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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기억은 많을 수록 좋다 (노희경 작가님 글 펌입니다)

작성자베셀|작성시간15.09.04|조회수9,066 목록 댓글 8

 나는 경남 함양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칠 형제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내 출생은 그다지 경사스런 일이 아니었다

 뱄으니 낳을 뿐 기대도 기쁨도 없는 출생이었다

 있는 자식도 하루 세끼 밥 먹이기가 버거운데 또 다시 자식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어머닌 날 낳으시고 우셨을 것이다

 암죽이 서 말이라고,

 젖먹이가 돈이 더 드는 법 아닌가 하여 나는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싸인 채 윗목에 올려졌다

 군불 닿지 않는 윗목에서 사나흘 있으면

 제 스스로 목숨줄이 떨어져 나가 집안의 고단을 덜어줄 거다

 할머닌 우는 어머니를 밀치고 나를 윗목에 놓고는

 누구든 애를 건사하면 혼쭐이 날 거다 하셨다 한다

 나는 한겨울 싸늘한 윗목에서 그렇게 보름을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살아남았다 기적은 아니었다

 큰 언니가 어머니의 사주를 받아

 할머니가 밭에 나가고 들에 나간 시간

 생쌀을 씹어 내 입에 넣어 주었던 것이다


 내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이후 집안이 위태로울 때마다 짐처럼 여겨졌다.

 내 기억이 확실하다면 네 살 무렵에 효창동 주택가에

 어머니가 나를 버리고 돌아서신 적도 있었다.

 물론 착하고 여린 어머닌 몇 걸음 못 가

 나를 다시 끌고 집으로 돌아오셨지만.

 그때, 집으로 돌아와 내 등짝을 후려치며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애미가 널 버리고 가는데, 어째 울지도 않느냐.”

 이후 나는 마치 나를 버리려 했던 가족들에게

 복수라도 하듯 정말 지겨우리만치

 그들의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담배를 배우고

 (물론 들키는 바람에 이내 피울 수 없게 됐다),

 고등학교 땐 못 먹는 술을 먹어 병원에 입원까지 하고,

 툭하면 사고를 쳐 어머니가 학교에 불려 다니고,

 대학은 재수를 하고, 셀 수도 없이 집을 나가 떠돌고.

 내가 기억하는 잘못만 이러한데,

 기억하지 못하는 잘못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런 연고로 나는 사흘돌이

 ‘천하에 쓸데없는 계집애’란 말을 들으며 성장했다.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조차도

 나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보았다.

 오죽했으면 직장에 들어가 첫 월급을 타던 날,

 친구가 내 손을 잡고

 ‘네가 사람이 됐구나’ 하며 울었겠는가.

 

 그 시절은 이제 와 내게 좋은 글감들을 제공한다.

 나는 한때 내 성장 과정에 회의를 품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만약 가난을 몰랐다면

 인생의 고단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만약 범생이였다면

 낙오자들의 울분을 어찌 말할 수 있었겠으며,

 실패 뒤에 어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나는 작가에겐 아픈 기억이 많을수록 좋단 생각이다.

 아니, 작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나 아픈 기억은 필요하다.

 내가 아파야 남의 아픔을 알 수 있고,

 패배해야 패배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갖는 내게도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밥벌이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렸다면 좋았을 것을.

 지금, 방황하는 사람들,

 그대들의 방황은 정녕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어머니가 살아 있는 그 시기 안에서

 부디 방황을 멈추라.

 아픈 기억이 아무리 삶의 자양분이 된다 해도,

 부모에 대한 불효만은 할 게 아니다.
 대학 때 가출한 나를 찾아 학교 정문 앞에서

 허름한 일상복으로 서 있던 어머니가 언제나 눈에 밟힌다.

 그때도 이후에도 왜 난 그분께

 미안하단 말 한마디를 못했을까.

 바라건대, 그대들은 부디 이런 기억 갖지 마라.

 

● 그 뒤의 이야기●
 이 글이 나가고 한참 후에 나는 큰언니로부터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얻어들었다.

 내 출생 당시의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것이다.

 엄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쓴 건데,

 그럼 엄마가 거짓말을 했다고?

 가슴이 쿵 했다.

 큰언니의 말은 이랬다.
 엄마는 당시 자식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딸은 더더욱 원하지 않았다.

 가난한 살림에,

 남편은 애나 만들어주려 집에 들를 뿐

 생계는 아랑곳없는 사람인데,

 다섯도 모자라 여섯째라니,

 것도 자기 팔자 닮을 게 뻔한 계집아이라니.

 엄마는 나를 낳아놓고,

 칼바람이 돌게 앉아 있다가 나를 윗목에 놓았다 한다.

 엄마와 열일곱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큰언니와

 스물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큰오빠는

 그런 엄마가 무서웠다고 한다.

 어떻게 제 자식을 윗목에 놓아 죽이려 하나.

 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고

 악다구니를 쓰셨다 한다.

 그러고는 할머니의 사주로 큰언니가

 생쌀을 씹어 나를 멕이고,

 그래서 연명하는 날 보고 할머니가

 엄마에게 간곡히 말했다 한다.

 “애가 저리 놓아두어도 아니 죽으니, 그냥 키워라.”

 가해자가 완전 뒤바뀐 이 끔찍한 이야기를,

 별로 알아서 좋을 것도 없는 이 이야기를

 큰언니는 왜, 무엇 때문에 내게 하는 것일까?

 이 사실을 몰랐다면,

 전에 전에 엄마에게 내가 깊은 사랑을 받았었구나,

 아파도 예쁜 추억 하나 생기는 건데.

 

 이야기를 들은 첫날,

 나는 이불 속에서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내 이렇게 정리가 됐다.

 그때 내 어머니의 나이는 서른한 살의 꽃다운 나이.

 자식은 여섯에, 남편은 남만 못한 남자.

 힘도 들었겠다.

 자식이 짐스럽다 못해 원망도 스러웠겠다.

 없었으면 천 번 만 번도 바랐겠다.

 굳이 출생 즈음의 이야기는 안 해도 되는 걸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에게 해준 건,

 죄의식이었겠다.

 너무도 미안해서였겠다.

 이후에, 나를 참 예뻐라 했으니, 그것으로 다 됐다.

 생각을 이렇게 말끔히 정리하고 잠이 들며

 나는 내가 참 컸구나 싶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게 뭐 그리 많겠나 싶다.

 다만 상대의 마음을 잘 알지 못했을 뿐이지.

 큰언니의 저의도 이해가 갔다.

 내가 너를 살린 거라고.

 그렇다. 큰언니는 늘 나를 살렸다.

 작은언니도, 큰오빠도, 작은오빠도, 막내언니도

 늘 나를 살렸다.

 참 예쁜 형제들.

 그리고 불쌍한 울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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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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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푸른 자유 | 작성시간 15.09.04 감사합니다, 담아가 나눕니다 ~
  • 답댓글 작성자베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04 고운 흔적 감사합니다
    좋은 오후 되세요~
  • 작성자watercolour | 작성시간 15.09.05 세상에 이해못할 일이...
    그저 마음을 열어보면....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베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06 고운 흔적 감사드리며
    편안한 휴일 되세요
  • 작성자미나로즈 | 작성시간 15.09.08 베셀님 !
    안녕 하세요
    님의 글에
    첫 걸음 합니다

    노희경 작가님의
    아픈 기억을 끌어 올리어
    써내려간
    '아픈 기억은 많을 수록 좋다" 를
    올려 주셨네요

    지금, 이 시간에도
    매일 살아내야 함이 힘들고
    고달파 하는 분들에게
    노희경님의 글이 가슴안의
    생각을 올곳이 다지게 하고
    튼실이 삶의 방향을 잡아갈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의 역할을...,
    고맙습니다
    좋은글 조용히 읽고 가네요

    건강히 새날 맞이 하시어
    오늘도
    신나고, 멋지게...
    많이 웃으시는 날 되시길요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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