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시) 지음을 만나다
지란(芝蘭) 같은 향기 따라 옥루에 달빛이 스미고
음음히 울린 거문고에 깊은 뜻이 실려 오네
을마나 많은 인연 중에 참마음은 드물던가
만고풍상 지나온 정이 오늘 밤 비로소 닿았네
나그네의 외로운 시름도 한순간에 풀려가고
다함 없는 눈빛 하나에 천년 인연 새겨지니
다만 이 만남이 꿈일까 두 손 모아 달을 보네
[九雲夢]
15. 지음(知音)을 만나다
이 때 유모가 정사도댁으로 돌아와 부인께 아뢰되,
“자청관에 어떤 여관이 있어 거문고를 타는데 신기한 음률을 내더이다.”
부인이 이 말을 듣고서,
“내가 한번 듣고자 하노라.”
하고는, 이튿날 보고 한 채와 시비 한 사람을 보내어 연사에게 말을 전하되,
“젊은 여관의 거문고를 한 번 듣기를 원하니 그 사람이 오기를 꺼리더라도 아무쪼록 권하여 보내도록 하시오.”
하거늘, 연사가 그 시비를 돌아보며 양생더러 일러 주기를,
“귀하신 분이 부르시니, 그대는 사양치 말도록 하라.”
하니 양생이 대답하되,
“시골 천한 몸이 귀부인 앞에 나아가 뵈옵기 어려운 노력이오나, 연사의 말씀을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나이까?”
이제 여도사의 두건과 의복을 갖추어 입고 거문고를 가지고 나오니 위부인의 모습에 사자연과도 같은 풍채이므로, 정씨댁의 시비가 탄복하기를 마지 않더라. 소유가 정사도댁에 이르러 시비의 안내로 들어가니, 최부인이 대청에 앉아 있는데 그 몸가짐이 양전한지라, 소유가 당하에서 재배하니 부인이 답례하며,
“시비의 말을 듣고 거문고를 한 번 듣고 싶어 청했는데 도인의 맑은 거동에 접하니 세속에 어지러운 생각이 일시에 없어지는 것을 느끼겠노라.”
이어서 자리를 만들어 주나, 소유가 자리를 사양하며 다소곳이 인사말을 하되,
“이몸은 본디 초 땅 사람으로서 떠돌아 다니는 신세이온데, 졸렬한 재주로써 외람되이 부인앞에 나아오니, 황송하기 그지 없소이다.”
부인이 시비를 시켜 거문고를 가져다가 만지면서 청하기를,
“참으로 묘한 재목이로다.”
소유가 대답하되,
“이 재목은 용문산 위에서 백년이나 묵은 오동나무이온지라, 성질이 굳고 단단하여 금석같사오니,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것이오이다.”
이렇게 대답하고 있는 사이에 섬돌에 그늘이 옮아오니 소자의 움직임이 막연하더라.
양생이 마음이 조급하고 걱정이 되기에, 부인께 사뢰기를,
“이몸이 비록 옛날 곡조를 많이 읽혔으나, 요즘의 곡조를 타지 못할 뿐 아니오라 곡조의 이름조차 모르옵는데, 자청관 여관에서 듣자온즉 댁 따님께서 음률을 알기로는 오늘의 종자기라 하오니, 바라옵건데 천하의 으뜸가는 재주를 가지신 따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나이다.”
부인이 이를 허락하고 시비로 하여금 소저를 부르니, 이윽고 수놓은 창문이 열리며 기이한 향내를 풍기더니, 소저 나아와 부인곁에 앉으므로 양생이 몸을 일으켜 절한 다음 눈을 얼핏 들어 바라보니, 아침해가 붉은 노을을 헤치고 솟아오르고, 연꽃이 바로 푸른 물에 비친 것같아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눈 앞이 아른거려 능히 바라볼 수 없더라. 소저의 앉은 자리가 멀어 눈길이 미치지 못함을 안타까이 여겨, 부인께 아뢰기를,
“이몸은 소저의 자상한 가르침을 받고자하오나, 대청이 너무 넓어서 성음이 흩어져 자세히 듣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부인이 시비를 시켜 여관의 자리를 앞으로 옮기고 앉기를 권하니, 비록 부인의 자리에 가깝고 마침내는 소저의 오른편이 되어서, 멀리 서로 마주 볼 때만 못하나, 양생이 두 번 다시 간청하지는 못하였더라. 시비를 시켜 화로에 향을 피우니 양생이 자리를 고쳐 앉아 거문고를 당기며 묻는 말이,
“여섯 가지 꺼리는 것이 없소이까?”
소저가 대답하기를,
“매우 찬 것과 더운 것과 크게 바람 부는 것과 비가 많이 오는 것과, 빠른 우레와 눈 오는 것을 꺼리는데 지금은 이 여섯 가지가 다 없노라.”
양생이 다시 묻기를,
“일곱 가지 타지 못하는 일이 없나이가?”
소자가 대답하기를,
“초상난 것을 들은 자와, 마음이 어지러운 자와, 일에 의심을 가진 자와 몸이 정결치 못한 자와, 지음을 만나지 못한 자가 타지 못하나, 지금은 또한 이런 결점은 없노라.”
양생인 진심으로 탄복하여 먼저 예상곡을 타니, 소저가 탄복하기를,
“참으로 이 곡조는 아름답도다/ 완연히 태평성대의 기상이라 사람마다 다 알아듣기는 하되, 그 신묘함이 도인의 솜씨와 같은자가 없을 터이니, 이는 이른바 『어양비고 동지래 경파예상 우의곡 漁陽鞞鼓 動地來 驚罷霓裳 羽衣曲』이라는 곡조가 아닌가? 음란한 곡조라 감히 듣지 못하겠으니, 다른 곡조 타기를 바라노라.”
양생이 다시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 곡은 즐겁되 음란하고 슬프되 너무 급한즉, 곧 진후주의 「옷수 후정화」라, 이른바 죽어 지하에서 만약에 진후주를 만나면 「기의중문후장화」라 하는 것이라, 숭상할 바 못되니 다른 곡조를 아뢰라.”
양셍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 곡조는 서러운 듯, 기쁜 듯, 감격한 듯, 상념하는 듯하니, 옛날에 채문회가 난리를 만나 오랑캐에게 잡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후에 조조가 문회를 위하여 몸값을 치르고 돌아오게할 새, 두 아들과의 이별에 이 곡조를 지어 슬픈 뜻을 붙이니, 이는 이른바 「호인 낙루 천변초 한사단장대 귀객」이라는 것이 그것이로다. 그 소리는 들음직하나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 어찌 족히 논의할 수 있으리오? 새 곡을 청하노라”
양생이 다시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말하기를,
“이는 왕소군의 출새곡으로 몸이 그곳에 있음을 슬퍼하고, 화공이 공평치 못하였음을 원망하여 불평하는 마음으로써 곡조 가운데 붙였으니 이는 곧 『수련일곡전악부 능사천추상기라=誰憐一曲傳樂府 能使千秋傷綺羅』라 하는 것이라. 그러나 이는 오랑캐 땅의 곡조요, 변방의 소리라, 본디 바른 것이 아니니 다른 곡조가 없을꼬?”
양생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얼굴을 고치며 말하기를,
“내 이 소리를 들은지 오래더니, 도인은 실로 범인이 아니로다. 이는 반드시 영웅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마음을 속세 밖에 붙이고 충의의 기운이 문란하여 가득하니 해숙야의 광릉산이 아닌가? 급히 동시(東市)에 벨 때 해 그림자를 돌아보고 한 곡조를 타되 원통하다 / 괄릉산을 배우려고 하는 자가 없기에 내 아껴 전하지 않았더니 슬프다, 광릉산이 이로부터 끊어졌노라 하니 이는 곧『독조하동남 광릉하저재=獨鳥下東南 廣陵何處在』라 하는 것이라, 후세에 전한 자 없다 하는데 도인이 정녕 해숙야의 넋을 만나 보았노라.”
양생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소저의 슬기로움을 오늘날 따라갈 이 없소이다. 이몸이 지난날 스승에 듣자오니 그 말씀이 지금의 말씀과 똑 같소이다.”
하고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칭찬하여 이르기를,
“푸른 산은 높이 솟아 있고 푸른 바다는 넓디넓은데 신선의 자취가 속세에 보이니, 이는 백아의 수선조가 아니요? 이는 종자기를 만났으니 유수를 아뢰매 무엇이 부끄러울꼬 하는 것이라, 도인의 지음을 백아의 넋이 안다면 종자기의 죽음을 그다지 서러워하지는 아니하리로다.”
양생이 또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옷깃을 여미고 끓어앉아 말하기를,
“거룩하고 극진하도다. 성인이 어지러운 세상을 당하여 온 천하를 돌아다니며 백성을 구제할 뜻이 있으니 공선부(공자)가 아닌가? 누가 능히 이 곡조를 지으리오? 필연 의란조이니 이는 곧 구주를 떠돌아 정처가 없다함이 아닌가?”
양생이 끓어 앉아 향을 피우고 다시 한 곡조를 타니 소저가 탄복하기를,
“아름답도다 이 곡조여 / 천지만물이 부드러워 모두가 봄빛이요, 높디높고 넒디얿어서 무어라 이름지을 수 없으니, 이는 대순(大舜)의 남훈곡(南薰曲)이라. 이는 곧 「남풍지훈혜 해오민지온혜=南風之薰兮 解吾民之慍兮」로다. 진선진미(盡善盡美)함이 이에 앞설자 없으니, 비록 다른 곡조가 있을지라도 더 바라지 않겠노라.”
양생이 다시 우러러 대답하기를,
“이몸이 듣사옵기로는 음률 아홉 번에 천신이 내린다하오니, 이제 이미 여덟 곡조를 타고 아직도 한 곡조가 남았으니 다시 타보고자 하나이다.”
하고, 거문고 기둥을 바로잡고 줄을 골라 타니 그 소리가 흐르는 듯 또렷하여 또한 타오르는 하여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심신을 방탕케하며 뜰 앞에 백 가지 꽃이 일시에 활짝 피어나고 제비는 쌍쌍이 날고 꾀꼬리가 서로 우짖는 듯 하더라, 소저가 잠깐 고운 눈길을 떨어뜨리고 잠잠히 앉았더니 봉혜봉혜 귀고향(鳳兮鳳兮 歸故鄕)하여 오유사해 구기황(傲遊四海 求其凰)이란 곡조의 대목에 이르러서는, 소저가 번득 눈길을 들어 양생을 보고 그 기상을 보더니, 붉은 빛이 두 뱜에 오르고 누른 기운이 눈썹으로 사라지며 취한 듯 갑자기 낯빛이 달라지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켜 내당으로 들어가므로, 양생이 깜짝 놀라 거문고를 밀치고 눈을 바로 뜨고 정신 없이 소저를 바라볼새 흙으로 만든 흙사람 같은지라, 부인이 앉으라 하며 묻기를,
“도인이 지금 탄 것은 무슨 곡조인고?”
양생이 잠깐 대답하되,
“이 몸이 스승에게 배워 익혔으나, 이름은 알지 못하는 고로 소저의 가르침을 기다리나이다.”
소저가 오래도록 나오지 아니하기에, 부인이 시비를 보내어 연고를 물어본즉, 시비가 돌아와 아뢰기를,
“아가씨께서 반나절이나 바람을 쏘였기로 심기가 불편하시와 나오지 못하겠다 하옵니다.”
양생이 짐작하지 않았을까 하여 마음으로 미안하게 여겨 감히 더 머무르지 못하고 부인께 하직하되,
“소저께서 불편하시다 하온즉 이 몸이 지나쳤나 보옵니다. 생각건대 부인께서 몸소 가 보실 듯 하옵기에 그만 물러가고자 하나이다.”
부인은 은과 비단을 내다가 상금으로 주거늘 양생이 사양하여 받지 않으면서,
“이 몸이 비록 다소의 음률을 아오나 스스로 즐길 따름이온데 어지 광대같이 놀이채를 받으오리가?”
하고 이어서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서 섬돌로 내려가더라.
출처: 九雲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