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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백서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5.14|조회수79 목록 댓글 0

 

수필 백서 

 

 

 

 

 

 

 

 

 

나는 수필을 왜 쓸까. 자기표현 욕구가 강해서인가 풀어내지 않고는 못 견딜 사연과 상념이 많아서인가. 노한의 파적인가.

 

내 수필 쓰기의 처음은 우연이었다. 은퇴한 뒤 가끔 들러 법문을 듣던 길상사에서 수계한 이듬해 정초, 열다섯 보살 속 청일점 거사로 인도 성지 순례 길에 올랐다. 물에 뜬 기름이듯 겉도는 처지가 오히려 한갓져 순례 행각 중 보고 느낀 것들을 세세히 기록하게 됐고, 이를 주지 스님의 배려로 돌아와 길상사 홈피에 올렸다.

 

신자들의 공감에 자신감을 얻은 나는 그를 계기로 주제니 소재니 구성이니 하는 단어 하나 모르는 채 수필 쓰기를 시작했다. 중고서점에서 구한 윤모촌의 《수필 문학의 이해》를 교과서로 글쓰기 1년, 수필에 등단제도가 있다는 사실에 바로 수필교실을 찾아가 수강하고 2004년 등단했다.

 

북녘 땅 용당포에서 태어나 광복을 맞고, 상경하여 살다 6.25 전란 와중에 충청도 소읍으로 피란해 사춘기를 보낸 나에게 소재는 풍부했다. 주제가 정해지면 소재를 풀어 글 한편을 어렵지 않게 완성했다. 하지만 쉽게 쓴 글은 조잡하고 난삽했다.

 

부사와 형용사를 마구잡이로 빌붙이고, 격 다른 이야기를 뒤죽박죽 뒤섞어 흐름을 어질렀다. 더구나 인문학전 소양이 턱없이 부족해 글에 깊이가 없고 정보마저 빈약해 지적 기쁨은커녕 감동 한 자락 일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것이 필요했다. 여행과 독서에 몰입했다. 글에 풍정을 더하겠다는 욕심에서 온갖 곳을 여행하고, 빈 머리를 채운답시고 유불교의 각종 경정과 사기, 고문진보 등 동서고급의 명저와 시 철학서를 닥치는 대로 난독했다.

 

그런 중에 이번엔 허영이라는 병폐가 나타났다. 갠지스 강을 본 것뿐으로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제행무상' 어쩌고 하며 법구를 옮겨 치장하고, 레셀이나 데카르트 등 철학자의 말을 끌어들여 박식을 위장했다. 이해도 못 하면서 좋은 글귀와 시 등을 덕지덕지 인용해 다독을 자랑하고, 미언을 서슴없이 곁들여 박문인척 유세했다.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는 몽테뉴의 정의가 무색하게 말을 꾸미고 나를 포장했다.

 

욕심도 늘었다. 200자 원고지 열다섯 장 수필 한 편에 도덕, 해학과 유며, 사유와 철학까지를 모두 담으려 했으미 참으로 과대망상적 수필가라 아니할 수 없다.

 

수필은 개인의 지극히 사적인 자기 고백이기에 한 권의 수필집에는 작가의 독자적 경험과 사유, 인격과 감성 등의 내면이 고스란히 담기게 마련이다. 이규보를 위시해 익재, 연암, 간서치 등 옛 선비와 근원, 상허, 이희승 등 제씨의 수필에 심취했었기에 나의 글 또한 지극히 보수적으로 편향되어 시감이 뒤떨어진다고 아니할 수 없다.

 

기승전결로 마무리해야 한다거나 곡진해야 한다는 등의 고정된 관념도 떨쳐내지 못한다. 또한 그들 글의 기저에 흐르는 맹자의 4단 사상이 은연중 배어 근직하여 고루하다. 법정스님과 김태길 교수, 피천득 선생과 동시대를 호흡한 행운으로 그분들의 고졸한 정서와 결곡한 효지 역시 얼마간 이입되어 서정적이거나 계몽적으로 끝맺음하려는 고집도 무시로 나타난다.

 

초고를 엮고 나면 열흘쯤을 두고 여남은 번 퇴고하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달을 묵히며 서른 번 넘게 손을 본다.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이 떠오르면 자다가도 일어나 적고 걷다가도 멈춰 서 고치고 운전중일 때면 그 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서둘러 필기한다.

 

글에 자만과 자랑이 느껴지면 기운을 누그려 행간에 눕히고, 인용이 과하면 미련 없이 솎아낸다. 내 주장이 옳다 단정하는 독선적 어투는 없는지, 통속적 표현은 없는지, 지극히 개인적인 갈등이나 불만을 편협하게 배설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등도 다시 살핀다.

 

그렇게 신중을 기해도 나중 발표된 글을 보면 어딘가에는 꼭 과시와 삼한 표현이 숨바꼭질하듯 숨어 이죽대기 일쑤다. 수필 쓰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해절한 어휘 하나 찾는데 열흘을 바장이고 한 문장 다듬는데 보름, 한 달을 고뇌한다. 그래도 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니 다만 진력할 뿐이다.

 

 

 

- 오세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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