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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안인희>

작성자서푼짜리오페라|작성시간14.05.23|조회수496 목록 댓글 0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

<게르만 신화.바그너.히틀러 / 안인희> 220 ~ 239쪽

 

 

바그너의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작품을 그냥 읽을 때보다는 가수들이 노래하는 것을 들을 때가 훨씬 더 실감이 난다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바그너의 특징이라 해야 할 것이다. 텍스트만 읽으면 어떤 부분은 유치하고 어떤 부분은 턱없이 어려우며, 또 어떤 부분은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에 실리면 그런 문제들이 말끔히 없어진다. 갑자기 소리와 음악과 뜻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는 특이한 의성어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 의성어들이 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하는 듯 보인다. 의성어를 텍스트로 읽으면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뿐더러 왜 이렇게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걸까 하는 의문까지 든다. 그러나 음악과 함께 들으면 발키리에들이 "호요토호" 하고 외치는 특이한 소리까지도 전부 살아 움직인다. 텍스트에서는 죽은 문자로 가만히 누워 있던 소리들이 음악과 만나면 전부 살아나 생명을 얻는다. 의성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사 전체가 다 그렇다.

그러나 대본을 보지 않거나 대사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 음악을 그냥 듣기만 하면 의미가 사라지면서 음악이 원래 가졌던 완전한 마력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대사의 정확한 의미와 함께 음악을 들어야 비로소 바그너의 마법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어와 음악이 서로 뗄 수 없이 융합해서 만들어내는 조화를 경험하면 바그너 작품의 거대한 표현력에 거듭 경탄하게 된다.

<반지>의 거대한 세계는 일단 음악과 언어로 - 물론 무대가 필요하지만 - 표현되고 있다. 언어와 음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상승 효과를 느껴보지 않은 채 그 세계를 언어로만 설명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시도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의 대작이 보여주는 몇 가지 특성들을 언어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 뒤에는 미처 말로 설명하지 못한 음악이 항상 더 크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서 말이다.

네 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바그너의 필생의 대작이다. 1848년 <지그프리트의 죽음>(신들의 황혼) 텍스트 작업으로 시작해서 1874년 <신들의 황혼>의 작곡이 끝날 때까지 무려 25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반지> 4부작이 최초로 모두 함께 공연된 것은 1876년에 열린 제1회 바이로이트 축제에서였다.

 

1) 순환하는 자연, 순환하는 황금

주인공 위주로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사람들은 <반지> 4부작의 텍스트를 다 읽고 나면 약간 당황하기가 쉽다. 부분적으로는 재미있지만 중심을 잡고 생각을 이어나가기는 어렵다. 신화적이고 우주적인 세계상에 잘 어울리는 것이지만,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틀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물, 불, 공기, 흙의 4대 원소가 신과 거인과 난쟁이, 그리고 인간들의 이야기를 감싼다.

<라인의 황금>은 물속 장면으로 시작되고, <신들의 황혼> 마지막에서 다시 불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다. 전체 작품은 생명의 원천인 물에서 시작해 다시 물에서 끝이 난다. 일단 이 점에 주목하면 전체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물에서 시작한 <라인의 황금>은 라인의 딸들(물)의 노래로 끝나고, <발퀴레>는 지그문트가 쫓겨온 폭풍우, 곧 바람(공기)으로 시작되고 마지막에 브륀힐데를 둘러싼 불로 끝이 난다. <지크프리트>는 땅속 존재인 난쟁이의 대장간에서 시작된다. 대장간에는 흙과 불이 함께한다. 이 작품은 지크문트와 브륀힐데의 열렬한 포옹으로 끝나는데 그들 둘레로 불이 타오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신들의 황혼>은 우주의 나무 아래 샘 가에 사는 노르누들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불과 물로 끝난다.

이렇듯 각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자연의 원소가 둘러싼다. 모든 이야기는 자연의 상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음악도 바로 이 부분, 자연의 원소들을 표현하는 모티프들이 가장 인상적이다. 줄거리를 따라가는 우리의 지성보다 음악을 받아들이는 감성이 훨씬 더 정확히 그것을 감지한다. 네 작품을 자연의 원소가 둘러쌈으로써 여기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이 때로는 자애롭고 때로는 잔혹한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소박한 사실을 매우 간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자연법칙 안에서 네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들에게 일관되게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황금이다. 밤과 어둠에서 나온 음침한 세력인 알베리히가 라인 강에서 황금을 훔쳐가는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리고 황금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전체 이야기는 종결된다. 황금 역시 자연의 한 원소다. 다만 그것은 모든 존재가 탐내는 특별한 원소일 뿐이다. 그런 황금도 세상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나서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고 있다.

인간의 삶도 왔다가 돌아간다. 이 소박한 삶의 법칙은 굳이 철학이라 부를 것도 없는 순리다. 사계절도 순환하고, 낮과 밤도 순환하고, 삶과 죽음도 순환한다. 아주 큰 규모에서 바라보면 단조롭게 보일 정도로 모든 것이 순환하고 있다.

이런 자연의 순환 원칙을 전제로 살펴보면 몇 가지 신화적인 상징 체계를 더 읽어낼 수 있다. 불에 둘러싸여 깊은 잠에 빠진 브륀힐데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보자. 그것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어 태양이 돌아오는 것이나, 아니면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는 것이나, 혹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돌아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해석할 수 있다. 봄이 되어 겨울 동안 죽은 듯했던 나무들이나 언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모두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브륀힐데를 긴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지크프리트는 새로운 날을 시작하는 태양이나, 봄의 생명을 가져오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지크문트와 지클린데의 만남에 대해서도 역시 비슷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들은 긴 겨울의 어둠을 뚫고 마침내 봄을 맞이한 기쁨을 노래한다. <발퀴레> 제1막 제3장의 서정적인 봄밤 장면은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준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그들의 사랑도 싹터 지크프리트가 세상에 태어난다.

반지의 둥근 모양이 상징하듯이 이 작품은 자연과 생명의 순환을 큰 틀로 삼고 있다. 따라서 작품 전체를 비교적 손쉽게 우주적 의미에서 개략적으로 스케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이미 생겨난 하나의 세계가 몰락하는 이야기다. 이 세계가 생겨나는 과정은 이야기속에 회상 형식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작품의 마지막이 비장한 몰락의 장면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 비장함 뒤로 새로운 희망을 엿볼 수 있다. '아아, 한 세계가 몰락했으니 이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겠구나' 하고 말이다.

황금의 출현은 어지러운 세계를 더욱 어지럽게 만든다. 작품에서 황금은 권력과 부를 상징하고 있다. 난쟁이 알베리히는 사랑을 포기하고 황금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할 야망을 품는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설정인데, 맹목적인 권력 및 부의 추구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보탄(오딘)은 딸에게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은 권력을 원하면서도 사랑도 포기하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사랑도 사랑에 대한 미움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바그너가 처음 작품을 구상했던 1848년에는 황금을 차지하려는 여러 존재들에게 상당히 구체적인 사회적 계급의 상징성을 부여했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것은 더 광범위한 의미로 수정되었다. 작가 자신의 처음 구상에 우리가 무조건 얽매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참고로 구상 단계에서 그가 생각했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우선 니벨룽겐은 "밤과 죽음의 품에서 나온" 종족으로 땅의 내장에서 강한 금속을 태우고 연마하는 난쟁이 종족이다. 미메(Mime)의 직업이 대장장이인 것은 매우 적절한 설정으로 보인다. 노동자인 난쟁이들 위에는 거인의 모습을 한 비생산적인 봉건주의가 그들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다. 그들은 난쟁이들의 힘을 이용하지는 못하고 단지 묶어놓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신들의 휴머니즘도 여기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신들은 대단한 활동성으로 세계의 질서를 만들고, 지혜로운 법칙들을 통해 원소들을 제압하고, 인간 종족을 세심하게 보살피는 일에 헌신한다. 그들의 힘은 모든 것 위로 뻗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지배권의 토대가 되는 평화는 화해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과 간계로 성취되었다. 신들이 세계 질서에서 의도한 것은 윤리적 의식이다. 그들이 행하는 불의가 그들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다. 니벨하임의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에게로 죄의식이 올라온다. 니벨룽겐 족의 노예 상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알베리히의 지배권만 빼앗았을 뿐이다. 그것도 더 높은 의도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니벨룽겐 족의 자유는 여전히 한가한 용의 배 아래에 쓸모없이 놓여 있다. - Hans Mayer, <Richard Wagner>, 143쪽 -

 

여기서 난쟁이와 용과 신들의 관계가 사회의 계급을 나타낸다는 바그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버나드 쇼도 이들이 사회 계급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는 난쟁이는 자본가, 거인은 손만 있고 머리는 모자란 노동자 계급이라고 보고 있다.

황금이 부를, 그것도 자본주의의 부를 나타낸다고 해석하면 이 작품에 대한 상징이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반드시 자본주의의 부가 아니더라도 황금과 부는 언제나 인간 사회에서 여러 문제와 갈등을 만들어냈다. 황금의 이런 상징성 자체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부의 존재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들이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부가 황금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2) 보탄의 길

<라인의 황금>에서 보탄은 알베리히의 반지가 출현하기도 전에 이미 심각한 문제에 당면해 있다. 그가 주문한 대로 거인들이 궁전을 완성했고, 그 대가로 프라야(프레이야)를 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들의 세계는 처음 등장할 때부터 이미 완전무결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이고 있다. 프라야는 거인을 피해 도망치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아내 프리카는 남편을 비난한다. 보탄은 로게에게 책임을 돌리지만, 정작 로게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 마침내 나타난  로게는 해결책은 가져오지 않고, 알베리히가 황금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가져온다.

신들의 세계에 생겨난 이런 혼란은 보탄의 욕망과 그가 범한 여러 실수와 속임수에서 비롯된다. <발퀴레> 제2막에서 보탄은 딸 브륀힐데와 대화를 하던 중 긴 독백을 한다. 그는 자신이 불행을 포함하는 계약으로 로게를 붙잡았고 부당한 일을 행했으며 배신을 했음을 고백한다. 게다가 라인의 반지를 차지할 욕심으로 반지를 "만졌기에" 반지의 저주까지 받았다.

신들의 세계는 전혀 안정된 세계가 아닐뿐더러, <라인의 황금>에서 이미 에르다(발라) 여신이 "존재하는 모든 것에 끝이 있듯 신들의 세계에도 어두운 날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고한 세계이다. 몰락의 운명이 예고되어 있고, 보탄도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보탄의 선택은 어떻게든 몰락의 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예언에 따르면, 알베리히가 아들을 얻고 반지를 차지하면 신들은 멸망한다. 따라서 보탄은 어떻게 해서든 알베리히보다 먼저 반지를 차지해야 한다. 그러나 보탄은 계약의 신이고, 그가 만든 세계 질서의 기본이 계약을 준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신이 용에게서 반지를 뺏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맺은 계약과 자신의 힘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웅"이 필요하게 된다. 보탄이 보살피지 않은 가운데 자라나 그가 원하는 일을 할 영웅이 필요한 것이다. 실수가 많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는 해도 보탄은 결국 이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하려는, 근본적으로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 알베리히처럼 동족을 속박해서 착취하고, 모든 존재를 미워하는 사악한 존재와는 다르다.

그러나 지크문트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체념한 보탄은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자신이 손수 지크문트의 칼을 부러뜨린 후로 그는 변했다. <지크프리트>에서는 이미 보탄의 강력한 개입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떠돌고 있으나 언제나 나그네로, 관찰자로만 등장한다. 지크프리트가 성장한 다음에는 스스로 신들의 종말을 소망하며 자신의 세계를 지크프리트에게 넘기려 한다. <지크프리트> 제3막 에르다와의 대화에서 이미 그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에르다와의 대화가 끝난 후 보탄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지크프리트와 맞서고 여기서 지크프리트는 두려움 없이 보탄의 창을 칼로 부러뜨린다. 이것으로 보탄은 실질적으로 제거되고 만다. 그 후로 보탄은 작품에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신들의 황혼> 마지막에 발할이 불탈 때 거기 다른 신들과 함께 앉아 있을 뿐이다.

보탄의 길은 상당히 명료하게 그의 에너지가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라인의 황금>에서 산꼭대기에 지은 발할의 주인으로 등장할 때가 가장 강력한 모습이다. <발퀴레>에서는 아내에게 흔들리고, 딸에게 내면 고백을 하는 소심한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에서는 이미 나그네일 뿐이다. <신들의 황혼>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

보탄의 모습은 신들의 세계가 <반지>의 세계 안에서 힘을 잃어가는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는 인도의 신화를 연상케 한다. 인도인들은 세계가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4/4의 완전성을 지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 가졌던 에너지의 3/4의 효력만을 갖게 되고, 다시 시간이 흐르면 2/4, 1/4로 줄다가 한 번의 순환을 끝내고 종말에 이른다고 보았다. 보탄이 처음 <라인의 황금>에 등장할 때의 모습은 이미 3/4 정도의 효력만을 가진 상태이다. 그리고 <발퀴레>에서 2/4, <지크프리트>에서는 1/4로 줄어들고 네 번째 <신들의 황혼>에서는 이미 완전히 힘을 잃고 세계와 함께 몰락하게 된다.

 

3) 영웅 지크프리트의 길

보탄이 지혜의 신이라면, 지크프리트는 순수한 바보다. 그는 기운이 뻗치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순수함이 그를 보호하고 있기에 그는 "두려움을 모른다." 보탄은 이런 그에게 세계의 미래를 맡기려 한다. 그러나 무지함이 세계를 구할 힘이 되기는 어렵다. 더욱이 온통 사악한 기운이 넘치는 세계에서 그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숲에서 지내며 대장장이 미메의 양육을 받는 동안 지크프리트는 어머니, 아버지가 그립기는 해도 세상에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다. <지크프리트>에서 그는 모든 소망을 이루는 동화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신들의 황혼>에서 궁정 세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는 벌써 순수함의 보호를 받는 예전의 영웅이 아니다. 그의 순수함이 모조리 손상을 입는 것은 아니라 해도 그는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림으로써 더욱 대책 없는 바보가 되고 만다. 세상 일에 어둡고, 게다가 기억까지 잃은 상태에서 그는 세계의 기본적인 질서를 마구 엉클어뜨리고 만다. 다른 사람을 위해 변장하고 자신의 아내에게 대신 구혼해 준다는 설정은 이미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징후로 보일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는 일부러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결국은 거짓이 된 맹세를 했고, 사악한 힘이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의 죽음은 억울하면서도 정당하다. 물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반지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하겐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지크프리트의 시체가 제단에 올려지고 불에 태워질 때에 그것은 한 세계의 몰락을 보여주는 일이지만 동시에 자연 질서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지는 원래 그것이 있던 장소로 돌아가고, 신들과 그들의 세계는 지크프리트, 브륀힐데와 더불어 불에 타 사라진다. 한편으로 보면 이것은 세계의 정화 의식이기도 하다. 몰락하는 한 세계가 순수한 존재를 제물로 바친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온다면 그것은 훨씬 더 정화된 상태가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4) 대립하는 힘들

이 작품에서 대립하는 힘들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보물을 놓고 다투는 세력들이 이원적인 대립을 이루는데, 검은 알베리히와 보탄이 각기 두 세력을 대표햔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알베리히가 사악한 세력이라고 해서 보탄의 세계가 완벽한 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알베리히는 사랑을 미워한다. 그에 반해 보탄은 연인들을 보호하고 사랑을 옹호한다. 그러나 보탄이 보호하는 연인들이란, 지크문트와 지클린데,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 커플이 보여주듯 상피 붙는 관계들이다. 마치 성골(聖骨)은 성골을 만나야 성골을 낳듯, 보탄의 순수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극단적인 근친혼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근친혼은 자기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왕족은 대체로 왕족끼리 결합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선은 혈통의 순수성을 위해서고 두 번째로는 재산의 보존을 위해서다. 이것은 낡은 세계의 질서이고, 우생학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고 저주하는 알베리히와는 다르지만 보탄의 세계, 그의 사랑에도 저주가 붙어 다닌다. 또 보탄이 행한 배신, 거짓, 욕망 등이 그의 세계를 위협한다. 프리카는 지크문트가 "자유로운 영웅"이라는 보탄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또 "보탄의 의지(意志)"라 불리는 사랑하는 딸 브륀힐데는 아버지의 내면의 갈등을 꿰뚫어보지만 그의 명령을 어긴다.

이들 대립하는 두 세력은 결국 반지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다. 반지는 라인 강의 황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근원적으로는 자연의 힘인 라인의 딸들에게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반지로 만들어진 후에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가진다. 이것이 포학한 존재의 손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지는 <라인의 황금>에 등장하는, 니벨하임에서 신음하는 난쟁이들의 모습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반지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따라서 누군가 반지를 지닌다해도,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을 중히 여긴다면 반지의 위력을 이용할 수는 없다.

보탄이 알베리히에게서 반지를 빼앗은 것은 알베리히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난쟁이들을 구원해 주기 위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지배권을 갖거나, 아니면 적어도 다른 존재가 이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갖는 것을 막기 위해 그것을 차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에르다의 경고를 받고 운명의 힘이 두려워진 그는 반지를 거인에게 내주게 된다. 반지를 이용할 생각이 전혀 없는 거인 파프너는 그것을 동굴 속에 넣어두고 지키기만 한다. 무능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세계에 새로운 위험이나 악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지의 잠재된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결국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려운 저주를 담은 반지는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찾아서 이용하기 위한 것에서 찾아서 없애야 할 것으로 변질된다. 그에 따라 다툼의 내용도 바뀌게 된다. 알베리히는 반지를 차지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보탄은 반지를 찾아 없애고 세계의 종말을 막기 위해 다툼을 계속한다. 그리고 지크프리트가 성장하면서 보탄은 뒤로 물러나고 지크프리트가 대신 알베리히 세력에 맞선다.

그는 보탄과는 반대로 전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반지의 저주에서도 벗어나 있다. 반지의 힘도 모르고 저주도 모르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몰라서 보호받는 무지의 순수성이 지켜지기에는 세계가 너무나 타락해 버렸다. 결국 더럽혀진 세계가 순수한 영웅을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황금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한 세계가 몰락하건 말건 무심한 것은 자연뿐이다. 반지를 되찾아 돌아가던 라인의 딸들은 반지를 차지하려고 물속으로 뛰어든 하겐을 무심한 태도로 함께 끌고 가버린다.

 

5) 작품에 드러난 모순

무심코 줄거리를 따라가던 사람은 뒷부분에 이르러 문득 멈추어 선다. 반지를 되찾아 라인의 딸들에게 돌려주었는데도 신들의 세계가 멸망하는 것을 보고, 그렇다면 그동안 무엇 때문에 보탄이 그렇게 고심을 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크프리트> 제3막에서 이미 보탄이 에르다를 향해 자신이 몰락을 소원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아직은 지크프리트가 세계를 물려받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신들의 황혼> 마지막 장면에서 보탄의 세계와 지크프리트는 모두 불 속에 사그라든다. 물론 알베리히와 하겐의 세계도 함께 종말을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야기의 전체 진행에서 무언가 어긋난 부분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반드시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인물들, 특히 보탄이 정열적으로 추구하던 목표가 어디서부턴가 그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이것이 바로 유명한 <반지>의 모순이다. 한스 마이어는 <반지>가 3중의 결말을 가지며 따라서 실질적인 종결부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바그너가 처음에 시도했던 해석이 사라지고 나타난 3중의 종결부에 마이어는 매우 재미있는 이름들을 붙여주고 있다. 여기서 그의 해석을 따라가보자.

 

첫 번째 종결은 "바쿠닌 방식의 종결"이다(무정부주의). 발할과 함께 신들도 모두 불길에 휩싸인다. 황금과 계약의 저주로 인해 부패한 지배자들이 몰락하는 것이다. 지크프리트까지도 황금의 희생자로 함께 죽는 것은 황금의 지배에서 벗어난 인류의 순수성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포이어바흐 방식의 종결"이다. 이것은 바그너가 마지막 장면에서 곡을 붙이지 않고 텍스트로만 남긴 부분에 분명히 나타난다. 장작더미에 불이 붙고, 보탄의 까마귀들이 날아올라 발할로 향하고 난 다음 브륀힐데가 말하는 부분이다. 곡이 붙어 있지 않기 때문에 텍스트에 따라서는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하고 싣지 않는 경우도 많다. 바그너가 텍스트를 출판할 때 이 부분을 뒤에 그냥 덧붙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벨룽겐의 반지> 애호가 중에도 이 부분의 텍스트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전문(全文)을 우리말로 옮겨 싣는다.

 

너희들, 피어나는 생명으로 남은 족속아,

내가 이제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잘 들어라!

타오르는 불꽃이 지크프리트와 브륀힐데를 삼키는 것을 보거든

라인의 딸들이 반지를 물속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거든

밤을 통해 북쪽을 바라보아라!

그곳 하늘에 신성한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면

너희는 발할의 종말을 보는 것이다!

 

신들의 종족이 바람결처럼 시들면

나는 이 세상을 통치자 없이 남겨 두리라.

내가 가진 가장 거룩한 지식의 보물을 이제 세상에 알린다.

선(善)도, 황금도, 신들의 광채도 아니요,

우울한 계약에 따른 우울한 결합도

위선적인 도덕의 냉혹한 법칙도 아니요,

쾌락과 고통 속에 오로지 사랑만이 있게 하라!

 

여기서 브륀힐데가 말하는 "사랑"은 물론 남녀 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젊은 날 바그너는 포이어바흐의 사상에 한동안 심취해 있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종교란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셈이다. 포이어바흐의 무신론은, 신을 사랑하지 말고 인간을 사랑할 것,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구원받길 희망할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을 희망으로 삼아 이곳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 것을 주장하고 있다. 보편적 '인류애'를 지상에서 실천하라는 이 '주장'은, 지배와 피지배, 소유와 분배의 불평등을 개선해 이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들자는 호소를 담은 것이다.

브륀힐데의 말 속에도 바로 그런 울림이 들어 있다. "우울한 계약에 따른 우울한 결합"이나 "위선적인 도덕의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오직 참되고 보편적인 인간 사랑만 있게 하라. 신들은 다 죽고, 브륀힐데와 지크프리트도 함께 떠나고, 어떤 신적인 지배자도 없이 이 세상을 너희 인간들에게 남겨줄 것이니 인간들끼리 살 만한 세상을 만들어라. 불평등을 없애고 평등한 세상을 이루어라.

 

세 번째 종결은 "쇼펜하우어 방식의 종결"이다. 이것 역시 <신들의 황혼> 텍스트를 출판할 때 브륀힐데의 말에 덧붙여진 것이고 마찬가지로 곡이 붙지 않았다. 여기에는 지문까지 따로 붙여졌다. 마이어의 책에 수록된 부분을 아래에 싣는다.

 

(시인은 이미 이 연(聯)들로 간결하게나마 극의 음악적 효과를 미리 대체하려고 시도했지만, 이 작품의 음악 작업을 하지 못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런 음악적 효과에 더욱 잘 어울리는 이별의 연(聯)을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을 여기 다음과 같이 알린다.)

 

나는 이제 발할의 향연에는 가지 않는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가?

소원의 집(Wunschheim)을 떠나

광증의 집(Wahnheim)에서 영원히 도망친다.

영원한 생성의 열린 문을 나 이제 닫노라.

소원도 광증도 없는 가장 신성한 선택의 나라로,

깨달음을 얻은 나를 이끌어가는 것은

세계 방랑의 원래 목적, 환생(還生)에서 벗어나기.

모든 영원함, 행복한 종말,

내가 그것을 어떻게 얻었는지 아는가?

슬픈 사랑의 가장 깊은 고통이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 나는 세계의 종말을 보았다.

 

우리 눈에 불교적 사유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이 텍스트에는 쇼펜하우어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바그너는 한동안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붓다를 소재로 한 오페라를 만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앞의 인용문에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 즉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이 들어 있다. 보탄의 마지막 행보에서도 바로 여기에 어울리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이 3중의 결론을 알고 나면 실제로 작품에서 이런 요소들을 모두 읽어낼 수 있다. 신과 지배자가 없는 세계를 향한 동경과, 세계를 개혁하려는 열렬한 의지, 깊은 체념의 지혜를 얻어 세계에서 물러나려는 의지 모두가 보탄의 길과 지크프리트의 운명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꼭 마이어의 해설이나 앞의 텍스트들로 보충하지 않더라도 주의 깊은 독자는 작품이 드러내는 이런 내적 모순을 막연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바그너 자신이 죽을 때까지 이 세 결말 중 어떤 것에도 확고하게 도달하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그를 두고 결단력이 없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오히려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대한 사상을 단 하나만 접해 보았더라면 차라리 간단하게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그너는 젊은 시절부터 여러 사상들을 열심히 흡수하더니 마지막까지 이토록 흔들리고 방황하는 지식인 예술가로 살게 되었다.

이 작품이 가진 3중의 결말, 즉 내적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해서 음악에까지 갑자기 흠이 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위대한 예술 작품이 내적 모순을 전혀 갖지 않는 경우란 없다. 내적 모순이 전혀 없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반듯하다는 의미가 되는데 예술 작품이 합리적으로 반듯하면 깊이와 음영을 얻지못한다. <반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삶에 대한 적어도 세 가지 관조 방식까지 함께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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