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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제일 미녀 황진이

작성자길벗123|작성시간24.04.19|조회수100 목록 댓글 0

                                                           

 

 

황진이 인물 소개

1. 생애

  • 출생: 1506년 (정확한 연도 미상) 개성
  • 사망: 1567년 (61세)
  • 본명: 황진 (황진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이름일 가능성이 높음)
  • 별명: 진랑, 명월
  • 소속: 교방 (1520년 입교)
  • 직업: 기생, 시인, 서예가, 작가, 음악가, 무희

2. 가족

  • 아버지: 황 이 (진사)
  • 어머니: 진현금 (빨래잡이)

3. 업적

  • 시: "동짓달 기나긴 밤을", "박연", "청산리 벽계수야" 등 다수의 시 남김
  • 서예: 우아하고 뛰어난 필체로 유명
  • 음악: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
  • 무용: 아름다운 자태와 뛰어난 춤 실력으로 유명

4. 일화

  • 서경덕과의 사랑: 조선 중기의 명문가 서씨 집안의 서경덕과 사랑에 빠져 4년간 동거
  • 신분제에 맞서는 모습: 천민 신분이었지만, 뛰어난 재능과 매력으로 양반 사회에서도 존경받음
  • 독창적인 예술성: 당시 사회의 틀에 갇히지 않고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

5. 평가

  • 조선시대 최고의 기생이자 예술가로 평가
  •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한 인물로 평가
  •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이미지로 자리 잡음

6. 황진이 관련 문화재

  • 황진이묘 (북한 장단군 남정현리)
  • 황진이 시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덕양동)
  • 조선 전기 기생이자 조선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꼽혔던 황진이는 수많은 아름다운 시조를 남기고 떠났다. 

 

 

황진이는 송도가 낳은 여류시인이자 명기이다.

그는 부안의 이매창(李梅窓)·평안도 성천(成川)의 운초 김부용(雲楚金芙蓉)과 더불어

조선시대 때 3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며 그중 최고의 명성이 높은 여류시인이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도)에서 태어났으며,

서경덕의 제자라는 것을 보아 조선 중기의 인물로 1520년대부터 ~ 1560년대쯤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본명은 진이고 기명(기생 이름)은 명월이다.

박연폭포, 서경덕, 황진이를 송도(개성) 삼절이라 일컫는다.

조선시대는 남성보다 여성의 인권이 낮았던 시대로 황진이는 억압과 신분 차별을 극복하여

자유분방한 삶을 누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 여류시인이었다.

길을 가던 황진이의 부친 황진사는 개성의 병부교 아래서

빨래를 하던 황진이의 어머니 진현금에게 물을 청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첩이 됐다고 한다.

황진이는 어렸을 때부터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며

시와 서화, 가야금에 뛰어났다.

또 당대의 절세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15세 때 동네 총각이 홀로 가슴만 태우다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웃집 총각의 상여가 그녀의 집 앞을 지날 때 꿈쩍도 하지 않았는데

끝내 그녀의 속적삼과 꽃신으로 운구를 덮어주었더니 상여가 움직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로 황진이는 충격을 받고 시집도 가지 않고

기생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는 설과 자신이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마침내 기생 황진이는 아름다운 외모에 춤과 노래, 악기 연주는 물론,

시와 그림과 글씨에도 두루 뛰어났기 때문에

그 명성이 조선 팔도에 뻗쳐서 내로라하는 선비들이 줄을 지어 찾았다.

디를 가든 선비들과 어깨를 겨누고 대화하며 뛰어난 한시나 시조를 지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음색이 청아해 가곡에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20년을 수도하고 10년을 공부한 체 수도에 정진하는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찾아가

미색으로 시험해 결국 그를 파계시키고 만다.

그래서 그때부터 우리 속담에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황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그녀는 "동짓달 기나긴 밤을…"로 시작하는 시조를 포함해

모두 8수 가량의 시조를 남겼고 [별김경원 別金慶元], [영반월 詠半月], [송별소양곡],

[등만월대회고 登滿月臺懷古], [박연 朴淵],[송도 松都] 등의 한시를 남겼다.

 

 

황진이는 "제가 죽으면 관 속에 넣어 묻지 말고

들에 놔 개미와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주세요"

라는 유언을 남기고 마흔 살 전에 죽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황진이의 시체를 개성 근처에 있는 장단에 고이 묻어 주었다.

현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님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않아 친구인 이달에게 의논했다.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누(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한 곡을 타면 진이가 곁에 와 앉을 것이다.

그때 본 체 만 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진이가 따라올 것이나

다리를 지나도록 돌아보지 말라"라고 일렀다.

벽계수는 이달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황진이를 그대로 지나쳐 다리로 향했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라는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은 벽계수가 뒤돌아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라 말하고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해석

                푸른 산 아래 흐르는 벽계수야,

                너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지 마.

                한 번 떠나는 달은

                다시 오기가 어려울 수 있으니 말이야.

                밝은 달빛이 온 세상을 밝히니,

                잠시 쉬어가도 무妨하지 않겠니?

 

벼슬을 멀리하고 고향에서 은둔하며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던 대학자 서경덕(1489~1546)은

조선 중종 때 활동하였던 유학자로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인데 서화담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황진이가 서경덕 선생을 유혹하려 했다가 실패하였다는

야사는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황진이는 그의 성품에 반해 한평생 서화담을 사모하여 화담이 사는 초야에 가서

즐기다가 오곤 하였는데 하루 이틀 만남이 깊어짐에 따라

화담과 황진이는 스승과 제자로서의 정이 이성으로서의 정으로 변해 갔지만

도덕이 높은 화담은 글을 배우러 오는 그녀를 허심탄회하게 사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 그 둘의 사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황진이와 서경덕은 제자와 스승 사이로 지냈다고 한다.

 

조선의 성리학 발전에 큰 도움을 준 서경덕은

청빈과 학문 정진을 목적으로 삼던 선비들의 우상으로,

실제로 황진이 같은 미모의 기생이 유혹해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수양이 깊은 학자였던 것이다.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쏘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도다.

 

 

 

박연 폭포    

                                        황진이

 

한 줄기 긴 물줄기가 바위에서 뿜어 나와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네ㅁ

나는 듯 거꾸로 숫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보이는 듯하다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고

구슬 절구에 부서진 옥 맑은 허공에 가득하니

나그네여, 여산이 좋다고 말하지 마오

천마산이 해동에서 으뜸인 것을 알지니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

달빛 아래 오동 잎 모두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 소리와 어울려 차가운데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워라

내일 아침 그대를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푸른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만월대 : 개성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궁궐 터

              어구 : 궁궐 안에서 흘러나오는 개천

 

출처: 정보통신기술감리 원문보기 글쓴이: 길벗123/조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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