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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읽는 힘/사이토 타카시(6)

작성자신종찬|작성시간16.06.14|조회수161 목록 댓글 0

8. 하이데거, 이 세계에 있다는 것

1)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하고 싶었던 말

  니체가 말한 각오를 좀 더 철학적으로 해석한 이가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현상학을 제창한 후설(1859~1938)의 제자여서 후설의 영향도 받았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돌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그는 존재와 시간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비본래적인 삶,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사람은 혼자 태어나서 혼자서 죽는데, 이를 수다로 얼버무리거나 눈을 돌리며 살고 있다면서, 이는 본래의 삶이 아니라고 했다. 본래의 삶이란 니체가 말한 대로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어차피 죽는 존재이므로 이를 예측해 각오를 하고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한다. 이를 하이데거의 선구적 각오성이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는 파도처럼 밀려와 현재가 된다. 즉 인간은 시간과 뗄 수 없는 시간적 존재. 다른 사물과 달리 인간의 존재에는 과거, 현재 및 미래라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다르다. 과거 철학자들은 간과했지만, 하이데거는 시간이라는 요소를 철학에 도입했다. 인간이라는 물음에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고, 현재 어떻게 살고 있으며, 미래를 어떻게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부분까지 보지 않으면 현실에 존재하는 인간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2)죽음을 각오하는 삶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것으로 삶의 가치관이 크게 바뀔 것이다. 한정된 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가 아닌 현재를 충실히 살기 위해서 배운다.


3)세계 속에서 우리는 만난다.: 세계 내 존재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내존재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인간은 물건과도 사람과도 도구 연관에 의해 이어져 형성된다. 완전히 고립된 남자나 여자가 만날 수는 없다. 나아가 인간은 곁에 좋아하는 사물을 둠으로써 자신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더 나아가 진드기는 진드기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감각이 다르면 인식이 다르고 인식이 다르면 세계가 달라지므로 개와 인간도 다른 세계를 산다.

  인간끼리도 각자 인식의 범위 내에서 세계가 다르고, 우리가 사는 세계는 우리 자신이 선택해 만든 자신의 세계다. 단순히 던져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든 세계다.


3)한 사람 한 사람이 살기 위한 철학

  하이데거는 개개인의 삶을 포함한 철학을 만들어냈다. 그전까지 철학은 인간이란?’, ‘행복한 삶이라?’처럼 본질적=일반적이라는 전제 아래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을 때 하이데거는 철학은 개별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각자의 인생은 각자 자신이 각오하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은 니체의 흐름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완전 연소한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 자체는 오래된 것이다.

  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온화하게 안녕, 고마웠어요.”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인간은 왜 두려워할까? 인간은 죽음을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을 선구적으로 깨닫고 아직 이곳에 없는 죽음을 불안해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어차피 죽음을 예측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예측해 불안에 빠지기보다는 각오를 하는 편이 지금의 삶을 충실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기력과 불안,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향해서 가는 것이므로 지금을 충실하게 살라는 의미다. 여기에는 다음에 언급할 실존주의적인 반전의 의지같은 것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반전이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삶을 스스로 되찾는다는 의미다.

, “더 이상 아무도 믿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내 자신으로 살겠다.”는 각오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4)건전한 자기긍정심을 갖자

  살다보면 세상이 싫어지고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이런 혐오감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에 사람을 악순환에 빠지게 한다. 결국 불안감이 절망감으로 바뀌어 죽으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내 목숨을 간단히 끊지 않기 위해서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마음을 정돈하는 기술을 익혀두어야 한다. 큰일이 생겨 불안할 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일어나자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자기긍정감이 꼭 필요하다.

  건전한 자기 긍정감이 없는 사람이 걷는 길은 두 가지다. 자기부정이나 타인부정이 그것이다. 극단적이 되면 자기를 부정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다.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타인부정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자기부정이 있기에 자신을 죽이는 것과 같다. 무차별 살인을 저치를 사람은 자기긍정감이 크게 부족하다.

  자긍심을 갖기 위해 어려서부터 많이 칭찬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질책 없이 오로지 칭찬만 듣고 자란 사람은 성인이 되어 칭찬을 받지 못하면 무너질 수 있다. 칭찬도 필요하지만 어려움을 겪고 극복했을 때 비로소 칭찬해야 어려움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교육이란 지식을 얻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의미 있다는 정신을 키우는데 있다. 교육이란 극복하는 것으로 배움의 의지를 키우고 새롭게 한 자신을 긍정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 초인으로 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을 극복하면 자기긍정감이 생긴다. 고난을 겪어야 자신을 긍정하기 더 쉬워진다. 명확한 목표가 있으면 자신을 극복하기 쉽다. 하이데거가 '죽음을 각오하고 산다.'는 의미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문제를 스스로 설정함으로써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는 강한 마음을 만들자는 뜻이다.


5)편견은 괄호 안에 넣자: 후설의 현상학

  후설(1859~1938)은 기존의 이성주의에 위기감을 느껴 이를 극복하고자 현상학을 들고 나왔다. 하이데거가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는 명제를 세운 것도 스승인 후설의 영향이다. 그는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이라는 책에서 최종적으로 이성을 믿어도 좋지만, 그때 색안경이나 선입견 같은 독사(Doxa, 편견)에 주의하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편견을 갖지 않으려면 확실하지 않는 것은 전부 괄호 안에 넣어 판단을 보류하라고 제안한다. 진짜 지식(episteme)을 알려면 먼저 독사를 떼어내 투명성을 확보하라 했다. 현상학에서는 독사를 괄호 안에 넣어 판단행위를 멈추는 것을 에포케(ephoche)라 한다. 이는유일하게 믿는 것은 지금 의심하고 있는 내 자신뿐이라는 데카르트 방식에 기원한다.

  후설은 데카르트 방식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만약 사과가 있다면 이 과일은 진홍색으로 빛나는데, 오른쪽에 1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상처가 나았다.’하는 식으로 조서를 쓰듯이 세밀하게 관찰하여 알게 된 것을 신중히 쓴다. 다른 사람이 이 글을 읽었을 때 100개의 사과 중에서 그 사과는 이것이다.’하고 식별할 수 있도록 쓰는 것이 현상학적 기술이다.

  이 정도로 세밀히 관찰하고 신중하게 기술하면 대상에 애정이 싹튼다. 그래서 세상에 똑 같은 것이 없음을 실감함으로써 그런 유일한 존재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놀람과 감동을 느낀다. 이런 신선한 놀람을 세상의 모든 현상에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현상학의 큰 장점이다. 화가가 대상을 그리는 것도 현상학적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현상학에서 관찰을 기술하는 이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해 놀란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거기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발견이라고 해서 꼭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봤을 때 이 사과는 다른 것보다 반짝거린다.’ 또는 꼭지 옆에 작은 상처가 있다.’ 하는 식으로 다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신선하게 다가오는 부분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 발견은 신선함, 놀라움과 감동을 가져온다. 후설이 쓴 문장이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을 버리면, 편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관찰한 그대로 눈앞의 세계에 대해 다시 신선하게 감동할 수 있는 직관력을 되찾자는 걸 알 수 있다.


6)본질은 직관으로 파악하라.

  후설은 인간에게는 본질을 파악하는 직관이 본질직관이 있다고 말한다. 의자는 다리가 몇 개이든 간에 등받이가 있건 없건 저것은 의자라는 직관이 있다. 후설은 머릿속에서 수정을 가하는 것을 상상력에 의한 자유변경’, 판단할 때 사용하는 직관을 본질직관이라고 했다. 현상학적 접근으로 물질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던 후설은 신중한 관찰과 기술만으로는 부족하여, 본질직관을 사용하지 않으면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앞의 예처럼 의자가 아니고 사람의 권리표현의 자유가 되면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부터가 도를 넘는 것이지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모두 이쯤이겠지하고 판단을 내리는데 모두 본질직관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산을 그리거나 꽃을 그릴 때 현상을 그리는데 그치지 않고 본질을 담아내야 훌륭한 작품이 된다.

  그래야 그 그림에 사람들이 감동한다. 그것은 꼭 사진 같은 그림일 필요는 없다. 가령 그 꽃과 똑같지 않아도 꽃의 본질을 담았다면 그 그림은 생명을 갖는다. 반대로 사진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이라고 해도 꽃의 본질이 담겨 있지 않으면 훌륭한 그림이 될 수 없다.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거기에 본질이 담겨 있어서 훌륭하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봤을 때 본질이 다가와서 그려진 내용 이상의 것을 느껴 감동한다. 페르메이르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를 예를 들겠다. 이 그림에서 미인이 아니더라도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본질로 나타나 있기에 미인보다 보통의 여인이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이 아름다움은 본질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삶의 한 부분을 그대로 떼어낸 듯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느낄 수 있다. 사람이 일을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 그림은 순간이지만 영원이기도 하다. 이런 본질을 사로잡는 표현이 가능해질 때, 사람은 거시서 자신의 인생을 배운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또는 아름다움이다하는 식으로 눈을 뜨게 된다. 후설은 현상학도 그런 경지를 목표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설에게 영향을 받은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상학은 발자크, 프루스트, 발레리, 세잔의 작업처럼 힘든 작업이다. 그것은 동일한 종류의 주의와 驚異 때문이고, 의식에 대한 동일한 요구 때문이며, 세계 또는 역사의 의미까지 태동상태에서 알려고 하는 동일한 의지 때문이다.

  후설은 이성주의가 위기라는 걸 알았지만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다는 결론에 최종적으로 이르렀기에 이성을 긍정하였다. 이성의 작용으로 본질을 파악하고 기술할 수 있다면 이성이 있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다.


7)주관의 공통부분을 중시하다: 間主觀性

  현상학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 즉 생활세계의 감각을 매우 중요시한다. ‘직관은 생활세계에서 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 세계에서는 100%라는 순수한 세계를 설정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후설은 이것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린다. 과학도 우리가 평상시 생활하는 세계의 직관과 감각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과학이라 해도 100%를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후설은 이 점을 호소하기 위해 과학도 생활체계를 토대로 한다는 증명을 열심히 했다.

  후설은 생활체계의 중요성, 그곳에 사는 자신들의 감각의 중요성을 간주관성이라 했다. 이 말은 객관성성을 전제로 하는 대신 주관의 공통부분을 중시하지는 뜻이다. 왜 완전한 객관성을 추구해서는 안 될까. 그것은 순수하게 객관성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뿐이다. ‘객관적으로 봐서라는 표현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주관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주관만 갖고 있는 인간이 사회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인식할 수 없는 객관성이 아니라 주관과 주관 사이, 즉 간주관성이라고 후설을 생각했다. 간주관성은 공통주관성이라고도 하는데, 요컨대 서로의 주관이 공통으로 갖는 부분이다. 여러 개의 주관이 있고 거기에 공통적인 것이 있으면 그것은 완정 100%는 아니지만 대략 객관성에 가깝다고 생각해도 된다는 말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기독교에서 100%객관적인 정답이 있다는 오히려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요즘 배심원제도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8)이성보다는 신체가 중요하다: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

  생활세계라는 의식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가 모리스 메를로퐁티(1908~1961). 그는 인간은 신체적 존재로서 이 세계에 산다.’라 하였다. 후설도 신체에 대해 말했지만 그가 가진 생각의 기본은 의식은 지향성 을 가진다.’였다. 후설의 생각은 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의식이므로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대로 육체와 이성의 관계는 이성>육체가 되어버렸다. 고대 그리스의 이성>감각의 사상 이래 데카르트가 심신이원론을 주장하였지만 이성이 항상 우위에 있었다.

  그러나 메를로퐁티가 인간은 신체적 존재로서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상을 기본으로 하면 의식 역시 신체의 일부라는 말이니 이성<신체가 된다. 인간은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 많기 때문에 생활세계를 중시하면 이렇게 생각해야 무리가 없다. , 신체가 바뀌면 의식도 변화한다.

9)신체가 세계를 만든다.

  인간의 신체성은 문화의 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신체는 단순한 생물적인 신체가 아니라 문화를 짊어지고 있다. 음식 습관도 어릴 적 혀에 익은 것이 평생의 입맛을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음식 취향이 그 사람의 신체성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손맛과 향토요리가 몇 대에 걸쳐 이어지는 것도 미각이 신체성으로 이어지는 문화인 까닭이다. 그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우린 신체적인 존재로서 살고 있다.’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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