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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 감동글

야반도주를 하다

작성자고쿠락|작성시간23.05.08|조회수113 목록 댓글 0
야반도주를 하다/장명자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기 전 날이었다
대구사범 본과를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던 나는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로 이사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느닷없이 S가 나타났다.
대학교에 갓 입학을 한 그는 내가 서울로 가야 한다는 일이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자칫 나를 놓칠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꼈나 보다
어디서 그런 배짱이 생겼는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대뜸 따님을 사랑하고 있으니 나에게 딸을 달라는 간청을 하는 것이었다.
불같고 지엄한 아버지의 성격으로 봐서 정말 씨알도 안 먹히는 당돌한 짓이었다. 아버지는 집안에서 황제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한다.
온갖 수모를 다 받고 S는 쫓겨 나갔다.
서울로 가면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학교 발령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말씀에 끌려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는 그냥 아버지의 법이었다. 나는 대구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거역 할 수 없었다.
창동 산기슭에 살면서 무료하게 학교 발령을 기다리고 있던 봄날이었다.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디서 낯익은 휘파람 소리가 휘릭!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보니 저만치 언덕쯤에서 S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휘파람은 대구에 있을 때부터 둘이만 통하는 비밀 신호였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늘 궁금하던 그 사람이 나타났다. 그가 나를 찾아 온 것이다. 화들짝 정신이 들어왔다.
아무 말 하지 말고 날이 어두워지면 집을 빠져 나오라면서 언덕 아래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한다.
밤이 깊어지도록 곰곰 생각 해 보았다.
철옹성 같은 이 집안에서 계속 견딘다는 일이 나에게는 또한 옥살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살아 갈 일이 까마득했다.
그래 나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사람뿐이다 싶어 따라나서기로 결심했다.
밤이 깊어지고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에 아무 소지품도 없이 살며시 집을 빠져나왔다
그 때부터 앞이 분간 안 되는 깜깜한 산을 몇 개나 넘었는지 모른다. 무작정 뛰고 걸었다. 긁히고 넘어지고 분간이 안 되는 어둠 속이었다. 그 시절 서울변두리는 사정이 그랬다. 밤새도록 산과 들을 건너서 날이 밝을 무렵 서울 역에 도착 했다.
경부선을 타고 가는 동안에도 아버지가 곧 나를 잡으러 뒤 따라 오는 것만 같아 겁이 났다
그렇게 십년감수를 하면서 야반도주를 하여 대구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무섭기도 했지만 이것은 나의 혁명이었고 해방을 위한 실행이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지 한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서울로 가서 나를 데리고 오고 싶어 교육청에 내 발령 여부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 나이에 괘나 똘똘한 청년이었다. 교육청에 가서 보니 내 이름이 아직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모두 발령을 받아서 갔는데 왜 이 사람은 소식이 없느냐면서 앞으로 며칠 내로 등록이 안 되면 취소가 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길로 S는 부랴부랴 서울로 와서 어찌 수소문을 했던지 동생이 다니는 학교를 찾아가서 동생을 찾아냈다고 한다. 대구에 있을 때 내 동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집으로 가는 길을 뒤밟아 우리 집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이나 늦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운 좋게도 학교 발령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그 뒤에 S가 군에 입대 한 뒤 휴가 중에 혼인식을 올리게 되었다. 의성에 있는 시할아버지 댁 넓은 마당에서 구식으로 혼인식을 올렸다. 물론 친정 식구는 아무도 없었지만 속으로 울음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울지 않았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안고 아이가 셋이 생기도록 교직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10년이 넘도록 아버지는 물론 친정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노심초사 굳은 마음뿐이었다
나중에 미국에서 귀국한 4촌 언니가 내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우리는 야반도주 이 후 오래간만에 부녀 상봉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로는 내 행위가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일이었다.
사랑을 쫓아 부모를 배반한 잘못을 아버지 앞에 빌고 우리는 화해를 했다.
그 동안에 울고불고 짜던 파노라마는 너무 옛날 얘기 같아서 이야기를 이만 줄인다.
-장명자 시집<내가 만든 꽃신>중에서


장명자 프로필
1938년 생으로 개성의 부유한 지주의 맏손녀로 내어난 뒤 출산 9개월 만에 생모가 돌아가셨다 
1.4 후퇴 때 아버지가 계시는 대구로 가서 살았다 
1958년 대구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20년 동안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서울 영훈초등학교에서 퇴직했다 
지금은 봉사활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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