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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 And Overview of Samba Music - 삼바 음악의 기원과 개요 - 3

작성자해송.|작성시간24.05.03|조회수172 목록 댓글 0

Origin And Overview of Samba Music - 삼바 음악의 기원과 개요 - 3

 

브라질에서 시작된 Samba 음악의 유래는 브라질에서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 많은 이들이 Rio de Janeiro로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Cidade Nova"가 생겨났는데, 이는 "새로운 주거형태"라는 뜻으로 "신도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네의 예전 모습과도 같은 "Moro(산동네)"에 "Pavela(빈민촌)"가 형성되었고, 이 "Pavela"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슬픔을 달래고자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정서가 나타난 것이 바로 Samba 음악입니다. 지금도 유명한 삼바학교(Escola de Samba)의 회원들이 모여서 벌이는 "Carnaval"을 통하여 이 Samba 음악 형식이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 "사순절(lent)"기간중에는

 

육식을 하지 않았는데,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먹고 즐기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것이 Carnaval"(사육제 謝肉祭 - carnival)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Carnaval"의 기본이 되는 음악이 바로 Samba 로, Carnaval을 통해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초기에는 각 Samba 학교별로 소규모로 행해졌으나,1935년 Rio市 당국이 규모가 커진 "Carnaval"을 오늘날과 같은 "Carnaval"로 인정하였고 지금도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유일한 집단적 참여문화의 형태로 매년 2월에 Rio에서 열립니다. 1670년대 포르투갈 사람들이 January River(Rio de Janeiro)라고 부르는 남미 지역을 발견했다. 그들은 거기서

 

정착하고 성장했는데 나중에 브라질의 북동부지역이 된  Bahia라는 지역으로 콩고와 앙골라에서 일하는 노예들을 데려 왔다. 이들 흑인 노예들은 고향에서 사용되던 아프리칸 리듬으로 된 Caterete, Batuque, Embolada 라는 춤을 추면서 각자가 모시는 신을 불러냈다.(삼바라는 뜻은 개인 신에게 빈다는 뜻이다) 이러한 리듬들이 나중에 라티노 뮤직이 된다. Batuque는 Charleston과 스텝이 비슷했는데 손뼉치는 비트와 타악기의 소리로 이루어져 유행했었는데 Manuel I세가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다. 배꼽을 만지는 것을 포함해서 이 자연스러운 춤이 유럽사람들에게는 죄악시 되어 보였고 그 때문에 억압했던 것이다. 이런 종교적인 아프리카 리듬은 오늘날 댄스에서 음악의 장르를 만드는데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Samba 라는 이름은 Zambo에서 왔는데 잠보는 브라질 원주민의 애들 또는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는 Bantu라는 단어에서 왔다고도 하는데 조상의 영혼에 기원한다는 뜻이다.

 

 

Batuque de Julio Silvao Tavares Extrait

https://youtu.be/qSyLpBppHjo

 

1830년대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원주민인 Lundu족과 섞여 들어갔고 브라질의 스웨이와 바디 롤이 들어간 니그로 춤이 같이 엮어지면서 춤이 발전되어 나갔다. 카니발 스텝이 점차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때 클로즈홀드의 유럽방식이 들어 왔으며 리오의 상류층에서는 그것을 Zemba Quecca로 알려진 최근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Mesemba라는 춤으로 수정 보완되었다. 19세기를 전환점으로 해서 Mesemba는 Maxixe와 결합되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성행했다. 파리에 들어왔을 때도 대유행을 했었고 지금도 Maxixe 스텝을 쓴다. 1930년대에 Carioca라고 불리던  삼바의 형식이 영국에 있었으며 미국에는 1939년 Carmen Miranda라는 사람

 

이 들여왔다. 1939년 뉴욕세계 박람회에서 삼바가 공연되었으며 정착했다. Carmen Miranda, Fred Astaire와 Ginger Rogers가 나오는 Flying down to Rio 라는 영화 및 That Night in Rio 등 다른 여러 영화들이 삼바인구를 폭발적으로 늘게 했으며 라틴댄스에 흥분과 흥취를 가미하면서 밴드들도 라틴음악을 좋아했다. 이 삼바의 최고의 해석자가 바로 영국의 Walter Laird와 그의 파트너 Lorraine이었으며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 왔다. 파소도블레처럼 삼바도 프로그레시브 댄스이며 전세계에서 대회는 물론 사교춤으로서도 성행한다. 당연히 삼바는 사순절이 시작하는 부활절 전부터 40일간 펼쳐지는 리오 카니발의 백미이며 1928년 설립된 삼바 스쿨을 중심으로 거리에서 퍼레이드를 광적으로 펼친다.

 

 

Festival de Maxixe - Clube Tradição - Canoas (High Definition)

https://youtu.be/eMbn7zSjrJw

 

Batuque (바투케)

바투카다는 둥둥 두드리는 북소리를 의미하는 '바투크'(Batuque)에서 비롯한 말로, 멜로디 없이 북으로만 연주하는 타악 앙상블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에서 브라질에 온 흑인노예가 전한 아프리카 기원의 갖가지 음악과 춤이 유입되었는데 그 중 하나로 바투케(batuque)가 있다. 유럽의 고급문화를 본 딴 변화도 꾀해 카니발 최초의 가면무도회가 1840년 리우에서 열려 왈츠와 폴카를 포함한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으나 결정적인 새로운 변화는 1848년 거리의 한 젊은 포르투

 

갈인 구두닦이 Jose Nogueira Paredes가 카니발 퍼레이드에 참가하여 커다란 베이스드럼을 치면서 찾아왔다. 이 해 이후 수많은 축제 참가자들이 드럼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어 1850년 흔히 sociedade로 불리는 귀족집단의 후원을 받아 말, 군악대, 장식행렬이 등장하여 경쟁적으로 거리를 행진하는 최초의 유럽식 퍼레이드가 열렸다. 이즈음 질서정연한 퍼레이드에 지루함을 느낀, 값비싼 가면무도회 티켓을 살 수 없는 리우의 가난한 서민들은 남성으로만 구성된 cordoes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리듬을 따라 요란스럽게 거리축제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Origins of Samba  (삼바의 기원)

[ 글출처 : Paul F. Clifford ]


몇년전 브라질 작가협회의 사무실에서 작곡가이자 음악가인 이스마엘(Ismael Silva)를 만났습니다.  그는 28년에 리오에 최초로 삼바학교를 건립한 사람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동가(Donga) 역시 그자리서 같이 만났는데, 그는 삼바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정식 레코딩을 한 음악가로 인정되는데, 여기서 우리는 진정한 삼바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Pelo Telefone - Martinho da Vila, Nelson Sargento e Diogo Nogueira

https://youtu.be/yeB9oBsFLrU

 

Donga: Ué, ué. Samba é isso há muito tempo
O chefe da polícia
pelo telefone
mandou me avisar
que na Carioca
tem uma roleta para se jogar.

Ismael: 'Pelo Telefone!' Isso é maxixe!
Donga: Então o que é samba?
Ismael: É este!
Se você jurar
que me tem amor
eu posso me regenerar
mas se é pra fingir, mulher
a orgia assim não vou deixar.'
Donga: Isso não é samba, é marcha!  Donga: Ué, ué. Samba is this. Has much time

The head of the police
On the telephone
Had to inform me
That in Carioca
There is a roulette wheel, should you like to play

Ismael: 'On the Telephone!' This is maxixe!
Donga: So what is samba then?
Ismael: It is this!

If you'll swear
That you love me
I can become a good man again
But if you want to fake it, woman
I won't leave the orgy
Donga: 'Se Voce Jurar' is not samba! It is a marcha! 
동아: 우에, 우에. 삼바는 정말 하무이토 템포야
오페다폴리시아
펠로 텔레폰네
나에게 비자를 요구합니다
카리오카 여왕
템마롤레타 기생충 조거.


이스마엘: '펠로 텔레폰!' 나는 에막시제!
동아: 엔탕오케 에 삼바?
에스테!
세보케주르
que me temamor
유로파 재생기
매스 에 프라핑기르, 멀허
오르가니아는 nang voudeixar와 같습니다.'
동아: 이소낭 에 삼바, 에 마르카! 동아: 우에, 우에. 삼바는 이거. 시간이 많음


경찰의 우두머리는
전화로
내게 알려줘야 했어요
카리오카의 그것
룰렛 휠이 있습니다. 플레이 하실래요


이스마엘: '전화로!' 막시제입니다!
동아: 그럼 삼바는 무엇입니까?
이스마엘: 바로 이것입니다!


맹세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나는 다시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네가 그것을 가장하고 싶다면, 여자
나는 미치광이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동아: '세 보체 쥬라'는 삼바가 아닙니다! 그것은 행진곡입니다!


이스마엘은 인터뷰도중에 삼바의 역사에 대해서 사람들은 삼바의 처음을 이 노래 Pelo Telefone이라고들 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막시시라 불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모로(Morro)지방(리오근처의 언덕지역)에서 삼바는 바투카다(batucada: 아프리카계의 리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기본적인 리듬은 2/4박자이며 드럼이나 손으로 만든 타악기, 손뼉 등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원을 그려 가며 춤을 춘다. 삼바의 원형으로 생각되는 브라질 흑인의 집단 무도)를 의미합니

 

다. 이 삼바 즉 바투카다는 행진하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야 할 음악적 필요성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삼바는 흥미로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바이아(Bahia)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는 흑인이었고 노예였었습니다. 삼바는 이때부터 사회적이면서도 음악적인 필요에 의해서 발생한 것입니다. 동가(Donga)는 내가 닐턴(Nilton Bastos)과 함께 31년의 카니발때 작곡했던 삼바곡 Se voce jurar는 마르차 (marcha) 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아닙니다. 삼바는 막시시하고 다르니까요. 그것은 바투카다입니다.

 

Ismael Silva - Se Você Jurar

https://youtu.be/26QToE8gwtg

 

넓은 땅과 다수의 인종이 살고 있으므로 그 음악도 복잡하다. 인종적으로 대별하면 원주민인 인디오와, 16세기 이후에 들어온 라틴계, 특히 포르투갈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과 그후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 온 니그로의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부류가 브라질 민족문화에 다양하게 혼합되어 있다. 인디오의 음악은 각 부족이나 종족이 문화를 달리하며, 각 부족에만 한정되어 있어 아직 국가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 않으며, 연구도 그다지 되어 있지 않아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독특한 음악 무용이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니그로계의 음악의 영향은 매우 짙으며, 다른 유럽계의 요소와 융합된 것 이외에도, 순수하게 아프리카의 의식음

 

악 등이 전해진 것도 있고 근년에는 니그로적 요소가 강한 쿠바의 음악이 들어와 있다. 악기는 현악기로는 유럽계의 것이 많으며, 손으로 만든 바이올린(라베카 rabeca)·비올라(viola:기타의 일종)·비올랑(viol o)·카바키뇨(cavaquinho:우쿨렐레와 비슷한 것)·우르쿵구(urcungo:弓琴) 등이 있다. 타악기로는 일반적으로 선율적이 아니고 리듬적 음악인 니그로계의 악기가 많으며, 수르두(surdo:콩가의 일종) 탕부르(tambor) 콘트라룬(contrarun) 쿠이카(cuica) 카이샤(caixa) 등이 있다. 체명악기로는 마라카스의 일종인 카바사(caba a)·아포셰(afoxe)·레코레쿠(recoreco), 카우 벨의 일종인 센세로(cencerros)·트리앙굴루(triangulo)·마림바 등이 있고 관악기

 

로는 플라우타(flauta)·피스탕(pist o)·산포나(sanfona) 등이 있다. 대표적인 춤곡으로는 도시에서는 포르투갈계의 모디냐(modinha)·삼바·탕기누(tanguino)·바이앙(bai n), 기악의 쇼루(choro) 등 다소 대중 음악적인 것이 성행하며, 지방에서는 각기 민속음악이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니그로계의 모삼비케(mo ambique)·샹고(xango)·콩가다(congada)·콩고스(congos)·모디냐 데 바투케(modinha de Batuque)·카팀부(catimbo), 또는 마쿰바(macumba) 등이 있다. 그 외에 유럽계, 인디오계의 것으로서 쇼티스(chotis)·마시셰(maxixe:2인 l조의 도시무도)·마르차(marcha)·카나 베르데(cana verde)·판당고스(fandangos)·쿠루루(cururu:종교적 성격의 무용, 고저 2부로 나누어진 노래 시합이 특징)·프레강(preg n)·카이아푸(caiapo)·토아다(toada) 등이 있다. 

 

 

Roda de Choro - Chorinho Pra Você (Severino Araujo) 

https://youtu.be/c5NGOcNyF4g

 

Alexandre Ribeiro - clarinete
Léo Rodrigues - pandeiro
Milton Mori - cavaquinho
Luizinho 7 Cordas - violão 7 cordas
Nelson Ayres - piano
Toninho Ferragutii - acordeon
알렉상드르 리베이루 - 클라리넷
레오 로드리게스 - 판데이루
밀턴 모리 - 카바키뉴
루이지뉴 7 코르다스 - 비올랑 7 코르다스
넬슨 아이레스 - 피아노
토니뉴 페라구티 - 아코디언

 

무엇을 삼바라고 하나요? 음악에 관하여 이 논쟁은 거의 70년을 끌고 왔습니다.

56년에 비에르 라벨(Pierre Lavelle)은 삼바를 불륨댄스로 정식화하고, 댄스의 맥락에서 그 음악을 아울러 정식화하였습니다. 댄스를 하려면 음악이 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볼륨댄스는 삼바댄스의 여러 측면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대중적인 형태의 변화-그것을 거리의 댄스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습니다.- 는 음악이 변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대중적인 음악의 형태로 삼바란 이름은 16년에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쓰였습니다. 바로 동가가 곡을 만들고 오이타바투타스(Oita Batutas)란 밴드에 의해 레코딩된 것이죠. 그렇지만, 삼바리듬은 좀 더 오래된, 아프리카 계열의 브라질 사람들의 칸돔블레교파 (아프리칸 흑인 노예의 주술적 의식을 표방한, 독특한 싱커페이션을 가진 2/4박자의 카니발 음악 칸돔블레(Candomble)가 잇는데 이 종교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의 의식과 함께 20세기 초반에 브라질의 북동쪽지방인 바히아에서 리오로 떠 밀려오기 시작한 흑인피난민의 삶과 밀접한 것입니다.

 

Pixinguinha Carinhoso

https://youtu.be/EGWg4YpS1ls

 

삼바의 전형적인 댄스역사에서 파리에 근거를 두었던 마누엘(Maunel Diniz:Duque라고 불린다)과 가비(Gaby) 이 두 막시시 댄서를 빼놓지 않습니다. 이들은 삼바의 볼륨버전을 만들었고 삼바를 유럽에 소개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는 아쉽게도 오이토바투타스 밴드와 흑인 뮤지션인 픽싱기냐 (Pixinguinha)와 동가(Donga)를 빠뜨리고 말았지요. 이들 음악가가 바로 듀크에게 삼바를 소개시켜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듀크를 파리의 음악계에 연결을 시켜주었고 듀크는 브라질 흑인음악을 파리에 소개시키고 융화시켰던 것입니다.

 

 

Marisa Monte - Carinhoso 

https://youtu.be/8IhqXDQkWpQ

 

쁘라도 페레즈(Prato Perez)는 50년대 맘보를 대중화 시킨 사람인데, 음악을 대중화 시키기 위해서는 춤을 개발하여야 하고, 그 춤은 음악과 함께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듀크는 막시시를 수정해서 오이토바투타스가 연주한 창조적인 음악에 맞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음악이 없었다면 듀크는 단지 재능있는 막시시 댄서에 불과하였을 것입니다. 그 밴드는 계속하여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켰고, 새로은 댄스스타일인 삼바-카리오카(Samba-Carioca)(리오의 삼바)라고 불리는 춤에 영감을 불어 넣어준 것입니다. 이것은 3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하였지요. 유성영화가나오기 전에 피아노연주자 때로는 작은 오케스트

 

라는 영화관에서 영화의 액션에 맞추어 연주했었습니다. 오이타 역시 이런식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백인 음악가는 종종 스테이지에서 연주를 하였지만, 오이토는 흑인이었기 때문에 스테이지에서는 연주를 할 수 없었습니다. 로비같은 곳에서 연주를 할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연주를 들으러 영화티켓을 사고 영화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오이타가 본질적으로는 코로(Choro) 앙상블이었지만, 그들은 전통적인 플루트나 비올라 그리고 카바퀴뇨(cavaquinho) 대신에  레코-레코 (reco-reco)나 판데로 (pandeiro) 또는 간자 (ganza)같은 악기를 처음으로 연주한 밴드였다. 이러한 악기를 이용해서 그들은 아주 독특한 음색을 가질 수 있었다.

 
1920년 밴드 멤버는 알프페드 (Alfredo da Rocha Viana Filho 픽싱기냐)가 플루우트를 어네스토 (Ernesto dos Santos 동가)와 파울 (Raul Plomieri)이 바올라를 오타비오(Otavio Viana 차이나)가 비올라와 보칼을 넬슨 (Nelson dos Santos Alves Lima)이 카바퀴뇨 (cavaquinho)를 루이스 (Luis Pinto da Silva)가 반돌라 (bandola)와 레코레코 (rceo-reco)를 야콥 (Jacob Palmieri)이 판데이로 (pandeiro)를 호세 (Jose Alves Lima)가 반돌림 (bandolim)과 간자 (ganza)를 맡았다. 이들의 레파토리는 막시시 (maxixes), 룬두스 (lundus), 모딘하스 (modinhas), 바투케스 (batuques)와 카테레테스 (caterestes)였었다.

 

20년 구월엔 밴드는 아시리오(Assrio) 카바레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었는데 이때 댄서는 듀크와 가비를 불러들여 같이 공연하였다. 이 팀은 몇년전부터 막시시로 유럽에서 유명했었다. 듀크는 이 밴드에 강한 인상을 받고는 이들과 함께 유럽에 가서 투어를 같이 하고 싶어했다. 프랑스 투어를 함에 있어서, 듀트가 프로모터를 하고 백만장자인 데두아르도 (이 밴드의 팬이기도 햇다)가 스폰서를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유럽투어 계획이 발표되자 리오에 있는 신문은 물론 브라질의 북동쪽에 있는 지방의 신문에서 조차 거만하고 멍청한 흑인이 어떻게 브라질을 대표할 수 있느냐는 분노에찬 기사를 내보냈다. 이러한 불만을 표현한 이중의 한사람은 작가이자 정치가인 브라질 국회의원이었던 길버트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당시 즉 파리에 삼바가 전해진 것이, 브라질에서 흑인노예가 해방된 지 34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러한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Rosa - Pixinguinha

https://youtu.be/1IIt1aoWQr4

 

카르톨라 (Angenor de Oliveira 1908~80)는 28년도에 블로코 도스 아랑궤이로스(Bloco dos Arangueiros)라는 삼바학교를 망궤리아 (Mangueria) 지방에 세운 사람중의 하나인데, 그가 말하길 자기 어린시절에 뒷마당에서 나이 많은 여인네들과 삼바를 추곤 햇었다. 우리는 그 당시 그들을 티아스(이모)라고 불렀다. 하지만, 경찰은 우리로 하여금 종종 그러한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삼바가 범죄집단이나 건달들이 하는 것이란 것이었다. 브라질에서 흑인이나 흑인 음악에 대한 편견은 공공연하고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21년 흑인 음악가들이 파리에 간다는 것을 들은 브라질 신문이 그러한 미개하고 원시적인 음악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그렇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우아한 음악에 깊이 빠져들었고 픽싱기냐와 그의 밴드에 열렬한 찬사를 보냈

 

다. 이들이 준 충격이란 대단한 것이어서 원래 1개월을 예정했던 투어는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 오이타 밴드가 도착한 것은 2년 겨울이었고 그들은 쉐허라자데 (Scheherazade) 카바레에서 연주를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듀크가 이미 인기리에 댄스공연을 하고 있었다. 픽싱기냐는 플루트가 아마도 웅장한 프랑스의 공연장에서 잘 들리지 않을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셀머 소프라노 색소폰 (Selmer soprano Sax)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악기는 재즈공연에서 많이 쓰이는 것이었는데, 이것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인 코로 choro밴드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이제 브라질의 우아한 음악에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변화를 겪기 시작했다.

 

 

Ento (Pixinguinha/Vinícius de Moraes)

https://youtu.be/azLE4zeJFyg

 

신문은 매력적인 브라질의 리듬이 파리를 공습했다고 썼다. 밴드의 공연은 청중에게서나 비평가에게서나 호평을 받았다. 픽싱기냐는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중의 한사람이 바로 파리 예술학교의 풀루트 최고 연주가상을 처음 받았던 해롤드 Harold de Bozzi 였다. 23년엔 둥가와 픽싱기냐 그리고 다른 멤버들이 파리의 투어를 마치고 그들이 이전에 연주하였던 아스리오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떠날때와는 달리 그들은 다른 악기를 들고왔다. 트럼펫, 트롬본, 색소폰 그리고 반조 banzo였다. 재즈악기를 브라질에 소개한 것은 바로 오이타였던 것이다. 이러한 악기와 브라질의 다양한 타악기와의 결합은 삼바가 완전히 새

 

로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하였다. 동가는 기타를 버리고 반조를 픽싱기냐는 그전에 자신이 20년간 사용한였던 플루트를 버리고 색소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새로운 소리들로 동가나 픽싱기냐, 시뇨 (Jose Barbosa da Silva) 그리고 헤이토 Heito dos Prazeres는 삼바 카리오카 samba-carioca(samba of Rio de Janeiro)와 삼바 다 시다데 samba-cidade(Samba of the city)라는 장르를 만들었다. 이 삼바는 독특한 싱코페이션리듬으로 리오의 카니발 음악을 주도했다. 28년에 이르러 오이타의 멤버들간에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픽싱기냐가 밴드를 해체하고 동가와 함께 픽싱-동가 밴드를 결성해서 파로폰사와 몇개의 음반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8년 픽싱기냐는 카리뇨소를 녹음했지만, 비평가들은 그것을 혹평했다. 그 음조가 너무나 미국적이라는 것이다. 삼바 역사의 한 줄기는 듀크로 부터 시작되었다. 백인계 브라질인이었던 그는 파리에 댄스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으며 브라질에 대한 방문은 흔하지 않았었다.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오이타Oita Batutas 밴드(8명으로 구성되었다)를 만날 수 있었다. 오이타 밴드는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고, 그는 막시시Maxix의 스텝을 그 음악에 맞추어 재해석하곤 했을 뿐 아니라 그 새로운 춤을 그 밴드와 함께 파리로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백인의 삼바에 관한 역사다.

 

흑인의 삼바에 관한 역사는 이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포루투게스 Portuguese에서 삼바란 말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로페스Miguel do Sacramento Lopes Gama란 성직자에 의해서 였다. 로페스는 이말을 사용함으로써,  흑인으로부터 기원한 춤과 다양한 음악을 묘사하고 조롱하였다. 1831년에서 46년까지 이 14년 동안 레시페와 코르테지방 Recife and Corte 에서 카라푸체로 O'Carapuceiro 란 제목을 가진 풍자 작품을 발표했다. 1838년 그는 알모크레브의 삼바 samba d'almocreves 란 말을 사용했다. (알모크레브는 노새와 당나귀를 돌보던 하인이다) 로페스는 댄스홀 (아마도 룬두lundu였을 것이다.) 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이 새로운 리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쓴 것을 보면...

Aquí pelo nosso mato
Qu´estava então mui tatamba
Não se sabia de outra coisa
Senão a dança do samba   Around our village here
Which was quite stupid by then
There was nothing else we knew
Besides the samba dance 
아키펠로노소마토
퀘스타방탕무이타탐바
낭세사비아데우트라코이사
세낭 아당사 두 삼바 우리 마을 주변
그 때는 꽤 멍청했어요
우리가 아는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삼바춤 외에도

유럽인들은 브라질과 쿠바가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서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낯선땅에서 노예생활을 강요당했기 때문에 이 둘의 역사는 많은 공통점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음악과 댄스란 측면에서 본다면, 아프리칸들이 종교적인 전통을 카톨릭적인 의식과 일상생활에서 유지할 수있었다는 것은 특히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맘보. 살사 그리고 삼바는 이러한 서부 아프리카의 종교적인 전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서부아프리칸의 종교는 신 또는 성자와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될 수 있는형식을 갖는다. 이러한 점은 카톨릭에서 성자에게 기도할 때 카톨릭 교도가 갖는 생각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카톨릭과의 유사점은 아프리칸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신을 카톨릭의 성자인양 위장시켜 자신들의 믿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쿠바와 브라질의 교회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종교의 혼합주의를 노예를 기독교화하는 수단으로 인정하면서 묵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서부아프리칸이 가졌던 토속적인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 되기도 하였다. 아프리칸에게 춤과 음악은 신앙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교의식을 파티로 위장

 

하여 계속 유지할 수 잇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관청이나 20세기초 까지 완전히 속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경찰은 가끔 이러한 수상한 파티를 단속하곤 했었다. 숨겨야할 필요성 때문에 어떤 춤과 노래는 그 의미를 비신도들한테는 이야기 해줄 수 없었다. 간혹, 티아스 tias (칸돔블레교의 여사제)에게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음악가들은 그 비밀스러운 리듬을 좀더 대중적인 형식과 섞어서 숨기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였다. 오이타밴드 역시 이러한 일을 하곤 했던 것이다. 

 

 

Candomble Dance of The Gods

https://youtu.be/hrCFtojoy7Q

 

아프리카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지역을 아프로아메리카라고 하는데, 주로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흑인노예가 수입된 카리브해 주변 및 브라질 연안 등의 지역이다. 그들 흑인은 백인과 혼혈하여 물라토(Mulato), 인디오와 혼혈하여 샘보(Sambo)가 되어 다양한 니그로계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주민들의 낙천적 성격이나 춤 ·음악에서 볼 수 있는 리듬감각은 아프리카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아이티에 전해지는 부두교나 브라질의 칸돔블레 ·마쿰바 등은 아프리카의 민속종교가 살아 남은 것으로, 여기서는 유럽의 가톨릭교가 변질되어 있다. 근래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더불어 새로운 라틴아메리카의 문화적 전통의 근원을 인디오의

 

문화와 역사에서 찾으려는 인디헤니스모 운동이 활발한데, 이러한 운동을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한 것은 리베라 ·시케이로스 ·타마요 등 멕시코의 화가들이다. 한편, 독재정치 ·봉건체제의 타파 및 반(反)제국주의의 정신을 고양하여 라틴아메리카의 독립투쟁에 큰 영향을 준 선구적인 사상가로는 사르미엔토 (아르헨티나), 마르티 (쿠바)를 들 수 있고, 현대문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문학자로는 노벨상을 받은 두 시인 네루다 (칠레), 아스투리아스 (과테말라), 단편작가 보르헤스 (아르헨티나), 마르케스 (콜롬비아) 등을 들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탱고, 브라질의 삼바, 쿠바의 룸바 ·맘보 등은 세계적으로 널리 애호되고 있는 민족음악이다. 

 

테리아Santeria교 즉 아프로쿠바Afro-Cuba의 종교는 맘보 (맘보란 신과의 대화란 뜻이다) 음악의 기본이 되는 최면성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브라질에서 아프로 브라질리안의 칸돔블레 종교는 여러종류의 춤에 영향을 미쳤고 20세기에는 삼바에 영향을 주었다. 칸돔블레 교도에게 삼바란 기도 즉 자기의 신을 불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칸돔블레교파에서 교파인은 각자의 Axe(자신의 신인듯) 즉 자신을 후원하는 영적인 힘을 찾았다. 이러한 영적인 힘을 크게 하기 위해, 매일 열정적인 의식을 치렀고 종교적인 행사를 가졌다. 이러한 의식에서, 드럼은 일련의 리듬을 연주했었는데, 그것은 오리샤 Orixa를 불러들이는 것이었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 노래와 춤은 각자의 오리샤에 관련된 것이었다. 브라질에서 존재했던 삼바가 다양한 형태를 가진 것은 이러한 의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Samba de Roda: Samba Chula de São Braz in Bahia, Brazil

https://youtu.be/IhE_zFJEfbM

 

동가 Ernesto Joaquim Mari dos Santos(1889-1974)는 삼바카나발레스코 Samba carnavalesco로 불리워지는 노래 펠로텔레본 Pelo Telefone(On the telephone, 1916)을 16년도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피아노 곡의 악보는 픽싱기냐 Pixinguinha에 의해 쓰여졌고 17년 오이타밴드의 연주로 녹음되었으며 17년 카니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동가의 음악은 그가 자주 방문하였던, 티아시아타 Tia Ciata 바히아주에서 온 콤돔블레교Condomble 여사제로 부터 영향을 받았다. 이 여사제는 리오데 자네이로의  쁘라카 온제 Praca Onze 근처에 살고 있었다. 이 곳은 이전에 노예였거나, 브라질 북동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삼바데 로다 Samba de roda(ring samba)나 종고jongo 아포세afoxe같은 음악을 접할수 있었다. 22년에 동가와 픽싱기냐 그리고 오이타 밴드의 다른 멤버들은 독특한 음악을 파리에 소개하였고 막시시 댄서인 듀크와 공연투어를 하였다. 공연을 하면서 그들은 재즈적요소를 그들의 음악에 도입하였다. 그들이 파리에서 23년 브라질로 돌아왔을때 동가Donga 픽싱기냐Pixinguinha 시뇨Sihno 헤이터Heitor dos Prazeres같은 작곡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악기와 음악으로 새로운 실험을 하였고, 아울러 삼바카리오카 Samba Carioca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낼수잇었다. 33년 삼바카리오카는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때 프레드Fred Astaire는 그 음악에 맞추어 영화에서 춤을 추었고 리오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Fred Astaire & Ginger Rogers - The Carioca, 1933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 카리오카, 1933년)

https://youtu.be/qWb90-afKHw

 

현대 볼륨댄스 삼바의 기초로서 30년대와 4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 크게 유행하였 삼바카리오카는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이전에 농경사회 음악을 바탕으로 도시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삼바리듬은 브라질 북동지방의 바이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리오에 가지고 온 것이다. 바이아는 3세기 동안, 브라질로 이송되는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거의 대부분 처음 기착하였던 곳이고 브라질내에서 흑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노예제도는 브라질에서 1888년에 폐지되었고 이 결과 바이아에서는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생겼다. 20세기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기근과 가뭄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

 

로 인하여 많은 흑인들은 리오 근처의 언덕지역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바이아 지방 문화의 이러한 도시화과정은 흑인 음악과 춤을 더 많이 드러내게하였다. 브라질에 라디오가 들어오는 것을 전후로 해서 많은 흑인 음악이 녹음되엇다. 그러나, 초기의 녹음방식의 한계로 인하여 한정된 악기만이 녹음에 사용되었고 이러한 한계는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20년대 후반에 새로운 녹음방식이 도입되었고 이것은 훨씬 다양한 악기를 녹음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음악도 발달한 것이다. 라디오가 도입된 23년 이전에는 대부분의 브라질의 백인 음악과 문화는 대개 유럽에서 수입된 것이었다. 라디오가 출현하면

 

서 젊은 도시의 백인 중산층은 이전에 열악한 녹음기를 통해서 들을수밖에 없었던 흑인 음악을 듣고 이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그들이 이 음악을 인정하게 하였고, 댄스로서 삼바 역시 도시 중산층의 인정을 받았다. 20년대 후반 시다데 Cidade Nova 즉 리오의 신시가지의 노동자 거주지역에는 이전의 흑인 노예와  브라질 북동쪽에서 이주해온 카보클로스 Caboclos nordestinos 가 살고 있었다. 20년대 모로에 거주한 이들은 삼바는 보편적인 음악적 언어였지만,

 

그 이전에는 칸돔블레 교파와 룬두스Lundus, 바투케스Batuques 그리고 바히아Bahia Ranchers에서만 알려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동가Donga나 시뇨Sinho 픽싱기냐Pixinguinha와 같은 음악가에 의해 연주된 막시시Maxix와 코로스Choros는 그들에게 새로운 카니발음악 이라는 사실 또한 인정하였다. 코로에서 삼바까지 리오의 음악 계통은 시다데 노보Cidade Nova, 삼바학교인 온즈 Praca Onze, 그리고 보아테스Boates에서 시작한 것이다.

 

 

Rio Carnival 2017 - Floats & Dancers (Extended Version) (2017년 리우 카니발 - 수레와 댄서, 확장 버전)

https://youtu.be/UNvjEVCOE5M

 

50년대와 60년대에 인기를끌었던 보사노바 Bossa Nova (이것은 일반적으로 레메Leme에서 레블론Leblon까지 연결된 남부지역의 백인 중산계층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한다)역시 이미 존재하였던 삼바칸카오Samba-Cancao가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28년은 삼바에 있어서 특별한 해였다. 파울부쳐Paul Boucher가 쓴 프랑스 댄스교본에 삼바를 포함시킨 것이다. 이것은 유럽에 삼바를 대중화 한데 기여를 하엿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일은 그해 8월 12일 에스타시오Estacio에서 삼바 학교가 처음으로세워진 것이다. 데이샤 팔라Deixa Falar(그냥 지껄이게 해)라는 그 이름을 사용하여, 모습을 나타낸 것은 상류층에 미묘한 충

 

격을 주엇다. 설립자중의 한사람인 이스마엘Ismael Silva은 그것은 단지 클럽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학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강사들이 근처에 있었고 스스로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스스로 삼바를 배웠다. 닐튼Nilton Bastos 비데Bide, 마르살Marcal이 설립자들이었고, 이들은 모두 브라질 라디오의 황금시기에 수많은 히트곡으로, 유명했던 사람들이었다. 같은 해 두번째삼바학교가 문을 열었다. 만구에이라Mangueira 지역에서 블로코 도스 아란구에이로스 Bloco dos Arangueiros였다. 이것은 카르톨라Cartola와 카차카Cachaca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일년후  이 블로코와 모로에서 온 다

 

른사람들이 모여서 G.R.E.S(Gremio Recreativo Escola de Samba) Estacao Primeira(첫번째 기차역이란 뜻)라는 또다른 삼바학교가 세워졌다. 30년대 전세계적인 경제위기는 브라질에도 영향을 미쳐서 커피 농가가 정부에 대해 가졌던 입김을 약화시켰다. 자유연맹에 대한 반대세력은 연합하여 민족주의 군사정부를 지지했다. 30년 연맹이 선거에서 패배하자 군사정권은 권력을 장악하고 자유주의 지도자 케툴리오 Getulio Vargas바르가스를 대통령으로 앉혔다. 바르가스는 무솔리니와 파시스트국가인 살라자르의 지원을 받으면서 54년 쫒겨날때까지 향후 30년간 권력을 유지했다. 30년대 커피의 가격과 다른 상품의 가격이 하락하고, 브라질

 

경제의 중심이 커피 생산에서 공산업으로 옮겨갔다. 사람들이 도시로 유입되고, 정치지도자들은 새로운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해 브라질의 서민들에게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브라질 사회에서 대대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특히 이러한 변화는 도시에서 생겼다.주요한 요인으로는 인구의 절반이 흑인이었던 농촌에서 아프로브라질리안의 전통에 대한 존중과 새로운 정책이었다. 30년대 바르가스태통령의 시대에 리오는 카니발기간중에 춤을 추는 행진단을 만들었다. 이들에 대한 보수는 공연자가 얼마나 애국적인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달려있었다. 자주 사용된 애국주의적 주제는 브라질은 인종적인 면에서 민주주의 국가이며 아프리카

 

적인 유산이 정당하게 인정받고 존중되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부가 장려하고 싶은 공식적인 모습이었다. 정부는 삼바뿐 아니라 좀더 아프리카적인 삼바에 대해서도 장려하였다. 1900년을 전후하여 삼바는 유럽의 악기, 플루트나 현악기 그리고 조그만 타악기들을 이용하여 연주되었다. 30년대에 삼바군단은 바투케battuque라 불리는 커다란 아프리카 드럼을 여기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기 초에 백인은 드럼은 지나치게 아프리카 적이며 끔찍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삼바를 발전시키고 오늘날의 음악적 형식에 맞추어 성숙시키는 것은 이러한 자유스러운 흑인화과정이엇다.

 

 

Noel Rosa - Com Que Roupa (노엘 로사 - 어떤 옷을 입나요)

https://youtu.be/rETSGoLBjjk

 

29년 젊은 백인 중산층은 몇개의 밴드를 결성하고 결혼식장이나 행사장에서 연주하곤 하였는데, 이들은 그들의 음악을 녹음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들은 밴드를 재결성하였고 이름을 반도스탕가라스 Bandos Tangaras라 불렀다. 밴드의 구성원은 헨니크 Henrique Foreis, 카를로스 Carlos Alberto Braga, 헨리트 브리토 Henrique Brito 그리고 노엘 Noel Rosa이었다. 30년 노엘은 Com que Roupa? 란 삼바곡을 만들어 히트시켰다. 20년대 후반에 노엘은 삼비스타스로서 에스타시오와 모로에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거기서 그들의 곡과 노래에 실린 리듬을 배웠다. 그는 타악기를 좋아했으며, 비열하면서도 범죄적인 행동으로 가득찬 사회비

 

주류층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말란드로스에 매료되었다. 그들은 리오의 언덕지역인, 모로에서 빠져 나와 그들 자신의 음악스타일을 구축했다. 로사는 그들의 작곡기법을 자신의 그것과 융화시켰으며, 음악으로서 삼바에서 받아들여야 할것과 버려야 할것을 명확하게 구별하였다. 그럼으로써 삼바는 흑인 음악, 야만인의 음악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는데 기여하였다. 로엘 로사는 삼바에 가사를 붙인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전통적인 접근법이나 주제를 새롭게 한 사람이었다. 그는 삼바의 음성적 형식을 처음으로 시작하였고 이 영향은 그 이후 몇년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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