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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읽는 힘/사이토 타카시(4)

작성자신종찬|작성시간16.06.13|조회수90 목록 댓글 1

4.데카르트, 원점은 나다. 기독교로부터 탈출하여 근대 합리주의 철학을 완성

1)비판에서 시작된 근대 합리주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대제국에 바람구멍을 낸 것은 자연과학이었다. 비판하는 과학정신으로 기존의 잘못된 점들을 과학자들이 지동설을 필두로 실험과 관찰을 통해 비판하고 나섰다. 비판이란 단순한 부정을 넘어 재해석하고 검증하여 진리를 밝히는 일이다.

  여기에는 두 산맥이 있다. 첫 번째로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독일관념론 철학의 시조 임마누엘 칸트(1724~1804) ⟪순수이성비판⟫ 등에서도 비판정신을 볼 수 있다. 칸트는 계몽이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되는 것을 말한다.

  두 번째가 게오르크 헤겔(1770~1831)이다. 프랑스혁명을 보고 신이 아니라 인간의 혁명으로 참된 자유를 가져오는 인간의 역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됐다고 말했다.


2)“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진짜 의미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Cogito, ergo sum.”라 했다. 다른 모든 것을 회의하더라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흔들리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확실하기에, 그는 철학의 제1원리로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보통이라면 “내가 존재하기에 생각한다.”가 순서일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어도 나는 존재할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존재>라는 말이다. 육체로서 여기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이성이라는 존재로서 여기에 확고한 자립이 있다.’, ‘자립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철학의 근거이자 발판으로서 ‘나는 마침내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찾았다.’며 더 이상 의심하며 거슬러 올라가지 않겠다는 뜻이다.

 전제를 두지 않고 의심해보았지만 자신이 존재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세계’는 무시된 의식적, 이성적 생각을 근거로 한 명언이다. 나중에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인간은 의식적으로 사고하기보다 그렇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밝혀졌다.

  데카르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존재 전체가 생각하는데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성의 대단함을 증명하기 위한 확실한 거점이 생각, 사고에 있다는 것이다.


2)코기토와 좌표축의 뜻밖의 관계

  “내가 생각하고 내가 의심하기에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사상이다. 데카르는 XY좌표축을 데카르트평면에 만들어냈다. 좌표축을 설정하려면 원점을 정해야 한다. 좌표축울 설정한다는 것은 ‘내가 제로 지점이다’하는 선언이다. 이 원점을 기준으로 모든 것들의 위치가 정해진다. 나는 다대로 타인은 그들대로 원점을 기준으로 위치가 정해진다. 이성을 이용하여 스스로 좌표축울 설정해서 제로 지점이 될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인가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할 정도로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왜일까?


3)원점을 설정해 모든 것의 위치를 정하려는 욕망

  좌표축은 수학적으로, 코기토는 철학적으로 원점이 있다는 것에서 데카르트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4)데카르트에 의한 신의 증명

  데카르트는 ‘내가 중심이다.’라 했지만 신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 다음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신의 존재증명을 자신의 의식과 관련지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겨우 발견한 의심하지 않는 의식을 신의 존재증명에 사용했다는 것은 그의 한계였다. 그가 완전히 근대화하지 못했던 것은 인간의 특별함을 신이 준 선물이라 생각했다는데 있다.


5. 칸트, 경험 이전에 있는 것

1)선천적 인식, ‘아 프리오리’에 대하여

  데카르트는 良識이란 신이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분배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었다는 이 말을 존 로크, 데이비드 흄과 영국의 경험주의자들이 비판하고 나섰다. 태어나면서부터가 아니라 백지로 태어나 경험을 통해 모든 걸 얻는다고 했다.

  이에 대해 독일관념론의 시조로 불리는 칸트는 모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물건의 개수와 같은 것에 대해 경험 이전에 갖고 있는 <선험적 인식>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즉 수학적 물리적인 것은 경험적인 인식에 앞서는 선천적인 인식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를 <a priori>라 한다. 대부분인 경험적 인식 외에 수학적인 것과 같은 이성적 사고로만 할 수 있는 <선험적 인식>이 있다.


2)무엇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인가?

  칸트가 전환시킨 것은 대상과 인식의 관계다. 종래에는 자연은 인간이 존재하는 것과 관계없이 존재함으로 대상>인식의 관계였다. 즉, 대상의 존재는 인식에 좌우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인식은 대상에 의존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칸트는 반대라고 했다. 대상이 인식의 방법에 의존한다고 했다. 이것은 “세상은 인간이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3)사람과 개는 다른 세계에 산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은 절대 물자체(사물 그 자체)를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같은 장소에 있어도 개는 개의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인간은 인간의 방법으로 세계를 인식할 뿐 어느 쪽도 진짜를 인식할 수 없다. 물자체가 이데아와 다른 점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 않고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칸트는 신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신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칸트는 조용히 신의 목을 잘랐다.”라고 했다.


4)단념 끝에 나온 것은?

  칸트는 인간의 지각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에 궁극적인 물자체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대상은 인식에 의존한다는 뜻, 대상<인식이 된다. 눈앞에 사람이나 대상이 있어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없는 것과 같다. 나중에 프로이트가 등장하여 인간은 ‘무의식 세계’의 영향을 더 받는다고 했으니 더욱 알지 못하는 세계가 늘어난다. 아무리 공감을 하려 해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공감이 안 되고 완전히 다른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은 신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대단한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은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전제 아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무한한 노력을 강요했고 데카르트에게 ‘단념’은 인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칸트는 “할 수 없는 것은 할 수 없다. 단념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자.”라 했다. 이를 ‘적극적인 단념’이라 했다. 우리의 인식은 물자체에 닿을 수가 없으므로 이데아에 이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인간이 가능한 법위는 개개인이 갖는 인지 능력으로 이를 수 있는 범위 이내일 뿐이다. 이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5)이성으로 지각의 한계를 인식하다: 초월론적 주관성

  칸트는 “인간이 대상을 인식해야 비로소 대상은 대상으로서 출현한다.”라 하자 ‘현상계’가 주목을 모았다. 현상계는 세계의 전부는 아니지만 제한된 인간의 능력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현상계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후설과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출발시켰다.

  인간은 자신의 지각능력과 인식능력의 한계를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즉, ‘제한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다고 깨닫는 이성’을 가진 존재는 인간뿐이므로 인간이야말로 이 현상계의 제왕이며 입법자다.

  데카르트가 추구한 인간 이성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그럭저럭 이겼다고 할 수 있다. 이데아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법위 내에서만 승리를 확정지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함으로써 이성적인 인식이 오히려 절대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칸트의 주장은 ‘신과는 헤어졌지만 이성에 의해 인식의 한계를 극복한 인간은 최고’라는 것이다. 칸트가 말하는 초월론적 주관성이란 ‘인간은 다른 생물에게는 없는,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새나 개와 같은 다른 동물도 인식능력이 오히려 인간을 초월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들의 인식능력 한계는 알지 못한다. 이를 알 수 있는 존재는 이성을 가진 인간뿐이다. 이성은 인식을 초월한 능력이다. 이것이 칸트가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이다. 그래서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자연(=현상)도 뛰어넘은 이성을 가진 인간은 대단하다. 칸트는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와 달리 신과의 관계에서 ‘신의 세계는 모른다’며 한계를 인정하고 자유롭게 진정한 계몽적 이성의 길을 걸었다.


6. 헤겔, 역사도 이성으로 움직인다.

1)역사를 움직이는 ‘절대정신’

  헤겔은 칸트를 이어 “이성은 더욱 발휘될 수 있다. 역사도 움직인다.”라고 했다. 헤겔은 칸트의 원리적인 이성을 확대하여 인류 역사의 발전도 인간의 이성 덕분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헤겔은 단순한 사람의 이성을 뛰어넘은 이성, 역사와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이 되는 이성을 설정해야 헸다. 이렇게 해서 생각해낸 것이 ‘절대정신’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원천이다.

  대체로 물질은 엔트로피(확산의 정도)가 증가하는 방향,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질서화의 방향으로 향하기에 일종의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적 같은 의식의 근본에 있는 것이 정신으로, 역사는 정신이 인간의 활동을 통해 그 본질을 실현하는, 즉 ‘절대정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헤겔은 생각했다. 인류의 진보와 역사의 진행을 정신이라는 주인공이 자기실현을 해나가는 성장이야기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에서 역사 진화의 승리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헤겔은 역사의 진화 현상을 단순한 역사로 해석하려하지 않고 거기에 있는 보편적 ‘운동성’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 유명한 ‘변증법’이다.

2)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변증법이란 사물의 현상에 대해 설명할 때 ‘테제(正, 인식의 출발점이 되는 주장)’외 ‘안티테제(反, 제제를 부정하는 명제)’가 갈등(合, 아우프헤벤)해서 ‘진테제(앞의 두 제제를 통합한 것)’가 되는 세 단계를 거쳐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3)인간 이성의 승리

  헤겔은 칸트가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이 마침내 절대정신으로 연결되었으며, 인간이 우주의 완성작품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만들어 낸 예술의 이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반대한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헤겔에서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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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종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6.13 헤겔은 칸트가 말한 초월론적 주관성이 마침내 절대정신으로 연결되었으며, 인간이 우주의 완성작품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인간이 만들어 낸 예술의 이름다움이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뛰어나다고 말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반대한 것이다. 데카르트와 칸트를 거쳐 헤겔에서 완성되었다.

    여기서 근대 예술이 자연의 모방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칸트의 미학을 한층 더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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