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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08.04|조회수114 목록 댓글 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 골목에서 이렇게 꼬부라져 왼쪽으로 돌았지, 그러면 이 길이 뒷골목에 연결되어 있었으니 아마 이 집이 맞을 거야. 아냐, 난 자신이 없어.  집 구조를 보라구. 그때보다야 변하긴 많이 변했지만 저 아래채에 그 여학생이 살았고 넌 이 위채 방에서 살았잖아. 이 집이 틀림없을 거야. 글쎄, 그래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어.

 

이십 몇 년 만에 서울에서 친구가 와 옛날에 살던 동리의 골목길을 더듬어 우리가 살았던 집을 찾아 나섰다. 그와는 고등학교 동창으로 교회에도 함께 다녔을 뿐 아니라 밤낮으로 좁은 골목을 더욱 비좁게 푸닥거리던 어릴 적 친구였다. 그러니까 십오육 세의 가장 소년기적인 몇 년 동안을 함께 생활하다시피한 내 생애 중에 사귄 가장 잊지 못할 친구 중의 하나이다.

 

당시 어머니는 나와 남동생의 교육을 위해 시골의 논 서마지기를 팔아 학교와 가까운 이곳에 사글세 방 하나를 빌어 힘겨운 도시생활을 하고 있었다. 또 그 친구는 바람난 아버지의 얼굴을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하였고 보따리장수로 떠도는 어머니 밑에서 두 동생과 함께 절(寺利)집 아랫방 하나를 세 얻어 생활하던 터였다. 둘 다 가난한 부모의 맏이로 도시의 단칸 셋방에서 동변상련중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하학하기가 무섭게 왼발 오른발이 되어 쫄쫄거리며 돌아다녔었다.

 

우리 집은 이 동리에만도 다섯 번이나 이사를 하여 어느 집을 우리집이라고 꼭히 단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친구는 고둥학교 일이학년때 살았던 나지막한 흙담 위에 초가지붕을 바로 덮은 골목 안집을 우리집이라고 일컫는 것 같았다. 그 집에는 다섯 가구가 모두 일곱 개의 방을 사용했고 나머지는 단칸이었다. 두 개의 방을 쓰고 있는 두 가구 중 한 가구는 우리가 다니던 교회의 고등부 부회장인 같은 또래의 예쁘장한 소녀가 살고 있었다. 때문에 친구의 의식 속엔 우리집이 바로 그 소녀의 집이었고 그 소녀의 집이 우리 집이어서, 삼십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강렬한 인식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실로 삼십년 만에 옛 살던 나의 집을 찾아간다는 감회는 작은 환희로 바뀌어 발걸음 또한 가벼웠지만 “이 집이 나의 옛집”이 라고 자신있게 말하기엔 우리 너무 늙어 있었다. 이렇게 세월은 아득함만 안겨 주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까지 덤으로 얹어 주니 지나온 옛날을 결코 인정 하나만으론 넘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고향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산 능선의 윤곽만은 항상 회상의 끝에서 아물거리지만 막상 찾아가 보는 고향의 하늘은 색깔과 햇볕까지도 달라져 버린 것을. 더욱이 아는 이의 얼굴 하나 없는 고향 마을의 텅빈 골목길은 이미 정두고 떠난 고향이 아니란 것을.

 

그래서 한번 떠나온 고향은 찾아갈 수 있는 땅 위에 없고 다만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다고 하지 않는가. 큰길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동리 입구의 그때 팔뚝 굵기의 수양버들은 벌써 가슴 넓어진 장년으로 약간은 늙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몫 좋은 가게터는 여전한데 유리상자 속의 눈깔사탕은 간 곳 없고 우리가 먹어보지 못한 아이스크림과 고급과자들만 쌓인 채 우리들의 일어버린 시간은 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았다.

 

우리들의 위안을 위하여 추억을 위하여 가내공업공장으로 변해 버린 남의 집을 막연함 속에서도 삼십 년 전의 내집이라 결정하고 뒷골목으로 돌아 나왔다. 섣달의 매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가자 찬 바람에 유독 약한 두 눈엔 눈물이 괴었다. 그땐 뒷골목의 전주마다엔 ‘귓병 전문’ 이란 쪽지가 붙어 있었고 귓병 전문 강영감의 딸을 ‘귓병집 딸’ 이라고 놀려대곤 했었지.

지나온 과거가 모두 옛날은 아니다.

 

가난했을망정 행복했던, 그것이 오롯이 기억으로 남아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듯 그리움이 얼음 위의 너테처럼 덕지덕지 쌓인 추억일 때 비로소 옛날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거에 살지 않고 추억 속에 산다. 과거가 있는 여자는 추하게 느껴지고 과거를 추억으로 받아들이는 여자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과 같이.

 

우리가 매양 다니던 골목길을 따라 아래쪽으로 이삼백 미터 떨어진 친구의 옛집을 찾아 나섰다. 좁은 골목은 조금도 넓어지지 않고 다만 인도 블록이 깔렸을 뿐 그대로이다. 그러나 너비 오십 미터의 대로가 마음속에 항상 ‘우리의 골목’ 이라고 생각하게 했던 추억의 소로를 절단시켜 놓고 있었다.

 

시간의 단절일까? 산천도 골목도 심지어 하늘까지도 시속(時俗)에 따라 변할 뿐 떠난 이의 마음속에서는 변하지 않는다. 과거는 오늘에 순종하지 않고 간절한 그리움은 그리움 자체까지도 배반당할 때가 있다. 서북쪽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휴지 한 장을 날리며 우리 앞을 지나간다. 친구와 나는 세월을 끊어 놓은 대로를 횡단보도란 교량으로 건너 삼십년 전으로 걸어간다.

 

하이드 앤 시크(Hide and Seek). 옛날은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좀처럼 술래는 잡히지 않는다. 친구가 살던 옛 절집은 아미산 염불암이란 이름을 달고 중늙은이인 대처승이 하루에 반 이상을 술에 취해 살고 있었는데……. 요사채로 지었던 부속 건물의 많은 방들은 하나같이 사글세 방으로 내주어 월세가 밀리지 않도록 방세 독촉을 염불처럼 외고 다녔었지. 요사채 자리의 낡은 방들은 헐린 후 신식건물이 들어서 염불당이란 당호를 이마에 붙이고 있었다. 낡은 대웅전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시멘트 구조물이 목조건물의 멋을 낸 대규모 현대식 사찰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대한불교 조계종 제 9교구 포교당 아미산 원각사>

비로소 우리는 다리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왜 옛이 옛 그대로 머물러 주지 않느냐는데 대한 회한만은 아니었다. 변해 버린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그 그리움 때문에 다시 찾아온 미련에 대한 증오였다고나 할까.

 

이날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 놀이는 시간의 실체를 찾지 못해 약간은 허망했지만 절망할 정도는 아니었다. 골목에서도, 초가가 슬레이트로 변한 지붕의 처마에서도, 일방통행로로 변한 큰 길에서도, 사람은 바뀌었지만 옛 그대로인 가겟집 아줌마의 얼굴에서도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 그 기산의 일부는 만날 수 있었다.

 

늦은 밤 교회에서 성가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달리는 지프 뒷꽁무니에 매달렸다가 단 한 번 넘어졌던 기억. 수돗물이 현금인 시절이라 하학 후엔 물지게를 짊어지고 다리목 공동 수도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우리의 실루엣.

 

땔감으로 톱밥과 피죽을 사기 위해 제재소로 드나들며 머리칼이 뽀오얗게 톱밥가루를 덮어쓴 일들. 무엇이 그렇게 그리웠던지 항상 마음은 텅 비어 있었던 사춘기.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와 새벽송 돌던 새벽길. 우린 골목에서 골목으로 어린 시절을 쫒느라 아이 마음이 되어 있었다.

 

기름이 떨어져 가는 램프에 한 방울의 기름을 아껴본 사람이라면 심지를 올리는 대신 등피인 유리를 닦는다고 했다. 심지를 활짝 올려 옛날을, 질기도록 매달려 있는 그리움을 활활 태우기 보다는 정성스레 유리를 닦는 것이 우리가 오늘 행한 이같은 작업이 아닐까 싶다.

 

친구는 오후 열차편으로 서울로 떠났다. 떠나면서 그는 4년째 간염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삶도 죽음도 하늘에 달려 있다고 했다. 부디 그와의 잃어버린 시간찾기 놀이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를. 잃어버린 시간이 더욱 아름다워지는 날엔 종종 이렇게 ‘동화 속의 소년’ 이 되어 우리들의 젊은 날고 그날의 꿈이 걸려 있는 골목길을 함빡웃음 앞세우고 배회할 수 있도록.



 - 구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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