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해 보자. 동지섣달 매서운 칼바람에 차가울 대로 차가워진 몸을 따끈한 온돌방에서 녹일 때의 그 행복감이란! 얼은 몸이 녹다가 이내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때면, 어머니가 준비하신 비장의 음식이 또 한번 마음을 설레게 한다. 살얼음이 잔뜩 담긴 동치미 국물에 쫄깃한 면발의 국수 한 그릇을 온돌방에서 몸을 덜덜 떨어가며 순식간에 해치운다. 따뜻한 방 안에서 이가 시리도록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먹고 나면 뱃속에 이는 기묘한 봄바람이 추위를 이기게 해준다고 굳게 믿었다.
이 때문일까. 냉면은 본디 '이랭치랭'(以冷治冷)의 음식으로 불렸다.
하지만 냉장ㆍ냉동 기술이 발달한 요즘엔 얘기가 좀 달라졌다. 언제든 차가운 동치미 국물을 맛볼 수 있는 만큼 굳이 겨울ㆍ여름을 따질 이유가 없어진 것.
게다가 섭씨 30도를 우습게 넘겨 버리는 요즘 같은 초절정 무더위엔 시원한 여름 별미가 필수가 됐다. '이랭치랭'의 음식 냉면이 '이랭치열'(以冷治熱)의 대명사로 탈바꿈한 결정적 이유다.
냉면의 양대산맥은 평양과 함흥이다. 조선 후기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엔 양대산맥의 특징이 제대로 묘사돼 있다.
평양냉면은 겨울철 김치(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넣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이라 했다.
다양한 야채와 배즙, 간장 등을 국수와 섞어 비빈 국수는 함흥냉면을 일컫는다.
국물이 시원한 평양냉면의 면발은 무조건 잘 끊어져야 한다. 차가운 육수에 질긴 면발은 먹기도 어렵고 식감도 떨어진다. 이 때문인지 평양냉면의 면발은 주로 메밀로 만든다. 한 대학의 보고서에 따르면 메밀가루가 70% 정도 섞인 면발이 가장 이상적인 식감을 나타낸다고 한다.
평양이 속한 평안도 산간에 메밀이 많이 난다는 사실도 평양서 메밀 물냉면이 태동한 것과 무관치 않다.
메밀은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면서도 칼로리는 낮아 건강 다이어트 음식으로 제격이다.
국물은 육수와 동치미국을 반반 정도 섞은 후 소금ㆍ식초 등으로 간을 맞춰 만든다. 유명한 평양냉면집들은 오랜 시간 우려낸 사골 국물에 사태살을 넣고 추가로 푹 삶아낸 후 건더기를 건져 육수만 남긴다. 동치미국엔 시원한 맛이 강한 무를 배추보다 더 많이 집어넣고 차갑게 보관한다. 육수와 동치미국의 조합이 평양냉면 국물의 수준을 좌우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얼음이 동동 뜬 평양냉면 국물을 크게 한모금 들이키면 가슴 속 깊은 곳까지 시원한 기운이 밀려들면서 어느새 한여름 더위가 자취를 감추고 만다.
평양냉면은 심심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은, 담백한 맛이 일품이다. 이런 맛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평양냉면은 건강에 아주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실제로도 깊은 맛을 내는 차가운 육수와 담백한 맛을 내는 메밀에 담긴 영양소는 매우 풍부하다.
가수 존박의 예찬도 눈여겨볼 만하다. 1주일에 5번 정도 평양냉면을 먹는다는 그는 한 방송에 출연해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처럼 나의 인생도 그렇게 살고 싶다. 자극없이 꾸준히 싱거운 맛처럼 살고 싶다"고 강조했다. 존박은 냉면을 먹을 때 식초나 겨자를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자극적인 맛을 최대한 줄이고, 순수한 냉면 그대로의 맛을 음미하고 싶어서다.
평양식 만두를 곁들인 충무로 필동면옥이나 동그랑땡 완자와 함께 먹는 옥천냉면이 대표적인 평양냉면 맛집이다.
우래옥은 진한 고기 육수와 메밀 함량이 특히 높은 면발로 유명세를 탔다. 무교동 남포면옥은 20개 항아리에 차갑게 보관된 동치미 국물이 손님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 서울 마포의 을밀대도 심심하지만, 절대 질리지 않는, 찾고 찾고 또 찾고 싶은 맛으로 유명한 평양냉면집이다.
반면 매콤ㆍ달콤 소스에 비벼먹는 함흥냉면의 면발은 좀더 질기고 쫄깃해야 제맛이다. 따라서 잘 끊어지고 푸석한 느낌의 메밀보다 감자 또는 고구마 가루로 면발을 뽑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오들오들 씹히는 맛이 일품인 간자미회가 가미되면 함흥냉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더욱 풍성해진다. 함흥엔 감자가 많이 난다. 때문에 과거 함흥 사람들은 감자 전분을 많이 썼다. 남한에선 감자가루보다 고구마 전분이 더 널리 쓰인다.
서울서 함흥냉면을 잘 하는 대표적 맛집 중 하나가 서울 연희동에 있는 청송함흥냉면이다.
올해로 문을 연 지 22년 됐지만 이 집의 시작은 6ㆍ25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송함흥냉면 사장 김만자 씨의 모친인 함흥 사람 김금녀 씨는 6ㆍ25 전쟁 때 가족과 함께 월남해 부산에 정착했다.
부산서 잠시 냉면집을 열었고 새콤달콤한 냉면이 부산 사람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한다. 이후 수십 년이 지나 김만자 씨가 모친에게서 배운 냉면 기술과 철학을 바탕으로 1992년 가게를 열었다. 이것이 청송함흥냉면의 시작이다.
이 집 면발은 감자와 고구마로 만든다.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감자ㆍ고구마 가루를 반죽해 면발을 뽑는데, 이를 '익반죽'이라 한다. 함흥냉면의 생명은 면발의 쫄깃함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바로 이 엄청 뜨거운 물에 반죽하는 '익반죽'이 면발에 쫄깃함을 더하는 비결이다.
짜지도 않고 맵지도 않은 간자미회는 입맛 돋우는 데 없어선 안 될 필수재료다.
소스 역시 정성이 남다르다. 배와 사과를 갈아넣고 파와 마늘, 양파, 고춧가루를 섞어 매콤ㆍ새콤ㆍ시원한 맛을 낸다.
여기에 주전자에 넣어 제공하는 뜨거운 육수가 매콤한 냉면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냉면 세 젓가락마다 뜨거운 육수 한 모금…,그야말로 환상적인 호흡을 만끽할 수 있다. 김만자 사장은 "소고기와 소고기뼈, 동치미, 파ㆍ마늘 등 각종 야채를 넣고 8시간 정도 끓이면 육수가 완성된다"고 말했다.
[남기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