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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길에서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7.28|조회수81 목록 댓글 2

 

山길에서 

 

 

 

 

 

우리 집은 山 밑이다.

그리도 눈 퍼붓더니 어느새 또 봄이다.

하늘이 나직하다. 나직한 하늘이 보얗다. 보얀 하늘에 바람이 분다. 부는 듯 마는 듯 그렇게ㅡ, 더러는 선뜻도 하지만 매섭지는 않다. 아니, 혼혼하다. 어째 비가 올 것 같다. 지팡이 삼아 우산 하나 짚고 집을 나선다. 식곤증으로 나른한 오후 한시 반, 드디어 山이 조용하다. 아직 안 깻나, 빈 가지, 마른 풀, 쌓인 가랑 잎, 다들 한겨울이다. 아, 깜짝이야, 토끼 한 마리가 내닫는다.

어라, 비다, 비가 오네, 가늘다. 싸르르, 좁쌀 같은 빗소리로 온 山이 조용히 소란해진다. 비가 겨울에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을 고마워한 수필가가 있다(김진섭 백설부). 그러나 차갑게 얼어 붙은 이 山에 눈이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싸르르ㅡ, 빗소리들이 내 혈관을 타고 가슴에 들어와 詩가 된다. 우산을 펼쳐든다. 우산 위에도 싸르르, 詩가 쏟아진다.

이 비 그치면 온 山이 바쁠게다. 우선 저 응달에 쌓인 눈좀 봐, 부지런히 녹잖니? 돌돌 시냇물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하거든. 굴참나무도 마음이 급할 게야. 어서 톡톡 푸른 눈 틔워야지 미적거리다가는 물참나무한테 질 수도 있어. 아까 깜짝 그 토끼는 뭘 할까? 녀석이라고 한가할리가 있나? 겨우네 움츠렸던 가슴 한번 쫙 펴고, 맞아, 좋은 배필 찾아온 山을 뛸게야, 아암ㅡ.

봄은 바쁜 계절이다. 아주 신나게 바쁜 그런ㅡ.

우리 돌이의 새 1학년도 이렇게 바쁘고 신나야지!

여름

우리 집은 山 밑이다.

싸르르ㅡ, 봄비 오더니 금방 여름이다.

불볕이 마구 쏟아진다. 오후 세시, 바람 한 점이 없다. 집을 나선다. 낡은 맥고자, 빛은 바랬지만 그늘은 넉넉하다. 이마에 땀이 솟는다. 드디어 山이다. 땅이 후끈 열기를 뿜는다. 어느새 가슴팍에 주르륵 땀이 흐른다. 나무들이 넋이 나갔다. 멍청히 서 있다. 잎새들은 미동도 않고, 새 한마리 날지 않는다. 山은 움직임이 없다. 소리도 없다. 적막뿐, 시간도 흐르다가 멈춘 듯ㅡ. 잠깐, 저 하늘좀 봐. 구름이 이네. 검다.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는다. 뭐야, 갑자기 우두둑 소나기가 퍼붓는다. 하늘을 우러른다. 콩알 같은 빗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맥고자에서도 우두둑 빗방울이 튕긴다. 소나기는 어느새 쏴ㅡ, 폭포처럼 내리꽂는다. 천천히 바위 밑으로 가 비를 긋는다. 불볕만 있고 소나기가 없다면 이 山이 어찌 견딜까? 여름 예술의 극치, 저 퍼붓는 소나기ㅡ.

멍청하던 나무들이 정신이 드나 보다. 미동도 않던 잎새들이 통통거린다. 산새들은 어디서 비를 그을까, 날다람쥐 한 마리가 급히도 나무를 오른다. 山이 되살아난다. 어라, 이건 또 뭐야, 뚝 소나기 그치네, 구름이 터진다. 터진 구름 사이로 눈 시리게 드러나는 푸른 하늘, 햇빛이 마구 쏟아진다. 오, 밝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찬란한 山 저 푸른 숲, 나무도 풀도 한 뼘을 부쩍 큰다.

불볕을 견디면 소나기, 소나기 지나면 햇빛ㅡ.

이봐, 우리 金군들, 이 여름에 한 뼘씩 부쩍 크게나.

가을

우리 집은 山 밑이다.

불볕에 소나기 그리 퍼붓더니 벌써 가을이다.

비가 내린다. 조금은 쓸쓸히. 비가 그친다. 없던 일처럼. 가을비는 그렇게 내리다가 그렇게 그친다. 지금은 오후 두시 반, 포켓용 소주 한 병 잠바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을 나선다. 드디어 山이다. 햇볕 속, 온 山이 청랑(晴朗)하다. 하늘은 아스라이 푸르러 어지러운데, 바람이 살랑인다. 이는 바람에 우수수 낙엽이 진다. 우수수 지는 낙엽이 옷깃을 친다.

숲길을 걷는다. 어라, 이게 무슨 소리야? 뭐가 툭 떨어지네, 심심한 듯 툭, 또 툭 툭ㅡ. 아하 굴밤이구나. 아니, 이건 산밤 아냐? 옛날 내 고향 안산 밑 그 밤나무들도 아람 떨어지는 소리가 툭 툭 이랬다. 그대 참나무, 산밤나무여, 그대들은 저 북풍과 폭양과 폭우의 험난을 견디며 이렇듯 풍요로운 가을을 이루었다. 아, 이제 그대들은 한 점 회한(悔恨) 없이 안식(安息)에 들겠구나.

또 숲길을 걷는다, 천천히. 길가에 들국화가 하늘거린다. 함초롬히 비 맞은ㅡ. 가녀린 몸짓이다. 애수(哀愁)가 어린다. 넌 어쩌다 열매 한 톨 못 맺었니? 연민(憐憫)이 인다. 사위가 가을비처럼 쓸쓸하다. 바위에 앉아 병 마개를 딴다. 속이 짜르르하다. 다시 들국화를 본다. 아냐, 아니야, 이 가을에 꽃피운 것 하나만으로도 너는 너의 삶을 잘 살아온 거야. 열매 없다고 무슨 연민이니?

누구나 다 열매 풍성히 맺을 수 없어.

가녀린 꽃이나마 피워 낸 것도 감사할 일이라네.

겨울

우리 집은 山 밑이다.

가을 잎 흩날리더니 깜짝할 새 또 겨울이다.

연 사흘을 두고 폭설이다. 빠끔하다 싶으면 또 퍼붓는다. 작은 배낭 하나 매고 집을 나선다. 퍼붓는 눈 속에 오전 열시가 고즈넉하다. 드디어 山이다. 갑자기 쏴 바람이 몰아친다. 귓가에 윙 소리가 지나간다. 이 山엔 좁은 길이 두 갈래로 나 있다. 어느 길로 가든 가야봉(峰)에 닿는다. 그러므로 그 한 길을 못 간다 해서 서운할 건 없다(And sorty I could not travel both. ㅡRobert Frost).

아, 저만치 누가 간다. 셋인지 넷인지 분간이 안 된다. 그 뒤를 또 누가 간다. 둘이다. 험한 눈길, 나는 그들이 남겨 놓은 발자국을 밟으며 간다. 그러나 퍼붓는 눈에 지워져 거의 다 희미하다. 뒤를 돌아본다. 누가 따라온다. 나는 그를 위해 발자국을 깊이 내려 했지만 내 힘으로는 별로 깊어지질 않는다 문득 그런 내가 우스워서 그냥 걷기로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른다. 걸음마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 또 뽀드득 소리가 난다. 맞아, 이건 개구리 우는소리야. 뒤에 오던 몇 사람이 나를 지나 내 앞을 간다. 바쁜 걸음이다. 어딜 저리 서둘러 갈까? 나는 여전히 천천히 간다. 그들과 겨루며 바삐 갈 이유가 없다. 그냥 이렇게 걸으면서 내 고향 여름 논의 개구리 소리나 들으면 된다.

맞아, 서운하게 생각할 것 없어. 욕심낼 것도 없고.

서두르지도 마라, 그저 마음 편하게 살면 돼.

 

 

- 정진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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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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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겨울나무 | 작성시간 24.07.28
    옛날 어린시절 추억이 아련히 떠올라 가슴이
    뭉쿨 하네요.

    좋은글 마음에 담아
    갑니다
    행복한 오후 되십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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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초원의 꽃향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2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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