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지금도 흐른다! 431
ㅡ2022년 한글날을 맞이하여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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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한글날 이었는데 칭구 이야기를 쓰니라 지나 갔습니다.
요즘 저는 정기적 출퇴근이 없는 삶을 살아서 그런지 연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매일 정기적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은 요즘만 같으면 살맛 날 것입니다. 추석 긴 연휴에 이어 개천절 연휴, 그리고 곧바로 한글날 연휴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세종대왕님 덕분에 지금 내가 이렇게 쉽게 한글로 글을 올리고 있고 또 하루를 휴일로 만들어 주셨으니 진짜 고마울 뿐입니다.
한글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배우기 쉽다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온 문구입니다.
그런데 요즘 제게는 한글이 참 어렵습니다. 특히 '띄어쓰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근 60년 가까이 한글을 써 왔지만 아직도 '띄어쓰기'가 많이 틀립니다.
오늘 쓰고있는 글에서도 띄어쓰기 틀린 곳이 꽤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원래 한글에는 띄어쓰기가 없었습니다.
띄어쓰기를 안 해도 충분히 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나 서구 문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띄어쓰기를 해야 의미가 통합니다.
한글에서 띄어쓰기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42~1915)가 사용하기 시작했고, 최초의 한글판 신문을 발행한 독립신문에서 사용되었다. 1933년에 발표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띄어쓰기 규정이 생겼습니다.
띄어쓰기 대원칙은 아래와 같지만
예외도 있고 좀 더 복잡합니다. 의미만 통하면 되는 데 왜이리 복잡하게 규정을 정했는 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1. 단어 단위로 띄어 쓰되 조사는 붙여 쓴다.(다른 말로, 어절 단위로 띄어 쓴다.)
2. 의미가 합쳐진 말은 붙여 쓴다.
3. 의미가 합쳐질 수 있는 말은 띄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붙여 쓰는 것을 허용한다.}
어쨌던 지금도 저에게 한글 띄어쓰기는 참으로 어렵기만 합니다.
아래 글은 오래 전 세종대왕 편에서 쓴 '훈민정음 반포'까지 과정입니다.
아래 글을 읽으면 한글 탄생이 정말 만만치 않았고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 가를 조금이나마 알게 될 것입니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눈병까지 걸려가면서 한글을 만들어주신 세종대왕님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숙연한 마음으로 읽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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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오백년!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21
세종대왕 3 ㅡ 훈민정음 반포
“세종대왕도 상을 받을 만 하다.”
영국 BBC방송 기사의 결론이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데버러 스미스의 맨부커 인터내셔널 수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다.
영국 언론이 보기에도 21살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스미스가 7년 만에 최고 영국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게 놀라움이다.
언어에 지속적 관심을 보여온 BBC가 “어떻게 번역자가 6개월 만에 한국어를 배웠나”란 제목의 기사를 쓴 이유이기도 하다.
BBC는 우선 세종대왕부터 언급했다.
“세종대왕이 상금 일부를 받을만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종대왕 동상이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으며 그가 28개 자모로 이뤄진 한글을 창제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세종대왕 덕분에 한국인들이 읽고 쓰는 게 쉬워 졌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자는 아침을 마치기도 전에 깨칠 것이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문구도 인용했다.
이처럼 한글은 영국방송 BBC가 인정 할만큼 배우기가 쉬운 뛰어나고 과학적인 문자이다.
얼마 전 방영한 '뿌리깊은나무'라는 드라마에서 한글 창제 과정을 깊이 있게 다루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세종은 최만리를 위시한 조정대신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을 예상해서 집현전 학자 몇 몇만 데리고 극비 프로젝트로 진행된다.
조선 조정대신과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확했다.
한글은 사나흘이면 누구나 읽고 쓰고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문자라 여자들은 물론이고 평민, 천민들까지도 문자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나라가 되어 버려 사대부들이 유교적 질서아래 통치 하기가 힘들어 질 수 있고 현재 체제가 지속 되기도 힘들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문자가 바로 권력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종은 중국도 훈민정음 창제를 반기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래서 극비 프로젝트로 비밀리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는 중국만이 천하를 지배하는 중화 질서 시대였다. 즉 모든 것은 중국을 통해야만 가능한 시대였다.
조선 사대부들이 목숨처럼 따르는 당시 천하 질서였고 동시에 성리학 질서였다.
그래서 당연히 문자도 중국 것을 쓰는 것이 중화 질서에 속한 문명국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최만리 상소에도 분명히 나오지만 '조선사대부들 생각은 중국 한자가 아닌 다른 독립적 문자를 쓰는 것은 중화 질서로 부터 벗어나려하는 무엄한 짓이었고 야만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주장했다.
당시 조선사대부 생각은 야만인 오랑캐라 깔 보았던 여진족, 몽고족, 서하, 티벳. 일본등이나 고유 독립된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사대부들은 우리나라 스스로 쓸 수 있는 고유 문자 한글창제는 그러한 오랑캐와 같아지는 수준으로 여겼다.
지금 생각으로보면 기가막히고 코까지 막히는 일이지만 당시 거의 대부분 사대부들 생각이 그러했다.
당시가 성리학 시대 였으니
성리학자 사대부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이기는 했다.
그래도 다행히 당시 최고 권력자인 왕 세종 생각은 달랐다.
세종은 이런 반대를 미리 예상했기때문에 오랜 세월을 믿을 수 있는 집현전 학자 몇 몇과 함께 극비 프로젝트로 훈민정음 창제를 진행했던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에 이설은 있다. 신미라는 스님이 세종의 자녀들과 함께 주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로도 나왔다.
어쨌든 여기서 알아둘 것은 당시는 한글이란 말이 없었고 반포 당시는 훈민정음이라 했다. 그 뒤 정음, 언문, 반절 등으로 불렸다.
1907년부터 주시경은 '하기국어강습소'를 운영하기 시작해서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창립했다. 1911년에는 '국어'란 말을 쓰지 못하게 되자 학회의 이름을 '배달말글 몯음'이라고 했다가 1913년에는 다시 '한글모'로 바꾸었으며, 1927년에 기관지인<한글>을 펴내기 시작하면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한'은 '하나' 또는 '큰'의 뜻이니, 한국의 글자에 대해 권위를 붙여준 이름으로, '정음'이란 이름과 그 정신이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되고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세종대왕의 집념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훈민정음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훈민정음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 수준의 문맹국가에서 탈피하여 거의 전 국민이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너무 쉽게 만든 것도 탈이었다.
조선사대부들은 한글을 모든 백성들이 읽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수치로 생각하였고 모든 국가의 공식 장부에서 철저히 외면하게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한글은 서민들과 여자들 사이에서만 비공식적으로 전승되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세종은 왜 훈민정음 반포에 목을 메단 것일까?
공식적으로 한글의 창제 동기는 훈민정음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 말과 다른 데도 중국 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 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는 것이다. 세종의 강한 민족 자주정신이 나타나 있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고 했다. 세종의 애민정신과 민본주의를 읽을 수 있다.
즉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 이유는 자주, 애민, 실용 정신의 발로이다.
이게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공식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 그 이면을 살펴보면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 한글 창제의 위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우선 세종은 조선 건국 초 4대 왕으로서 조선 건국 정당성을 온 백성에게 알려 조선을 빨리 안정화 시키고 싶어했다.
드라마 '뿌리깊은나무'에서도 보듯이 그때까지도 고려 잔존 세력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한문으로 조선건국 이념을 백성들에게 까지 설파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백성들도 배우기 쉬운 우리 글자를 연구하였는데 그게 바로 훈민정음이라는 것이다.
세종이 훈민정음 반포 이후 제일 먼저 용비어천가를 편찬한 것만 봐도 그렇다.
진정 백성을 생각했다면 세종 때 백성들을 위해 쓰여진 '농사직설'이나 '향약집성방'을 먼저 한글로 편찬해야 옳았다.
또 다른 이유는 세종이 원래는 한글창제가 목적이 아니라 중국 한자 운율을 중국식으로 발음하기 위한 운율 연구가 목적이었다 한다. 이 일에는 당시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가 앞장 섰다.
그런데 세종이 운율 연구 이상을 넘어 훈민정음을 반포하자 최만리등 조정대신이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그 상소문 위 제일 먼저 최만리 이름이 있어 최만리만 한글에 반대한 어리석은 조정대신으로 지금까지 오명의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최만리 상소문 내용은 당시 거의 대부분 조정대신이나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담당하고 있던 사대부 대다수가 가지고 있던 일반적 생각이었다.
최만리는 세종이 가장 아끼던 집현전 학자였고 조선 대표적 청백리였다. 세종이 그 상소문을 보고 화가 나 그를 잡아 가두기는 하지만 바로 다음 날 풀어 주고 집현전으로 다시 돌아 와 주길 간청하나 최만리는 석방 즉시 낙향하여 돌아 오지 않았다.
이 처럼 우리가 쉽게 만들어져 누구나 환영했을 것 같은 훈민정음이 우여곡절을 겪었다. 반포 이후에도 조선시대 내내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만약 세종이 조선사대부 지배층들 그 거센 반대에 굴복하여 훈민정음을 반포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 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ㅠㅠ
한글은 수천 년 전에 만든 지구상 어떤 구식 글자와도 비교가 안 된다.
자타가 공인하는 전세계 최신형 글자가 바로 우리 나라 한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