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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

작성자초원의 꽃향기|작성시간24.10.04|조회수74 목록 댓글 0

 

만추 

 

 

 

 

 

 

 

 

 

붉게 물든 숲과 빈들을 지났다. 단풍들어 풍성한 산과 비어서 오히려 넉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세 시간 남짓, 동네 어귀에 내려서 사라져 가는 버스를 한동안 바라본다. 십여 년 만이다. 그 짧지 않은 세월이 주춤거리게 해서 버스가 집 앞을 지나가는데도 미리 내렸다. 입 속에서 첫 마디를 해본다.

 

마을은 조용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평화로움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있는 듯 하다. 길이 포장된 것 말고는 별로 변한 게 없다. 짙은 녹색 페인트가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는 철대문이 반쯤 열려 있다. 한낮, 집은 적막 속이다. 대문에서 툇마루까지 한 줄로 놓여 있는 디딤돌을 천천히 밟는다.

 

툇마루에 앉아서 마당을 둘러보니 장독대 곁에 배나무가 작은 주먹만한 돌배를 몇 개 까치밥처럼 달고 있다. 담장이 허술한 옆집은 비었는지 마당에 잡초와 검불더미가 그득하다. 무섭지나 않은지, 초인종 삼아 툇마루를 주먹으로 몇 차례 쿵쿵 쳐본다. 타월로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면서 그가 집의 왼쪽 모퉁이를 돌아 나온다. 첫 마디는 무슨, 그냥 말없이 껴안는다.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인 그리고 여덟 살 아래인 나는 말을 찾지 못한다.

 

나는 그를 언니라고 부른다. 혈연도 학연도 없는 그를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수성못가의 어느 찻집이었다. 스무 해도 더 된 이야기다. 그 날 나는 친구와의 약속으로 그 자리에 갔었다.  한쪽 폐의 상엽을 떼내는 수술을 받고 회복된 그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만든 시간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나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 중이었다. 대각선으로 맞은편 자리에 그가 나처럼 혼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얼굴로, 어쩌면 저런 얼굴일까. 차를 다 마셨지만 나는 왠지 자리를 뜰 수 없었다. 그가 무거운 동작으로 문을 밀고 나갔다. 조금 후에 나도 일어섰다.

 

밖에 나오니 못가의 긴 의자에 그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머뭇머뭇 다가가서 긴 의자의 한쪽 끝에 슬며시 앉았다. 십 분쯤이나 그렇게 있었을까. '저어......' 하고 내가 운을 뗐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어제가 기일이었다고 했다. 남편과 그 찻집에 자주 왔었다는 말도 하였다. 서른 세 살의 여인에게는 어린 남매가 있었다. 그 심경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나는 그의 모습과 저물 무렵의 못물과 가을 나무들이 자아내는 정취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매처럼 지냈다. 눈만 뜨면 자동차들이 보이는 이 도시가 죽도록 싫다하기에 시골로 가라고 그때마다 권했다. 아이들 교육 때문에 안 된다고 용케 버티더니 작은 아이 대학 보내면서 이사를 했다. 남편 산소가 그리 멀지 않은 마을로 옮긴 것이다. 그때 따라 왔었는데 그새 십 년이 흘렀다. 미안하다. 세월이란 게 사람을 잊게 만들고 바쁘다는 핑계가 늘 용서해 주었다. 여러 가지로 몸과 마음이 무척 고단했던 이즈음 부쩍 그가 보고 싶었다. 그토록 비우기 어려웠던 하루란 시간을 거머쥐고 나는 길을 나섰다. 결국 내가 쓸쓸해서 그를 찾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영락없는 시골 아줌마다. 하지만 표정만은 정돈되고 기품 있어 보인다. 나 또한 그만한 시간의 흔적을 지녔겠지만 우리는 둘 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라고 인사치레를 한다.

 

그곳에 가보자는 내 말에 '거기는 뭐 하러'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다. 블라우스 바지 자켓, 단정하다. 대문 앞에 경운기 한 대가 멎더니 아지매요 건장한 남자 목소리가 들린다. 텃밭만큼이나 작은 규모의 농사를 도와주는 이웃 젊은이란다. 경운기 짐칸에 앉아서 흔드릴며 마을을 빠져 나온다. 논밭 사이로 난 농로를 덜커덩거리며 지나고 과수원을 거쳐서 무밭 배추밭 잔해만 남은 고추밭을 지나니 산기슭이다. 산기슭에 내려서 오솔길로 접어든다. 길섶에는 칡덩굴이 널브러져 있고 노란 산국도 듬성듬성 보인다. 갈참나무 낙엽들을 밟으며 한참 걸어서 산소에 닿는다.

 

얼굴도 모르는 분의 유택, 한 여인의 젊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고집 세고 완고한 한 남자의 무덤 앞에서 나는 길게 목례를 한다. 그 분의 여인은 짐짓 무심한 얼굴로 산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그는 몇 번이나 저런 모습으로 여기에 서 있었을까. 그를 두고 지순한 사랑이라든지,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여인이라든지 그런 진부한 평가는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아파서 싫고 그가 실제로 그러했을까 두려워서 싫다.

 

그가 살아온 삶이 그에게 가장 알맞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의 삶이 그를 평화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가치 있게 한 것이라 여기고 싶다. 지금 그의 모습을 보면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지 않다. 그는 깊고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다. 한 생애를 참으로 잘 살아온 사람만이 그런 표정을 지닐 수 있지 않겠는가.

 

저만치 그가 앞서 내려가고 있다. 구름 몇 점 떠있는 하늘은 높고 가을은 깊을 대로 깊었다.

 

 

- 허창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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