하나가 와 있었다.
“저기, 한 자리가 갑자기 비어서요. 혹시 함께 하시겠어요?”
과연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물론이죠! 아직 갈 수 있을까요?” 바로 답장이 왔다.
“내일 저녁 10시 용산역으로 오세요. 침낭하고 매트리스 반드시 챙겨 오시고요. 등산화는 당연히 신고 오겠죠? 공동 준비물로
참치 캔 여섯 개, 초코바 열두 개 부탁드릴게요. 연락처는…”
이튿날 밤 11시, 무궁화호를 타고 용산역을 출발해 새벽 3시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그 시각 구례구역에 내린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형형색색 등산복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사라졌다. 우리도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탔다.
택시는 이슥한 2차선 국도를 달리더니 구절양장 아스팔트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번 지리산 일행은 나까지 남자 둘에 여자 둘.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바로 지난주에도 함께
산에 다녀온 분위기였다. 연신 산 이야기만 나눴다. 군살 없이 단단한 몸집과 갖춰 입은 옷매무새의 세 사람을 보니 그동안 여간
산에 다닌 게 아닌 듯 싶었다.
열차 안에서는 다들 잠을 자느라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택시에서 내려 이런저런 채비를 마치고서야 찬바람 속에 서서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했다. ‘7585 산악회’ 답게 규칙이라도 되는 듯 각자 출생연도를 먼저 밝히고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지금
사는 곳을 알려줬다.
“저는 75년생 박 。。이라고 하고요. 안산에 삽니다.” “저는 78년생 남 。。이고 사는 곳은 평택이예요.”
“저는 80년생 정 。。입니다. 아차산 근처 오시면 연락 주세요” 마지막으로 85년생 막내인 내 차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촌에 사는 장보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들을 박, 남, 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르까프 50리터 배낭에 일행에게서 건네받은 코펠 꾸러미와 라면 열 봉지, 부탄가스 두 개를 집어넣고 나니 새벽 4시, 나 또한
하얀 헤드램프 빛을 받으며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가던 남이 돌아서서 나에게 말했다. 이번 여정은 화대종주가 아니라 성백종주라고.
“성삼재에서 백무동까지를 말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지리산을 종주해.” 남은 등산 초보인 나를 고려해 산행
들머리를 당초의 화엄사가 아닌 차가 오르내리는 성삼재로 변경했다고 했다. 화엄사 구간과 비교해 성삼재 구간이 4킬로미터나
더 짧고 백무동이 대원사보다 대중교통편이 더 좋다는 말도 덧붙였다.
뒤따르던 내 얼굴은 사색에서 화색이 됐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벌써부터 종아리는 딱딱하게 굳고 추리닝은 땀으로
흥건해졌으니까. 좁은 등산로를 행군하듯 이어 오르던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새벽 5시, 우리는 첫 번째 목적지 노고단에
도착했다. 다행히 그날의 태양보다 우리가 먼저 노고단에 올랐다.
지금도 기억한다. 대피소 앞 급수대에서 물통을 가득 채우고 뒤돌아서던 그 순간을. 하얀 구름바다 건너 지평선으로부터 오늘의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작은 열 덩어리는 점점 커지더니 하얀 구름바다를 이내 홍해로 만들었다. 이토록 신비로운 풍경을, 이토록
환상적인 비경을, 이토록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짠 하고 보여주다니. 나는 굳은 듯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를 포함한 그 곳의 모두가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일출의 진하고 아련한 감동을 안고 우리는 다시 산길을 올랐다. 연무는 자취를 감췄다. 태양은 중천에 떠 있다. 임걸령과 노루목을
지나 천왕봉을 향해 가열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주로에서 벗어나 반야봉으로 향했다. 노고단, 천왕봉과 함께 지리산
3대 봉우리를 이루는 반야봉은 주능선에서 떨어져 외따로 솟아 있다. 대다수 종주꾼들은 반야봉을 지나치지만 우리는 곡진하게
반야봉까지 챙겼다.
삼도봉과 토끼봉을 꾸역꾸역 넘어 오후 4시쯤 연하천에 도착했다. 해는 아직 더 남아 있었지만 무리하지 않고 이곳에 여장을
풀기로 했다. 노고단에서 연하천까지는 약 11킬로미터, 천천히 걸어도 네다섯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열 시간
가까이 걸렸다니.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느리게 걸은 건지, 그 길 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제대로 된 등산은
난생처음인 까닭에 아무 기준이 없어서 그게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으니 말이다. 그런 나에게 아무
내색도, 타박도, 재촉도 하지 않고 함께 걸어주고 웃어준 박, 남, 정에게 이제 와서지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이미 만원인 대피소 대신 그 앞 공터 한구석에 침낭 네 개를 나란히 깔고 파김치가 된 몸을 대 자로 던졌다. 저녁 메뉴는
참치김치찌개.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밥그릇에 고개를 쳐박고 부지런히 주린 배를 채우고 있는데 정이 갑자기 램프를
끄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하늘 좀 봐.”
고개를 뒤로 젖히자 허공 속에서 하얀 별들이 수런거리듯 빼곡하게 깜빡였다. 이토록 많은 별은 도대체 얼마만인지. 온 힘을
다해 반짝이고 있는 별들도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더 눈부셨던 건 짙은 밤하늘이었다. 이토록 칠흑같이 까만 밤하늘은 또 도대체
얼마만인지.
깜깜한 산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전하고 싶은 말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전파가 터지지 않으니
핸드폰은 무용지물. 저녁 8시도 되지 않았는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의 모두가 취침에 들어갔다. 나 또한 꾸물거리며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계획에도 없었던 생애 첫 비박이었다.*
* 2013년 1월 1일부터 지리산을 비롯한 전국 국립공원은 등산객의 안전을 지키고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입산 시간 지정제’ 를 도입했다. 사전에 예약한 사람에 한해 대피소 숙박만이 가능해져 이제 비박은 불가하다.
종주 이튿날은 더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몇 끼를 해결한 뒤에 짐이 한결 가벼워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등 뒤로 겹겹이 포개진 산줄기를 바라보니 우리가 얼마나 깊고 깊은 산중에 들어와 있는지 실감이 났다. 이제는 쉽게 되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이라 오직 앞만 보며 나아갈 뿐. 탁 트인 능선과 어두운 안부(鞍部), 거친 비탈과 시원한 나무 그늘을 벌써 몇 겹이나 지나쳤다. 박과 남이 선두에, 정과 내가 후미에 섰지만 간격은 얼마 유지되지 못했다. 저마다 체력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고 감상 포인트가 다르기에 무리는 자주 모였다가 흩어졌다. 정과 나는 쉽게 지쳤고 이내 쳐졌다. 그리고 그 사이 해가 저물었다. 종주 둘째 날 목적지였던 장터목까지는 3킬로미터가 더 남았지만 우리는 세석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새벽 5시까지는 천왕봉에 올라야만 한다고 했다. ‘1시에 기상하자’ 고 각자 알람을 맞춘 뒤 이른 취침에 들었다. 광활한 헬기장 위로 밤새 광풍이 불었지만 단 한 번 깨지 않았다. 그러다 눈을 떴을 때는 3시,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잠에 빠진 건 일행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늦었지만 가보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역시 계획에도 없었던 야간 산행으로 종주 셋째 날을 시작했다. 셋째 날이자 마지막날, 정상에 오르는 날, 천왕봉 일출을 보는 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 네 개의 헤드램프는 천왕봉을 향해 움직였다. ‘일출을 보겠다’ 는 네 개의 일념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발소리만이 고요한 산길을 메웠다. 천왕봉 정상에 멋지게 서서 저 멀리서 솟아오르는 그날의 태양과 조우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상상하며 발길도 재촉하고 노래도 부르고 잠도 떨치며 부단히 밤을 뚫었다. 그러나 서서히 대지를 밝히는 빛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고대했던 천왕봉 일출은 결국 실패했다. 3대가 덕을 쌓아도 볼까 말까 한 천왕봉 일출이라는데, 우리는 늦잠을 잤고 지각을 했다. 천하의 지리산이 첫술에 그리 호락호락할 리가. 그런데 왜 그런지 아쉽지 않았다. 다시 오면 되니까. 다음이 있으니까. 그때는 지금보다 더 씩씩해져 있겠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천왕봉으로 향하는 걸음은 그래서 오히려 가벼웠다. 눈앞으로 펼쳐진 한 줄기 산길을 오르고 올랐다. 그러다 힘들 때는 뒤돌아봤다. 사흘 동안 우리가 걸어온 능선이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관문 통천문을 지나 이윽고 천왕봉 정상에 섰을 때는 오전 8시.
‘한국인의 기사잉 여기서 발원되다.’
해발 1915미터 지리산 정상석 앞에 나란히 서서 산악회 깃발을 펄럭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제 내려갈 길이 남았다. 천왕봉에서 다시 장터목을 거쳐 백무동까지 가는 길은 장장 7킬로미터.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긴장이
풀린 탓인지 고관절이며 허벅지며 첫날부터 근육통으로 욱신대던 곳들이 그제야 비로소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절반쯤
내려와서는 무릎까지 말썽을 부려 끝내 양 다리에 손수건을 동여매고 옆으로 걷고 뒤로 걸어 겨우겨우 하산했다.
“모두 수고 많았어. 덕분에 이번 지리산도 아주 좋았다. 다 같이 건배!”
박의 멘트와 함께 시원한 막걸리를 꿀꺽꿀꺽 들이켜며 우리는 2박 3일 지리산 성백종주 무사 완주를 자축했다. 술잔을 연신
부딪치며 왁자한 웃음을 나눴다. 산에서는 미처 전하지 못했던 서운함과 속상함도 울며불며 토로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취한 채 우리는 서울로 돌아가는 막차의 맨 뒷좌석에 일렬로 몸을 실었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곯아떨어졌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헤드램프를 켜고 배낭 속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스물다섯, 나는 처음으로 지리산을 종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