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Georg Solti - franciscopaik 이 뽑은 세기의 지휘자

작성자sangyoung|작성시간14.12.22|조회수81 목록 댓글 0



                                                                                    



                     



                      


Georg Solti



게오르그 솔티는 1912년 헝거리 부다페스트에서 Gyorgy Stern이란 첫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1차 세계대전후 독일에서 헝거리로 이주한 유대인으로 헝거리에서 

시민권을 얻기 위해 이름을 Stern에서 헝거리 작은 마을 Solt에서 따온 Solti로 바꾼다.


엄격한 유대교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그는 6세때부터 피아노를 배운다.

12살에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에리히 크라이버에 베토벤 심포니 5번의 

연주를 듣고 감동을 받아 지휘하기로 결심을 한다. 13세때 부터그는 부모의 음악공부의 지원 

능력이 없자 스스로 피아노 레슨을 주고 음악공부를 이어간다. 

당시 리스트 음악원에는 벨라 바르톡,도흐나니, 코다이 등 당대에 최상의 교수진으로

꾸려져 그의 음악적성장에 큰도움을 받는다.1930년 학교를 마친 솔티는 헝거리국립오페라에

오페라 가수나 발레연습 반주를 담당 하는코레페티투어로 취업한다.


exterior shot of ornate nineteenth century building               

Franz Liszt Academy Budapest


1932년 독일 칼스루헤 요셉 크립스의 어시스턴트로 들어 간다.그후에는 에리히 클라이버,

오토 클렘펠러의 밑에서 일을하고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1937년 잘츠부르그 축제에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한다. 그는 대가들과의 공동작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고한다.

특히 토스카니니는 그의 음악생애 처음으로 가장 큰 음악적영감을 느끼게 한 

지휘자라고 한다.1938년 나치의 유대인 차별화 법이 통과되자 영국 런던으로 이주를 한다.


런던에서 런던필과 코벤트가든 발레공연에 반주를 지휘하는 등의 활약을 하다 토스카니니가

있는 스위스 루체른으로 간다. 토스카니니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로 갈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여의치않아 그는 보칼 레슨 등으로 어려운 생활 속에 1942년에 쥬네브 콩쿨에 피아노로 참가 

우승을 해 피아노 연주활동도 하고 음악인으로 점차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전쟁중 1943년에 아버지는 부다페스트 병원에서 사망을 해 아버지를 끝내 보지못하고 

어머니와 누이만 전후에 스위스에서 재회한다. 


1946년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발탁된 솔티는 나치 시대에 금지됬던 

힌데미트의화가 마티스를 초연하는등 그의 음악생활에 지휘자로써 기반을 다진다.

물론 그가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가장 큰 이유는 많은 독일인 지휘자들이 전범에 몰려 

연주금지를 당하던 시기였고 토스카니니와 에리히 클라이버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1947: Georg Solti In Munich



명 피아니스트였던 그는 1947년 데카와 피아니스트로 계약을 맺고 녹음 활동도 병행한다.

1952년까지 뮌헨에 있던 그는 1951년에 잘츠부르그 축제에 처음 참가하고  다음해 

프랑크푸르트 오퍼의 음악감독이 되어 1961년까지 재임한다. 알반 베르그 "룰루"를

독일 초연하고 1954년 여름 라비니아 축제에서 훗날 장기간 지휘를 맡은 시카고 심포니를

처음 조우한다. 1958년 데카와 빈필의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를 스튜디오 녹음을 지휘한

솔티는 드디어 지휘자로써 국제적 명성을 높여 나간다.

1959년 "장미의 기사"를 지휘하여 런던 코벤트 가든 로열 오페라에 데뷔를 하고 1961년

그 오페라에 음악감독의로 취임해 1971년까지 재임해 영국의 오페라 발전에 공을 인정 받고

시민권과 "경(sir)"작위까지 받는다.


1969년 솔티는 장 마르티농의 뒤를 이어 시카고 심포니의 음악감독에 취임한다.

그의 음악인생에 가장 정점의 시기가 된 이 악단과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까지 수석 객원지휘자로 역할을 맡은 시카고 심포니는 두 지휘자의 

의욕적인 개혁과 과감한 구조조정을 통한 새대교체를 이루어 내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낸다. 


이는 솔티가 어려서 부터 유대인으로 태어나 자신의 모든 역경들을 스스로

해결 해야하는 독립심과 18살의 나이로 오페라단의 반주자인 코레페티투어로 일하면서

오페라나 오케스트라의 생리 등 모든 크고 작은 제반 상황들을 어린 나이부터 몸소 체험하고

12살의 나이에 바르톡,코다이,도흐나니 등 세계적인 음악인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환경적인 배경과 오토 클렘펠러,에리히 클라이버, 토스카니니 등 세기의 지휘자 밑에서

어시스턴트 생활을 오랜 시간할 수 있었던 행운, 2차 세계대전을 가장 뼈속 깊은 절망의

상황에서 격고 이를 통해 인간의 내면 세계에서 부터 다시 성찰한 철학적 사고의 적립,

이 모든 것들이 규합되어 그가 큰 지휘자의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의 오케스트라 조련 과정들을 지켜 보면 가장 이상적인 연습 방법을 택하고 있다.

우선 그의 포디움 등장 자체에서 카리스마로 채워진다.  단원들의 귀중한 시간을

단 1초도 쓸대 없이 허비하지 않고 그의 머리속에 그려진 꽉 찬 스케줄대로 연습을 한다.

필요할때를 제외하고는 연습때도 오케스트라를 정지 시키는 일 없이 우렁찬 목소리로

필요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몰아부치고 긴장감을 연주때 처럼 유지 시킨다.

-연주는 연습의 연장선상에 있을때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있다. -


그는 세기의 지휘자들과 몸소 부딧치며 체험하고 배운 오케스트라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세밀한 부분까지 파악 하고 가장 이상적인 연습 방법들을 체계화 해서 시카고 심포니에

적용함으로써 이 악단이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내 세계 최상의 오케스트라라는 명성을

얻게 만든다. 그가 만든 시카고 심포니의 소리는 현악기군의 소리를 부드러운 쪽보다는

강하고 힘있는쪽으로 목관악기군의 소리를 오케스트라의 칼라에 핵에 두고 금관악기군을

최대한도의 폭으로 넓혀 놓고 솔로크럼펫의 칼라를 변화를 자주 주어 목관 섹션 뿐만아니라

솔로파트의 금관에게도 오케스트라 색채의 정점을 맡김으로써 이전의 오케스트라들에게

볼수 없는 단단함과 웅장하고 날카롭고 화려한 특유의 시카고 심포니 소리를 이룩해 낸다.



Adolph Herseth and Sir Georg Solti

Adolph Herseth and Sir Georg Solti 금관파트의 정점을 맡아 세계 최상의 금관이라는

명성을 이룩해 낸 전설적인 시카고 심포니의 트럼펫 수석주자와 솔티.



그의 음악은 철저하게 작곡자가 쓴 악보 그대로를 존중해 연주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베토벤이나 브라함스 교향곡에서 현대의 일반화된 반복의 생략을 악보 그대로 연주를 
다던지 차이콥스키 심포니 6번 비창에서의 1악장중 클라리넷의 빅솔로를 파곳이 저음부에 
피아니시모로 받아 연주하기가 힘든 부분에서 베이스 클라리넷으로 바꾸어 거의 모든 
교향악단들이 연주를 하는데 파곳의 연주를 고집한다던지 하는 세밀한 부분까지 작곡자의 
의도를 존중해 연주를 한다.
철저한 분석에 의해 그가 이룩해 낸 많은 작곡가들의 작품은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극대화
시키고 템포 역시 다른 지휘자들 보다 빠르게 연주를 한다. 그의 성격과도 같은 그의
지휘 모습을 뒤에서 보면 검객의 춤을 보는듯하다. 클라이막스에서 오케스트라를 몰아부쳐
정점을 만드는 그의 지휘모습은 에너지가 넘치다 못해 주체를 할수 없을 정도라 같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단원은 그와 연주를 하고 나면 다른 지휘자와 연주를 하는 것에 보다 같은곡이라도
두배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의 스코어를 보면 빨간 색으로 엄청크게
악상이나 그가 원하는 것들을 적어논다. 이렇듯 그의 음악은 극단적이라 할수있다.
그의 연주를 실제로 보며는 청중들에게까지 그의 에너지가 전달된다.

그는 데카와 1947년 부터 피아니스트로 계약을 해 출반한 이래로 엄청난 양의 음반들을
녹음한다. 동시대의 카라얀과 비교 될 만큼 많은 녹음을 통해 밀도를 높여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이룩해 내고 또 그 결과물들은 후대에 남긴다. 그가 남긴 명반들은 수도 없이 많다.
모짜르트의 5개 오페라,바그너의 10개 오페라 R 스트라우스의 많은 작품들과 베토벤의
교향곡전곡, 말러 교향곡 전곡,브루크너 교향곡,모짜르트 교향곡,드볼작 등 .....

그는 1991년 시즌을 끝으로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를 접는다. 그후 세계 평화와 화합을
위해 월드 오케스트라 (World orchestra for piece)를 만들어 1995년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또다른 많은 활동을 하다 1997년 9월 5일
프랑스 니스에서 남서쪽으로 20km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 앙티브에서 (이마을은 화가
피카소,모네도 사랑한 마을로 지중해의 아름다운 코발트 빛의 바다와 따뜻한 햇살이 넘친다)
갑작스런 심장 마비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평소 그의 유지에 따라 조국 헝거리,
평소 존경을 하고 어려서 가르침을 받았던 벨라 바르톡의 옆에 묻혔다.


Solti's grave, Budapest





Recordings

Solti recorded throughout his career for the Decca Record Company. He made more than 

250 recordings, including 45 complete opera sets. During the 1950s and 1960s Decca had an alliance 

with RCA Victor, and some of Solti's recordings were first issued on the RCA label.

Solti was one of the first conductors who came to international fame as a recording artist before being

widely known in the concert hall or opera house. Gordon Parry, the Decca engineer who worked 

with Solti and Culshaw on the Ring recordings, observed, "Many people have said 'Oh well, of course 

John Culshaw made Solti.' This is not true. He gave him the opportunity to show what he could do.

Solti's first recordings were as a piano accompanist, playing at sessions in Zurich 

for the violinist Georg Kulenkampff in 1947.Decca's senior producer, 

Victor Olof did not much admire Solti as a conductor (nor did Walter Legge, Olof's opposite number 

at EMI's Columbia Records), but Olof's younger colleague and successor, Culshaw, 

held Solti in high regard. As Culshaw, and later James Walker, produced his recordings, 

Solti's career as a recording artist flourished from the mid-1950s.Among the orchestras with whom 

Solti recorded were the Berlin Philharmonic, Chicago Symphony, London Philharmonic, 

London Symphony and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s. Soloists in his operatic recordings included 

Birgit Nilsson, Joan Sutherland,Regine CrespinPlacido DomingoGottlob FrickCarlo Bergonzi

Kiri Te Kanawa and Jose van Dam. In concerto recordings, Solti conducted for, among others, 

Andras SchiffJulius KatchenClifford CurzonVladimir Ashkenazy and Kyung-wha Chung.

Solti's most celebrated recording was Wagner's Der Ring des Nibelungen made in Vienna, produced by Culshaw, between 1958 and 1965. It has twice been voted the greatest recording ever made, 

the first poll being among readers of Gramophone magazine in 1999, and the second of professional 

music critics in 2011, for the BBC's Music Magazine.



               

                                                                                Luciano Pavarotti (Otello)Solti leads the Chicago



            


    


               

                                                                                                                 November 19, 1992, Pierre Boulez surprised Georg Solti



                                                                                                                                                  Wagner: Der Ring des Nibelungen



                  



             

                                                                             Carrie with George Solti and husband John         



        

                                                                            Georg Solti with Kiri Te Kanawa and  Domingo , 1992 




               





                                           

                                                                franciscopa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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