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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을 태우며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5.29|조회수95 목록 댓글 2

 

모닥불을 태우며 

 

 

 

 

 

 

 

 

 

놀이 중에 불놀이만큼 재미있는 게 또 있을까. 모닥불은 비 오는 날만 아니라면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피울 수 있고, 또 누구나 좋아한다. 내가 이곳 치악산 자락에 산 지 올해로 십 사 년째인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지난여름은 '더위에 어떻게 사느냐'가 안부 인사였지만 산 속이라 그런지 나는 더운 줄 모르고 지냈다. 오히려 밤에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런 곳에 살아 좋겠다며 부러워하는 지인들이 놀러오면 으레 밤에 불을 피웠다.

 

불 피우기는 손님들을 위한 이벤트이기도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저녁에 등나무 밑에서 치악산 막걸리를 곁들인 바비큐가 끝나면 나는 늘 하는 대로 남은 불씨에 마른 나무를 던져 넣는다.

 

태울 나무는 주변에 널렸다. 죽은 낙엽송 가지들이 많지만 그걸 만졌다간 손에 가시가 박혀 애를 먹는다. ​태풍에 쓰러지거나 설해 입은 나무를 산에서 끌어내려 가져오는 게 좋다. 옮기기가 만만치 않은데 , 놀러온 사람들이 퇴화된 근육을 혹사시키며 비지땀을 쏟을수록 모두의 만족도가 높다. 목도를 하여 마당에 부려놓고는 사슴이나 곰을 잡아온 수렵인들처럼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도 즐겁다.

 

발로 밟아 부러지는 나무 가지들은 그대로 쌓고, 굵은 부분은 따로 손을 보아야 한다. 도끼를 내오면 대부분 뒤로 물러서는데, 객기를 부리느라 자루를 거머쥐고 달려든 이도 몇 번 휘두르다 내려놓고 만다. 결국 톱으로 도막을 치게 된다.

 

며칠 전에는 이곳에 와서 사귄 토박이가 놀러 왔다가 나무 광을 채워놓고 갔다. 수북이 패놓은 장작을 보니 갈걷이가 끝나 곳간을 채운 농부의 심정이 어렇겠구나 싶었다. 오십 줄에 든 이가 도끼질을 그토록 경쾌하게 하다니 드문 일이었다.

 

도끼가 허공을 가르며 내려와 모탕에 놓인 통나무의 결을 내려치면, 윷가락이 맨땅에 떨어지는 것 같은 경쾌한 소리로 나무가 쪼개지며 떨어진다. 그걸 다시 모탕에 엎어놓고 반으로 쪼개고, 또 쪼개고​…그 동작이 얼마나 단순하고 기볍고 절도가 있는지, 마치 기계체조 선수의 리드미컬한 몸동작이 느껴진다.

 

불을 피우기엔 밤이 제격이다. 낮에 피운다고 안 될 것은 없지만 불꽃의 온전한 모습은 밤에라야 더 선명히 드러난다.그것을 응시하고 있으면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찌를 보고 있는 낚시꾼이 윤슬​에 혼이 빠지듯 불꽃도 사람의 얼을 빼놓는 것 같다. 시간을 앞으로도 가게하고 뒤로도, 혹은 제 자리에 머물게도 한다. 널름거리는 불길에 시선이 사로잡히면 알 수 없는 행성에 간듯 시간의 개념조차 없어지고 만다. 자정을 넘기기 일쑤고 나무를 조절해 불길을 사그라뜨려야 놀이가 끝난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나무도 타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모닥불 장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상수리나무와 소나무다. 탈 때 내뿜는 향도 좋고 화력도 세다. 하지만 획일화된 사회처럼, 아니 조연 없는 주연 같아 재미가 덜하다. 꼭 잔가지를 넣어야 한다. 놀이 삼아 피우는 불은 타닥타닥 소리가 나고 자잘한 불티도 날려야 제 맛이다. 타는 소리, 연기냄새, 불꽃의 모양, 잉걸덩이 등 다양한 요소가 어우러져야 아름답다.

 

오래 타기는 아까시나무를 따를 게 없다. 단점이 있다면 탈 때 구린내가 난다는 점이다. 방귀 냄새에 신경 쓰는 조심스러운 연인들이라면 그 불 앞에 서는 걸 삼가야지 싶다. 오래 타는 것으로 박달나무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불꽃은 너울너울 혀로 제 몸을 어루만지듯 같은 곳을 핥다가 지나가고, 다시 돌아와 스치기를 반복한다. 노련한 피아니스트가 현란한 변주곡을 연주하는 것 같다.

 

그런 나무는 불꽃이 스러지고 잉걸이 심하게 남는다. 불놀이가 끝날 때 뚜껑을 덮어 놓았다가 다음날 열어보면 쇳소리가 날 정도의 짱짱한 숱으로 변해 있다. 습기가 들어가지 않게 간수해 두면 다른 날 바비큐 숯으로 제몫을 톡톡히 해낸다.

 

밤나무도 쓸 만하다. 불이 맹렬히 타오를 때는 불티가 반딧불이 마냥 높이 날아오른다. 밤송이 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재미있는지. 밤송이의 가시는 불꽃놀이 꽃불 터지듯 호로록 타고 껍짐만 동그란 불공으로 남는다. 그 모습에 취해 넋을 놓았다가는 진짜로 취할 수 있다. 밤나무 불길에는 독서이 있어 사람이 어이기 쉽디다. 어린아이들이 있다면 밤나무는 삼가야 한다.

 

불놀용르로 쓸모가 있는 건 은행나무다​. 잔가지는 좀 나은데 굵은 나무는 정말 제 구실을 못한다. 불땀도 좋지 않고 피식피식 마지못해 불이 붙었다가 불길이 안으로 숨어버린다. 불이 당긴 줄 알고 나무를 얹지 않았다가 불꺼뜨리기 십상이다. 방화 목으로 은행나무를 심는 게 이해가 간다.

 

은행나무의 노란 잎은 가을의 대명사이지 않던가. 식용으로, 약용으로, 재목으로 정말 유용한 나무인데 불놀이용으로는 영 아이다. 생김새도 쑬쑬하고 정직하고 내게 우호적이지만, 이렇다하게 거슬리는 것도 없으면서 재미없고 지루해 단둘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같다고나 할까. 지내봐야 사람 속을 알듯, 나무는 태워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불꽃은 나의 꿈이었을지 모른다. 타오르는 걸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악산惡山에 뿌리 내리고, 한 뼘 햇빛을 다투어 가지를 뻗고, 손톱으로 우물을 파듯 바위를 녹이는 일이 결코 사람 사는 일보다 쉽지는 않았을 텐데, 갇혀 사는 동물이 들판을 뛰고 싶듯 나무라고 떠나고 싶은 염원이 없었을까.

 

누구나 이루고 싶은 자기만의 꿈이 있고, 살아보고 싶은 인생이 있지 않던가. 까맣게 잊고 있을지라도 꿈 자체는 언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꿈이란 어떤 계기로든 불이 붙으면 타오르는 나무와​ 무엇이 다를까. 불길은 현실의 버거움을 무장해제 시키고 스멀스멀 가슴을 헤쳐 밑바닥에 묻혀있는 꿈 씨를 찾아낸다.

 

사람 사는 게 모두 자기의 나무를 태우는 과정이라면 비약일까. 내게 주어진 삶을 태우는 일, 각자 자기 몫의 나무에 불을 사르며 사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무는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다 타서 마지막 불꽃이 까무룩 꺼지는 것을 보면 그 또한 생을 마치고 조용히 숨을 거두는 사람을 보는 듯하다. ​

 

 

 

- 장현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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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창원친구 | 작성시간 24.05.30 어린시절 생각이 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초원의 꽃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5.3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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