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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수증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5.28|조회수107 목록 댓글 0

 

 

 

 

 

 

영수증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당신이 불러주지 않아도

이렇게 와 섰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지막 셈을 마쳤으니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시죠

 

제 것이 아닌 시간도 가끔씩 넘보며 훔치며

짐을 쌌다 풀었다

한세월 놀다 갑니다

 

지상에서 제가 일용한 양식

일용한 몸일용한 이름

날마다의 고독과 욕망과 죄한꺼번에 돌려드리니

부디 거둬주시죠.

 

당신이 보여주신 세상이 제 맘에 들지 않아

한번 바꿔보려 했습니다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아

당신이 지어내고 엮으신 하루가 밤과 낮 나뉘듯

취했을 때와 깰 때

세상은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다니

앞으로 보여주실 세상은 또 얼마나 놀라울까요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습니다.

부디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

 

 

- 최영미 -

 

 

 

 

 

최영미의 시 <영수증>을 읽은 것이 언제던가. 1994년에 출간된 그의 첫 시집 <서른잔치는 끝났다>에서 읽었으니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처음 읽었을 때 참 당당한 사람이다는 생각이었지만다른 시들이 워낙 유명세를 타며 잊어버렸다그런데 근래 다시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른참 많은 부분에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수증이란 대금이나 물품 등을 받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교부하는 문서이다수입과 지출의 투명성을 높여 세수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영수증 발행이 의무화된 지도 꽤 되었고 이제는 생활화되었다지만하느님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영수증을 요구한다는 기발한 생각을 어찌 했을꼬하긴 그러니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시인이겠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그런데 시 속 내용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게 있었다.

​시 속 화자는 지금 하느님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서 있다그리고는 요구한다. ‘부디 영수증 하나 끊어주시죠라고말투는 공손하다무슨 영수증일까바로 하느님이 화자에게 준 시간을 빈틈없이 채우고 마지막 셈을 마쳤으니’ 영수증을 달라는 것이다하느님이 화자를 인간 세상에 보낼 때 이러이러한 삶을 살라 했는데그런 삶을 살았으니 잘 살았구나 혹은 하느님의 지시를 잘 따랐구나 하는 증명을 써달라는 것이리라.

그런데 화자는 정말 하느님이 설계한 대로 인간 세계에서 잘 살았을까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화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닌 시간도 가끔씩 넘보며 훔치며’ 여기 저기 이사를 다니거나 직장을 옮기기도 했을 것이니 짐을 쌌다 풀었다’ 했지만 화자는 그냥 한세월 놀다 갑니다고 한다그리고는 지상에서 제가 일용한’ 양식이름 그리고 날마다의 고독과 욕망과 죄를 한꺼번에 돌려드리니 부디 거둬달란다즉 지상에서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화자는 하느님이 보여주신 세상이 제 맘에 들지 않아 한번 바꿔보려 했단다어쩌면 하느님의 뜻을 거역했는지도 모른다그런데 하느님의 그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단다게다가 하느님이 지어내고 엮으신 하루가 밤과 낮 나뉘듯 취했을 때와 깰 때 세상은 이토록 달라 보일 수 있단다.

주기도문에서 읽었음직한 구절이 포함된 이건 뭔 소리일까그렇다하느님의 뜻과는 관계없이 화자의 마음에 드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 했으나 실패했고하느님이 만든 밤과 낮이 다른 것처럼 인간인 내가 술에 취했을 때와 깼을 때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더란다그러니 하느님이 앞으로 보여주실 세상은 또 얼마나 놀라울까요라 감탄하는 것이다어쩌면 그것 역시 뻔한 것이 아닐까요란 비아냥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리고는 하느님 아버지 여기 제가 왔습니다며 첫머리를 반복하고는이제는 숙제 끝낸 어린애처럼 이렇게 손들고 섰단다숙제라니맞다하느님이 화자를 인간세상에 내려보낼 때 맡긴 일일 것이고화자는 그 일을 끝냈다는 것이리라그러니 저요저요 하듯이 손을 들고는 부디영수증 하나 끊어주세요라 하지 않겠는가그것도 당당하게.

영수증을 써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독자마다 가슴에 남는 것이 다르겠지만 대략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맡긴 일 다 했으니 확인서 한 장 써 주고 이제는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마세요가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끝내는 유서로 들린다특히 마지막 셈을 마쳤다거나, ‘한세월 놀다 갑니다’ 혹은 부디 거둬주시죠에는 자살을 암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그러나 이 시를 쓴 시인은 아직 시퍼렇게 살아 있다이를 근거로 유서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왜냐하면 시인은 시적 화자를 내세워 자신의 삶이 비참하다는 것을 암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 그리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다만 어느 것이건 화자가 참 당당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다만나는 화자처럼 살았는가하는 후회와 함께 왜 화자처럼 당당하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좀 더 당당하게 살아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아가 할 말 제대로 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문득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쳐(The Poseidon Adventure)>에서 스콧 목사로 분한 진 해크먼의 마지막 절규가 떠오른다. ‘하나님도와달란 말은 안하겠습니다제발 방해만은 하지 마십시오.’ 당연히 최영미 시인의 의도와는 다르겠지만시에 나타난 문맥을 통해 내 가슴에 남은 한 마디이다그냥 내 생각이다

 

 

 

- 이병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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