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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돌발이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7.09|조회수77 목록 댓글 0

 

몽돌발이

 

 

 

 

 

 

 

 

 

호롱 속에 고향이 들어있다. 내가 놀았던 동계수 그 명랑한 여울물과 구름들 드넓은 논밭을 호롱도 보았고, 내가 젊은 부모님, 처녀 적의 누나들과 자라 등만한 초가 울타리 안에서 맴돌았던 푸른 시절을 이 호롱도 함께 지냈다. 또 옛날을 그리는가. 깜박깜박, 거실 진열장에서 호롱이 졸고, 나도 덩달아서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오른다.

 

조왕신을 모신 면경(面鏡)같은 부뚜막, 닳도록 매만져서 자르르 윤기 흐르는 옹달솥, 소댕이 열리고 그을음이 박쥐처럼 매달린 서까래까지 김이 솟구치고 나면 곧 들어오던 소박한 저녁상, 늦은 저녁 짓느라 서두르는 어머니의 손길은 오직 안방 구멍창에서 가늘게 비치는 호롱불빛에 의지했다.

 

별 하나 비치지 않는 마른 논바닥에 겨우 사름을 한 벼 이파리가 끼니 거른 자식처럼 ​고개 떨구는 대한 가뭄에, 다만 아이 오줌줄기만한 물이라도 더 얻어 보려고 머루리 소리 기를 째는 물꼬에서 노심초사하는 농부, 초롱 속 호롱이 농부 아버지와 함꼐 새벽을 맞았다.

 

있으나마나한 손톱달이 중천에 떠 있어도 밤은 점점 동굴처럼 캄캄해져 잠의 그물이 누리를 덮고, 커엉컹, 무단히 짖어대던 개들까지 잠잠해지면 잘 익은 꽈리 색 장명등이 홀로 집을 지켯다. 바자 울타리를 종종 넘어오는 족제비도 등이 무서워 닭장 속 서리배 중병아리를 함부로 넘보지 못했고, 늦은 귀갓길에서 흙 퍼붓는 개호주에 놀란 장꾼이 그 가늘게 흐르는 불빛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앙상부리는 문풍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비집고 드는 섣달​ 긴긴밤, 벽지 속에서 또르르, 마른 흙이 떨어지는 골방에서 내복 솔기에 숨은 가랑니를 잡는 누님의 머리카락과 함께 호롱불이 배추흰나비처럼 팔랑거렸다.

 

수몰되는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호롱을 잊었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물줄기에 쫓기느라 경황도 없었지만, 전깃불이 있는 곳으로 가는 이삿짐에 호롱을 챙겨 넣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도시에서 열두 장 달력을 스물다섯 권째 쓰던 해, 솔방울 겹겹이 잔 비늘 조각이 갈색으로 변해가는 어느 가을날에 드러난 옛 집터를 다시 찾았다. 장정 손바닥만한 이곳에서 어떻게 온 식구가 지냈을까, 안방자리에서 회상하다가, 진흙에 처박힌 호롱을 발견했다. 밤마다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 주던 그 호롱을.

 

해와 달은 저들은 늙지 않고 세월을 몰래 돌려 만물을 삭힌다. 여기에 녹지 않는 존재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바위를 뒤흔드는 한여름 태풍을 이겨낸 나뭇잎도 늦가을 산들바람에는 덧없이 떨어진다.

 

스무 길 캄캄한 호수 바닥에서 두 달도, 두 해도 아닌, 스물다섯 해나 외로워, 그리움에 사무쳤을 호롱, 이리 구르고 저리 뒤채느라 손잡이가 떨어지고 꼭지조차 간 곳 없다. 밤마다 사람의 눈이 되었던 흐뭇한 시절은 아지랑이 같고, '불조심' 글자마저 희미해진 몸통이 안됐다.

 

서울시립승화원에서 몇 움큼의 재가 된 큰처남의 자취를 용머리 어느 소나무 아래에 감추고 돌아왔을 때, 장모는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메보다 내가 먼저 죽으께레 카디마는 그늠이 기어이 내 가심에 못을 박아놓고 가뿌랬어."

 

잇몸이 내려앉은 입시울이 길게 실룩거렸다. 첫아들을 얻은 어머니의 기쁨이 어땠을까. 옥토 열 마지기를 사면 그럴 수 있을까. 당신이 임종할 때 산처럼 든든하게 종신해야 할 맏아들이 제 편한 세상으로 먼저 떠나 버렸다.  ​

 

"세상에 부러운 게 한 개도 없어. 백 살 사라꼬 백설기 찌고, 속 넓어지라꼬 만두 찌고, 키 크라꼬 수구떡 무체서 떠억 백일상 채릴 때는 우리 대주大主한테 참 아이도 바랬다마는."

 

부모는 포도송이 같다던가. 한 알 한 알 새끼들에게 다 떼 먹인 우글주글. 앙상한 포도 줄기 같다던가.

 

"큰오라베가 선비라 영채가 서릿발 같애 바깥출입을 못했어. 양지마에 사는 배 선새이 언문을 갈챘은데, 다른 동무들은 다 배우로 댕게도 나는 못 같어. 하도 궁거워서 베 매다가, 명 잦다가, 살째기 가서 들따보기도 했제."

 

우리 집에 가시자고 두 딸이 사정해도 고개만 저었다. 귀찮아. 원행遠行할 엄두가 안 나.​

 

"열일곱 먹든 해에 상주 몸으로 혼인을 했어, 왜놈들이 처녀 공출한다고 하도 설쳐싸서, 탈상 때까지 있으머 열아홉이나 되이, 구체없이 시집을 왔제. 신행 와서 잔네 장인한테 글 좀 배울라 카이 자꾸 후지막아서 지대로 배울 수가 있나."

 

벽에는 장모 삼 형제분의 사진이 걸려 있다. 벌써 스물다섯 해나 지난 당신 환갑 무렵에, 나들잇벌 풀치마와 끝동 고운 곁마기로 치장하고 여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경칩만 지나머 자아들하고 안즉 뽀한 논둑에 쑥 뜯으러 댕겠제. 사금파리 쪼가리에다 나이(냉이)쑥 깜둥물감 이파리를 채래 놓고 혼잡 노이 얼매나 재미있던둥, 해 떨어지는 줄을 몰랬어. 어둑발을 안고​ 도둑 고내이처럼 살곰살곰 정지에 들어가머, 어메가 기겁을 하겠제. 사랑채에 계시는 큰아베 아시머 어엘라카노꼬. 그때귀때기 발갛든 저것들도 뭐가 그크러 바쁜동 내만 도고 저래 먼저 가뿌이. 묵을수록 보기 좋은 거는 옹기 밖에 없다카디마는 그게 참말이래. 내 꼬라지가 꼭 귀신 겉애."

 

삼 년 전에 장인어른이 고향 산천에 유택을 정하면서 등재댁, 우리 장모의 시계바늘은 날마다 왼쪽으로 돌아간다. 어느 날은 끝댕기 곱게 물린 소녀가 되어 샘물 길어 옹자배기로 드므를 가득 채우다가, 또 어느 날은 아이들 어느 정도 자란 후에야 처음으로 가봤던 예안장터에 서 있기도 했다.

 

함께 사는 손자가 아침에 출근하면 노인은 섬집아기처럼 혼자 남아 온종일 청춘들이 웃고 떠드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세월을 죽인다. 햇빛이 일백삼십칠억 년이나 달려가야 끝에 닿는다는 가없는 우주 속 한 점 먼지로 생겨나, 백사장 모래알 같은 일생에 사금(砂金)처럼 다문다문 드러나는 기쁜 날을 희망하여 버티는 사람의 삶, 아리짐작한 복사꽃 아가씨가 수세미 주름 자글자글한 할미가 되고 마는 손전한 섭리라니​...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호랑이에게 떡 하나 주고 고개 하나 넘고, 있는 떡 다 주면 안 잡아먹지, 떡 바구니 다 떨어주고 몇 고개 넘고, 팔 떼어주고 고개 넘고, 다리 떼어주고 고개 넘어 몸통만 남은 떡장수 엄마 같다. 섶에 오르려는 오령의 누에 같다. ​

 

 

- 이원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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