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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게시판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6.19|조회수62 목록 댓글 0

 

 

 

 

 

 

 

 

 

자박자박 어둠이 몰려온 산골마을은 정적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마당에서 올려다본 하늘은 짙은 청잣빛을 띄며 가늘게 빛나는 수많은 싸라기 별들을 품고 있다. 밤이슬에 맴돌던 공기는 식도를 타고 폐 속으로 전진한다. 싸한 박하 향기가 다시 입으로 통해 돌아 나온다. 하얀 입김들은 지붕 위로 점점이 사라져 간다.

 

그녀의 집 옆으로 작은 도랑이 나 있다. 오랜 가뭄 탓인지 소리 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다 멈추듯, 멈추듯 흘러가는 도랑에 초승달 하나가 갇혀 있다.

 

오후 늦게 찾아온 그녀의 집은 텅 빈 마당을 휑한 바람이 쓸고 있다. 집 곳곳에는 그녀의 손 때 묻은 살림살이가 깔끔하게 정리 되어 있다.

 

'어디에 갔을까?"

 

나는 대문도 없는 집을 나와 신작로를 걷는다. 이 길을 사시랑이 된 몸으로 혼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었을까. 야트막한 고개를 넘어 자드락길을 올라 가니 그녀의 울음소리가 나직나직 들려온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그녀는 산바람을 맞으며 텅 빈 밭 가운데서 고슴도치처럼 몸을 돌돌 말고 앉아 있다. ​

 

슬픔은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오래된 기억의 창고에서 쏟아지는 많은 그리움들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슬픔은 온 몸 구석구석 스며들어 꺼억, 꺼억 목 놓아 울고 있다. 슬픔을 보듬어 안아보면 어느 순간 슬픔의 습기들이 사라진다. 그녀의 축축한 습기들이 푸석한 대지 속으로, 마른 공기 속으로 하나씩 빨려 들어갔다.

세상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면 고요만이 눈을 떠 새벽을 기다린다. 고요는 누워있는 나를 감싸 안으며 스며들었다. 그녀의 마르고 거친 숨소리가 천장을 맴돌았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흘러내린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주기 위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 본다. 손은 물기조차 없는 삭정이처럼 가볍고 거칠다. 바람이 불면 뼛속으로 파고 들어 바스스 부서져 내릴 것만 같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녀는 평생 흙을 떠나 살아 본 적이 없다. 한때는 마을에서 알부자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푼푼한 살림살이가 남편이 쓰러지면서 달라졌다. 병원비는 논과 밭을 원했다. 세월은 신전에 올리는 재물마냥 그녀의 땅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그녀에게 흙은 해가 뜨면 달려가던 곳이었고, 비가 오지 않아도 걱정, 비가 많이 와도 걱정이 되었던 곳이다. 연두색 모가 진초록 빛으로 튼실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아이마냥 좋아했다. 농사를 짓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녀는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알알이 익어가는 황금색 벼이삭을 보노라면 뿌듯하고 기특하다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혼자 손으로 농사를 지었다. 추수가 끝나면 축담에 쌓인 노적가리를 쓰다듬으며 행복해 했다. 며칠 뒤 방아를 찧는 소리가 길목까지 들려왔고, 방앗간 안은 약간의 빛과 온통 희멀건 먼지들이 나무 기둥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녀의 머리에도 어느새 하얗게 싸리꽃이 피었다.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시키는 쌀 포대를 그녀는 달구지에 실어 두 시간이나 읍내로 간다. 그리고 누런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로 쌀을 보낸다. 달구지는 덜컹덜컹 빈 소리를 담고, 그녀는 억새 위로 새품이 하얗게 빛나는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어둠은 진작부터 신작로에 길게 들어 눕고 배부른 달만이 감청색 하늘 위로 떠돌았다.

 

한때는 열심히 일하던 객지로 떠나간 자식들이 다시 돌아와 같이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도 자식들이 떠나간 빈자리에 논과 밭이 있어 숨 쉴 수가 있었다. 흙을 만지고 다지면서 넋두리 하나 심을​ 수 있었다. 언젠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남길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주고 떠나는 순간은 평화와 안식이 숨어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를 비껴갔다. 그녀는 피와 땀이 담긴 전답을 하나둘 잃을 때마다 마음속에 흙무덤을 조금씩 쌓았다. 구멍 난 항아리에서 물이 빠지듯 사라지는 땅을 보면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녀에겐 이제 논이 없다. 마을에서는 농업용수를 사용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었고, 그녀의 논은 저수지에 잠기게 되었다.

 

몇 달 전 병실 밖의 간이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의 가슴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늙고 병든 그녀의 두 눈에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슬픔은 오래전 그녀의 남편을 잃었던 그때보다 아들을 잃었던 지금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말없이 그녀의 곁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남편이 가버린 그때에도 씩씩한 대장부처럼 다시 흙을 만지며 견뎌냈다. 그녀는 차가운 어두운 땅속, 가슴에 희망의 씨앗 하나 간직한 채 따스한 봄날에 세상을 향해 우뚝 솟아 오른 생명의 싹을 가졌다. 푸른 대 위로 보랏빛 십자가를 매단 채 은은한 향기를 품어대는​ 장다리 꽃 같은 그녀다. 자신의 모든 영양분을 씨앗에게 주고나면, 뿌리에 바람이 들어 흙으로 되돌아가는 모정의 소유자다. 그랬던 그녀가 울고 있다. 아직 젊은 며느리와 손자를 위해 병원 한 모퉁이에서 숨죽여 울고 있는 그녀가 자닝하여 하얀 천장만 바라보았다.

 

초승달이 젖은 몸을 일으킨다. 달 주위로 풀내가 묻어나는 바람이 서성이자 구름이 달을 감싸 안고 하늘로 올라갔다. 세상은 다시 정적 속에 빠져든다. 방구석에 놓인 감자들이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는 그 밤에, 그녀의 숨소리와 함꼐 새벽이 문을 두드린다.

 

밤이 지나가는 소리와 아침이 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홀로 남겨진 바람만이 가늘게 떨고 있다. ​

 

 

- 노경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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