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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罷場)과 노을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5.16|조회수60 목록 댓글 0

 

파장(罷場)과 노을 

 

 

 

 

 

 

 

 

 

 

파장의 새벽은 늘 소리와 냄새가 연다. 갓 뽑아온 풋것들에 딸려 온 흙내, 풋내들, 붉은 고무물통 속의 잉어나 가물치들의 육탁과, 난장을 들썩이는 뻥튀기 소리, 제 살과 뼈를 바순 깨소금, 고춧가루 냄새도 이에 질세라 앞을 다툰다. 원초적 본능이 꿈틀대는 삶의 개펄이다.

 

난장 구석받이에서 펄펄 끓는 선지국 가마솥은 팔려나온 강아지, 닭 울음도 훌쳐서 푹 고으고 있다. 신산한 삶에 부대낀 속을 훑어줄 듯 시뻘건 관능미로 유혹하는 저 몸짓! 검은 가마솥이 척 걸쳐지는 장날은, 무싯날엔 볼 수 없는 정겹고 활기찬 한 폭의 풍속화다.

 

굳은살 박힌 생生들이 새벽부터 하나, 둘 샛강처럼 모여든 난장이다. 미처 털어내지 못한 노동의 단내와, 밤새도록 부스럭대던 선잠도 따라와 난전을 편다. 바리바리 이고 온 풋것들을 손톱 밑이 새까맣도록 다듬다가 팔다가, 이윽고 해가 기울면 노을따라 휘우듬히 저무는 강, 파장이다. 그 강가에 서면 어머니의 땀에 절은 하얀 머릿수건과, 팔다 남은 뭉툭무를 물들이던 50년 전 그 붉은 노을을 만난다.

 

새벽장 가는 길을 묵묵히 따라오던 새벽달도 그제사 지쳤는지 산마루턱에 걸려 쓰러진다. 그 자리에 우수수 쌓이던 허연 살빛, 한 생을 각혈하듯 살아오신 어머니의 비릿하고 단내나는 삶의 비듬이다. 시부모 봉양하느라 팔다리 떼주고, 오종종 달린 탱자같은 자식들에게 가슴마저 내준, 몸통 하나로 살아오신 어머니 닮은 새벽달, 멀미가 인다. 농심으로 일궈온 어머니의 삶을 뿌리째 흔든 뭉툭무가 섬광처럼 스친다.

 

그 해,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일까, 김장무 한 개가 어른 베개만했다. 복수로 가득 찬 내 배처럼, 부기 밴 어머니의 종아리처럼 억장 무너지던 무였다. 해마다 밭떼기째 사가던 부산 상인들도 발길을 돌려버렸고, 신나게 팔려나가는 옆밭의 무들은 무청을 살랑대며 어머니의 부아를 있는 대로 돋웠다. 한두 해 농사지은 것도 아닌데 야멸차게 등을 돌린 우리 밭 무를 나는 망연자실 바라만 보았다. 세 계절 내도록 흘린 어머니의 땀방울마저 된서리가 되었는지 무청들이 이랑마다 축 널브러져 있었다.

 

어머니를 따라 한 장도막이 다가도록 얼은 무를 단칼에 쳐내고 도려내다 보니 몽당연필이 되었다. 조석으로 밥을 얻으러 오던 문둥이 손같은, 우리 집 대문 안에 버려져 있던 업둥이 같은 무였다. 어머니는 이런 장내기 무를 장날마다 내다팔았지만 번번이 떨이도 못한 채 파장머리가 되어서야 돌아오셨다. 오자마자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단내나는 하루를 각혈하듯 쏟아내셨다. 종일 물질하던 해녀의 숨비소리 같은, 하루를 숨차게 끌고온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숨고르는 모습 같아서 울컥,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어머니와 해녀와 해, 나는 파장머리의 노을이 유난히 붉고 섧게 보이는 까닭을 그제서야 알았다. 그네들이 내뿜는 숨비소리와, 삶의 바닥을 차고 오르던 발바닥의 피멍이 노을에 스며들어서 그토록 붉게 물들인다는 것을. 얼다가 녹던 어머니의 손가락이 문둥이처럼 될까 봐 조바심치던 심장이 만장처럼 펄럭였다. 파장은 어머니가 각혈한 어기찬 생의 또다른 노을이었다. 미모사 같은 사춘기를 건너는 내가 읽기엔 너무 넓고, 깊고, 뜨거운 강물이었다.

 

어머니는 밥술이나 뜬다는 집으로 나를 기어이 시집 보냈다. 그러나 개펄 같은 삶의 바닥을 밀고 갈 뺄배 하나가 전부인 그 집은, 소금쟁이인 내가 건너기엔 너무 벅차고 막막했다. 달팽이집만 한 방 한 칸, 신주단지 같은 적금통장 하나 없는 신접살림은 파장이 되어도 팔리지 않는 떨이처럼 남루했다. 그러나 뺄배와 나는 한몸이 되어서 세상의 개펄을 어기차게 밀고 다녔다. 수없이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빠지는 사이 소금쟁이 다리는 튼실한 지겟다리가 되었다.

 

여류하는 세월은 고요히 닻을 내린 파장처럼 평안과 휴식, 회심(灰心)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가객(佳客)처럼 찾아온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며, 내 삶의 파장에 떨이째 팔 바지락, 낙지 등을 정갈하게 다듬는다. 낡은 뻘배가 시나브로 종이배처럼 가벼워지면 어머니의 파장, 그 넓고, 깊고, 뜨거운 노을에 띄워 어머니가 계신 서천으로 흘러갈 것이다.

 

마음이 낙엽처럼 뒹구는 날, 파장으로 간다. 마른 육신을 쟁여넣으면 화르르, 불씨를 당겨줄 놋화로 같은 곳, 털장갑, 검정고무줄, 푹신한 밑창의 신발이 전을 거두지 않고 나를 기다리는 곳이다.

 

나는 뻘배를 밀고 다니느라 늘어질대로 늘어진 바지춤을 올려줄 고무줄 몇가닥만 바구니에 담는다. 빈 장바구니가 자꾸 투덜대지만 등을 토닥여준다. 빈 바구니 가득 채워질 날이 반드시 올 거라고,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 인생 가벼워서 좋지 않느냐고 너스레까지 떤다. 나는 파장의 빈 난전을 마냥 기웃대다가 와도 한 장도막은 너끈히 사는데, 빈 장바구니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토라져서 내게 등을 보인 걸 보면….

 

파장에 다녀온 날은 굳은살 박인 엉덩이에 차는 비닐 뻘배를 더욱 바짝, 찬다. 나보다 앞서 달리는 비닐하우스의 빨간 고추나 딸기처럼 단내를 풍기려면 퍼부어대는 땡볕과 땀방울을 뼛속까지 빨아들여야 한다. 제 속의 상처를 겹겹이 감싸 안는 조갯살의 눈물이 한 알의 영롱한 '진주'를 빚듯이, 내 삶의 마지노선인 비닐하우스를 찢던 매미의 절창에 정신이 번쩍 든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가지만 열정을 다 바치는 저 핏빛 절규! 자신을 이겨낸 삶만이 진정 아름다운가.

 

살아 생전 팔지 못한 뭉툭무 걱정에 맨발로 달려오신 걸까. 파장의 노을이 유난히 붉다. 전봇대에 기대어 붉은 녹을 뒤집어쓴 풍구처럼 쪼그리고 앉았던 어머니, 붉은 녹을 걷어내면 당장 풍구를 돌릴 것 같은 어머니의 체온을 눈물로 더듬는다. 시린 손끝이 금세 따뜻해온다.

 

저리도 고와서 섧은 노을은 어머니의 눈물색. 한평생 벌배를 밀고 다닌 소금쟁이의 뒤꿈치며, 개펄 같은 난장 바닥을 차고 오른 장돌림들의 들숨 날숨이다. 순수하고, 솔직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장꾼들의 붉은 속살 같은, 돌아올 장날을 활활 지필 죽은 듯 살아있는 아궁이 속의 잉걸불 같은 파장. 그 파장머리에 서서 파장의 노을처럼 살다가신 어머니의 삶을 완경(琓景)하고 있다.

 

가끔 삶이 바닥을 칠 때도 파장으로 간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 적혀있는 빈 난전의 행간을 읽으며 방점을 찍고 밑줄을 그으면, 가슴이 뛴다. 파장은 생인손 앓던 손톱처럼 자르고 잘라도 자라나는 그리움, 망망한 내 삶의 밀물과 썰물을 끌어안는 개펄이었다.

파장은 지금, 새벽을 열던 소리와 냄새들이 난전의 낡은 차양들을 접느라 부산스럽다. 삶의 비바람에 살이 부러진 내 검정우산을 접듯이 무표정하게, 어기찬 나의 하루도 파장처럼 접는다. 멀리서 연노을이 다가와 내 어깨를 주무른다.

 

 

 

- 김원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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