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등이 꺼질 무렵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장및빛 뺨을 물들이며 온다. 잎 진 나무들이 가지런히 갈기를 세우고 서 있는 먼 산 능선 위로 연한 분홍빛이 아스라이 비쳐든다. 땅 위를 질주하던 자동차도, 땅 속을 순환하던 전동차도, 지친 바퀴를 세우고 잠시 선잠이 드는 시간. 혼곤한 도시인의 꿈결 속으로 새벽은 은밀하게 잠입해 들어온다.
길목을 지키느라 밤을 새운 가로등이 수척한 얼굴로 구부정히 서 있다. 어슴푸레한 여명의 정적 속에서 길은 낮보다 더 넓어 보이지만, 쓰레기더미 위를 어슬렁거리던 고양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복잡한 도시 안에 여백이 가장 많아지는 시간도 이 때쯤일 것이다.
누가 어둠을 밀어내는가. 깜깜한 칠흑의 장막 위로 누가 한 움큼의 표백가루를 흩뿌리며 지나가는가. 달의 여신 셀레네가 은 수레에 걸터앉아 구름 속 침소로 사라지고 나면, 도시를 에워싼 흑암의 군사들도 슬금슬금 무장 해제하기 시작한다. 흑백 음화陰畵가 감광지에 인화되듯, 불투명한 질료 속에 숨어든 물상들이 하나 둘 제 모습으 드러내면서 밤사이 지워졌던 사물의 경계가 소리 없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나팔꽃이 다문 입술을 열고 강이 안개를 내뿜는다. 지붕 없는 둥지에서 잠을 깬 새끼 새도 깃털을 고르며 부스럭댄다. 뭇 생물이 보금자리에서 홰를 치는 시간. 세상은 아침마다 다시 태어난다. 어둠을 틈타 땅과 교접한 하늘이 새벽마다 새로운 빛을 낳으니 강도 꽃도 안개도 어제의 것이 아니다.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다.
새벽별, 새벽기차, 새벽시장, 새벽이슬..... 새벽이라는 말에서는 청정하고 삽상한 바람 냄새가 난다. 푸르고 미세한 안개 같은 것이 자욱하게 도포되어 있는 듯, 서늘한 냉기가 감지되기도 한다. 우련히 비쳐드는 빛줄기 속에 정신을 가다듬고 일어나 앉은 사람들은 오늘 해야 할 일과 지켜야 할 약속을 헤아리며 어제의 무기력을 딛고 새로운 하루의 시간을 장전한다. 새벽기도를 가는 사람들은 하루 중 가장 정갈한 시간을 신께 봉헌하려고 베갯머리에 불침번을 세워두고 잔다.
그렇게 서서 지키지 않으면 일쑤 건너 뛰어버리는 시간. 새벽은 누구에게나 골고루 뿌려지는 함박눈 같은 것이 아니다. 새벽은 새벽잠을 반납한 사람에게만 온다. 충직한 자명종에게 꿀맛 같은 아침잠을 서너 차례쯤 물어뜯기고 나서야 새벽을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이불 속의 5분은 어찌 그리 달콤한 것인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궁싯거릴 수야 없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가 황금마차를 타고 부릅뜬 눈으로 달려 나오기 전까지. 서둘러 하루채비를 마쳐야만 한다.
아파트 창문마다 불이 켜지고 거리에 차들이 늘어난다. 아이 깨우는 소리, 양치질 하는 소리, 프라이팬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고즈넉한 정적의 이면을 관통하는 부산스런 시간의 숨소리. 문득 거리에 외등이 꺼진다.
사람의 몸에서 혼이 빠져나가듯 가로등 불빛이 한꺼번에 죽는다. 아무도 눈치재지 못하는 사이. 어둠은 그렇게 수묵빛 박명 속에 평화롭게 임종한다. 밤과 낮의 정령이 사이좋게 그러안고 석별의 인사를 나누는 시간. 해가 지고 저녁이 되면 하루가 끝났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진정 끝나고 시작하는 순간은 어쩌면 이 순간일지도 모른다.
편 가르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밤과 낮, 빛과 어둠을 맞은편에 나누어 세우기를 좋아한다. 무엇이든 이분법으로 나누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외등이 꺼지는 바로 그 순간, 홀로 여명 속에 서 있어본 사람은 안다. 빛이 돌아나간 자리가 어둠이요 어둠이 물러선 자리에 내색 없이 스며드는 게 빛이라는 것을. 어둠이 한 빛이 잦아든 동안의 이름일 뿐 맞서는 존재가 아닌 것처럼, 죽음 또한 삶의 맞수가 아닌 삶의 한 자락일 뿐이라는 것을.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기의 음을 고르듯, 도시는 이제 미분화된 소리들로 넘쳐나기 시작한다. 잠들었던 세상이 새로운 활기로 수런대면서 거대한 교향악단 같은 도시가 자세를 가다듬고 숨을 고른다. 조금 있으면 말쑥한 연미복 차림의 아침이 환하게 손 흔들며 나타나 줄 것이다. 그리하여 도시는 돋쳐 오르는 햇살 속에 날카롭게 각을 세우며 수직으로, 수직으로 복원될 것이다.
- 최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