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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히메현 이마바리4 - 오시마섬 해적박물관에 무라카미씨!

작성자영파|작성시간26.06.12|조회수58 목록 댓글 0

 

에히메현 이마바리4 - 오시마섬 해적 박물관에서 무라카미 타케요시를 생각하다!

 

 

여행 사흘째인 2025년 8월 8일 마쓰야마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마바리역에 도착해 코인로카에 배낭을

넣고 인포메이션센타에 들른후 오시마섬의 무라카미 해적 박물관을 보기로 하고 버스를 타고

큰 현수교 다리를 건너 오시마섬에 도착해 오시마 정류소에서 도노우라러 가는 로컬 버스를 갈아탑니다.

 

 

시코쿠섬 이마바리에서 세토나이카이(세토내해에 떠 있는 섬들에 놓인 다리를 지나면 최종적

으로 육지인  혼슈로 건너가니 오시마히카타지마 오미시마 이쿠치지마 세토다 -

인노시마 무카이시마를 지나면 육지인 오노미치시가 나오고..... 북상하면 히로시마가 됩니다.

 

 

에히메현 이마바라시 미야쿠보초 (愛媛県 今治市 宮窪町 宮窪 1285) 에 자리잡은 무라카미

수군(해적 박물관 村上 海賊 ミュ-ジアム은 16세기 센고쿠(戰國)

시대에 바다의 다이묘(영주) ” 로 불리던세토 내해를 지배한 무라카미 수군의 역사 박물관입니다.

 

 

세토내해 게이요제도에 '무라카미라는 성씨를 가진 3개 가문의 해적이 있었으니 인노시마섬 무라카미

가문은 혼슈섬쪽 항로를노시마섬 무라카미 가문은 세토내해 중앙해역을 지나가는

최단항로를구루시마섬 무라카미 가문은 시코쿠섬쪽 항로를 각각 장악해 세토내해를 3분한 것입니다.

 

 

아시카가 막부시절인 1467년에 쇼군의 후게자 다툼인 오닌의 난이 일어나..... 동서군 22

대군이 교토시내에서 무려 10년간이나 전투를 치러 교토 주택 3분지 1

불타고도 승부가 나지 않으니 논공행상이 이루어지지 못해 전비로 인해 파산한

지방의 무장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자립하니.... 이른바 130여년간 계속되는 센고쿠시대 입니다.

 

 

무라카미 타케요시 (村上武吉는 16세기 전국시대의 인물로 무라카미 수군의 두령인 실존했던

해적들 중의 한명이니 일본의 전국시대에 활동했으며 수군성인 노시마의

무라카미씨의 5대 당주로 가독 상속권을 쥐고 있던 가문에게서 가독을 빼앗아 상속하였다고 합니다.

 

 

무라카미 타케요시는 노시마()에 속하는 구루시마 해협의 무시나가토의 두 성에서

해적질을  하고 또한 동시에 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서

일종의 통행세인 세키제니를 징수하였으며 그리고 바다의 용병으로서 활약하였습니다.

 

 

타케요시는 이츠쿠시마 해전(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의 편을 들어 스에 하루카타와 싸웠으며 이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지배 하에서 치쿠젠부젠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모리 가문을 도왔습니다.

 

 

이츠쿠시마 해전을 이야기 하기 전에 일본에서 최초의 큰 해전은 겐페이 전쟁시기인 1185년에 벌어진

단노우라 해전인데..... 헤이안(교토시대에 일왕(천황)의 권력은 외척인 후지와라씨에게 넘어

갔고  후지와라씨가 분열해 다투자 무장들인 겐지(源 미나모토씨와 타이라(平 헤이시씨가 부상합니다.

 

 

미나모토 (源 겐지요시쓰네와 노리요리가 이끄는 겐지 군은 혼슈에서 다이라(씨의 주요 거점

인 이치노다니성에서 첫 번째 공세를 시작했고 헤이시는 시코쿠로 후퇴했는데......

겐지군은 수군을 갖춘 후에  헤이시의 본성인 이치노다니를 공략하기 까지는 거의 1년이 걸렸습니다.

 

 

헤이시는 시코쿠의 봉화를 보고 겐지군이 육지로부터 공격할 줄 알고 모두 배에 승선했는데 이는 기만술이었고,

겐지 씨는 수군을 기다려 바다에서 헤이시를 섬멸하려고 하였으니 헤이시가

임시 황궁을 설치한 야시마는 함락되었고 다시 헤이시는 안토쿠왕(천황과 함께 3종 신기를 가지고 도망칩니다.

 

 

한달 후 겐지 수군과 헤이시 수군은 좁은 시모노세키 해협 단노우라에서 맞붙었는데 처음에는 활로

싸움을  하다가 이후 갈고리로 상대방 배에 걸은후 건너가서 육박전으로 전개

되었는데 항해술에 능한 헤이시 수군은 해류를 잘 이용하여 처음에는 싸움을 우세하게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헤이시 측 장수였던 다구치 시게요시 (田口重能가 겐지 측에 배신해 안토쿠왕(천황

신기가 있는 배를 말해주자 겐지는 이 배에 공격을 집중하였고전세의 흐름이 바뀌게 됩니다.

 

 

헤이시의 많은 무사와 안토쿠 왕(천황), 할머니이자 타이라 기요모리의 미망인인 도키코는 패배가 확실

해지자 굴욕을 당하기 보다는 죽기로 결심하고 일왕(천황과 천황의 권력을 상징하는

삼종 신기를 품은채 바다에 몸을 던지니 승리한 겐지씨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우니 일본의 1차 막부입니다.

 

 

그후 센고쿠시대에 서부 일본에서 두각을 나타낸 자는 오우치씨로 백제 성왕의 아들 임성태자의 25세손

오우치 요시히로는 야마구치의 슈고(守護 수호가 되고 1395년에는 북규슈 까지 지배

하며 1399년에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을 주면 "왜구 (倭寇를 소탕해 주겠다고 제의합니다

 

 

후손 오우치 마사히로 는 일본 서부 6개국 수호로 1467년 무로마치 (室町막부 후계자 전쟁인

오닌의난 에 2만 대군으로 참가하여 아들편에 섰고 31대 오우치 요시타카는 교토

야마시로등 7개국 수호로 최전성기를 구가하니 선교사 프란시스 사비에르에게 선교를 허락합니다.

 

 

오우치 요시타카가 야마구치등 6국을 돌보지 않고 교토로 올라가 막부를 좌지우지 하며 중앙정치를 하자

엄청난 군비로 재정이 어려워지니 망할까 걱정한 신하인 스에 하루타카가 모반을 일으켜서 죽습니다!

 

 

그전에 모리(毛利모토나리는 오우치 요시타카에게 귀부한후 요시다군 산성 전투에서 이즈모의

아마고 3만 대군을 물리치고 명성을 얻었는데 주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대를

이끌고 이쓰쿠시마 전투(해전에서 스에씨를 유인하여 급습해 죽이고는

서부 일본 6개국 수호가 되는데...... 이때 무라카미 타케요시가 수군을 이끌고 도운 것입니다.

 

 

모리씨는 이즈모로 진격해 아마고씨를 죽이고 7개국을 차지한 후에는 자기 분수를 알고 교토 조정에 대적

하는  일을 삼가니.... 후일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는 가토 등이 모두 1만인데 비해 무려 3만 대군

으로 임진왜란에 침전했고 1600년에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오사카성에 머무르며 몸을 보전 합니다.

 

 

그런데 오와리(나고야의 오다 노부나가가 도쿠가와씨와 동맹을 맺고는 교토로 진출해 일본 통일을 시작하면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의 선언으로 반 노누나가 전선이 만들어지니 에치젠(후쿠이)의 아사쿠사씨,

오미의 아사이씨교토의 미요시씨에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 그리고 가이국(야마나시)의 다케다 신겐입니다.

 

 

이 중에 현재 오사카성 자리을 차지한 이시야마 혼간지의 겐뇨와 전쟁은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 무장인

하시바 히데요시등이 전력을 기울였는데도 무장 승려들인 네고로슈와 사이카슈 조총

부대등이 가세하고 여기에 히로시마의 모리씨가 무라카미 수군을 동원하면서 무려 10년을 끌게 됩니다.

 

 

1576년 봄 켄뇨가 거병하니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명해 이시야마 혼간지를 3방향에서 포위했으나

키즈(木津 오사카의 나니와구와 오간(楼岸 오사카시 츄오구을 통해 해상에서 물자를 공급

받으니 키즈를 공격하자 역으로 1만 이상의 대군을 풀어 오다군을 격퇴하고 텐노지 요새까지 쳐들어 옵니다.

 

 

미츠히데는 텐노지 성채에 틀어박혀 원군을 요청하니 노부나가군 병사들의 집결이 늦어지자 성미 급한

노부나가는 3천명만 동원해 요새를 포위하던 1만 5천명 혼간지 군에게 싸움을 걸어 포위를 돌파

하고 아케치 군과 합류해 격퇴전에 나서니 혼간지군이 후퇴하는지라 이시야마혼간지를 완전히 포위합니다.

 

 

봉쇄를 당한 혼간지는 모리측에 구원을 요청했고모리는 무라카미 수군 등 700척을 동원해

물자를 싣고 나타나니, 이에 노부나가 측은 구키 수군 등 300척을 동원해 봉쇄를

감행했으나  숫자에서 앞섰던 모리측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워 대승리를 거두니

1차 키즈가와 해전으로...... 노부나가는 삼면의 포위만 강화하고 병사를 철수시킵니다.

 

 

1차 키즈가와 해전에서 패배한후 노부나가는 구키 요시타카에게 명해 대포를 장비한 배를 건조하고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도 배를 건조하도록해 구키의 선단은 오오미나토를 출발하여 오사카를 향하니 사이가 측의

선단이 공격했으나 구키 쪽이 대포를 사용해 압도해버리고 7월 17일에는 사카이에 도착해 항로를 봉쇄합니다.

 

 

1577년 11월 6일 모리 측에서 무라카미 수군등 600척을 끌고 키즈가와로 나와 또 다시

화공을 시도했으나구키 요시타카는 상대편 다이묘가 탑승한 군함을 파악한후

그 배에 장갑선  텟코센을 접근시켜 일제 포격으로 침묵시키고 밀착했을시 철갑에

부딪혀 배를 파괴하는 전법을 구사해 모리 수군을 몰아내니 제2차 키즈가와 해전 입니다.

 

 

결국 혼간지 세력이 물러가자 하시바(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시야마 혼간지를 허물고 오사카성을 건축하는데

혼간지는 광대한 사원 토지를 소유하고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던 강력한 세력으로 최대 무역항

이었던  사카이에서 가까운 지리적 이점으로 신문물 도입도 활발해서 조총 부대를 가장 먼저 운용 했다고 합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죽고 여러 전투를 거쳐 일본 지배자가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을 원정하여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무라카미 타케요시는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또한 모리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이후에도 사이카 공략 요청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해 조치를 취하게 하자 1585년 6월에 가문

대대로 지내오던 수군성인 여기 노시마에서 퇴거하고 아키국 타케하라로

옮겼으며, 1588년에는 히데요시가 해적 금지령을 발표하니 금지령을 어겼기 때문에 죽을 뻔 합니다.

 

 

그렇지만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모리 가문 3형제로 양자로 갔기 때문에 성이 코바야카와로

바뀌었음), 토다 카츠타카의 주선으로 처분을 면하였지만 아키 타케하라

에서 퇴거하여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아카마가세키로 옮기게 됩니다.

 

 

그 후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전봉을 받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를 따라 규슈의 치쿠젠 나지마부젠 미노시마

등으로 이주하였으며 1591년에는 히데요시에 의해 나가토국(야마구치현인 오오츠군으로 이주합니다.

 

 

그 후 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아키 타케하라로 돌아왔는데 그 곳은 모리 테루모토의

영지였으며 아들인 무라카미 모토요시와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에서

이요 노시마로 복귀하여 세토 내해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으나/////  모리 테루모토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것이 되어버립니다.

 

 

1600년 여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무라카미 수군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오사카 만으로 출동

하여  오사카만에서 이세만에 걸친 해역을 봉쇄하여 동군을 경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인 쿠키의

수군과 협력하여 서군을 승리로 이끌려고 하였지만 모리 테루모토는 이요 마사키성의 공략을 명합니다.

 

 

그래서 수군을 둘로 나누어 오오사카 만에는 사촌인 무라카미 카케히로와 차남인 무라카미

카게치카에게 맡기고 자신은 장남인 무라카미 모토요시와 인노시마

무라카미의 수군인 무라카미 요시타다 등과 이요국(에히메현미츠카하마로 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오사카만의 수군은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에히메현)에 상륙한 수군의 육전대는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에게 야습을 받아 전멸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로 천하의 싸움이 판가름

나자 영지의 대부분을 잃은 모리 가문을 따라 야시로시마의 동부인 우치노뉴우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 때 당시에는 불과 120명의 부하와 영지 3000석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며,

점점 부하들은 떠나는 와중에 1604년 8월 22일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 무라카미 타케요시 (村上武吉는  통솔과 무력만  높은  전형적인

맹장형 무장으로 나오며 태합입지전’ 에도 등장하지만 해적들 대우가 좋지못한 작품이라

여기서도 능력치는 그저 그렇지만 해적들 중에서는 구키 요시타카와 더불어 제일 나은 수준입니다.

 

 

그리고 해적판 풍림화산인 나비의 진을 가지고 있어서 적으로 만날 경우 가장 피곤한

상대이기도  하다는데..... 란마의 장 시나리오 까지는 지지 다이묘가

고노 가문인데 이츠쿠시마 해전 이벤트를 볼 경우 지지 다이묘가 모리 가문으로 바뀝니다.

 

 

2013년에 와다 료가 집필한 무라카미 해적의 딸’ 이란 소설은 실존했던 무라카미 타케요시의 딸을 모티브

 한  역사소설로 그 딸에게 쿄우(란 이름을 붙여서 서양 혼혈로 그려지며 제35회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상 수상작인데.... 요시다 시로가 작화를 맡아 만화판을 연재했으며 2019년에 완결되었습니다.

 

 

모리 모토나리의 3남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가 무라카미의 해적 세력에게 도움을 청할 때

배를 단 하루만 빌려 달라고 해서 도움을 받은 일화가 유명한데....

모리 가문 측에서는 어차피 전투는 하루 안에 끝날 거라며 무라카미 세력을 띄워 준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모리 가문에게 엄청 충성한거 같지만 모리와 규슈의 크리스찬 영주인

오토모 간의 대립 때 오토모 가문으로 잠깐 전향했던 적도

있었으며 또한 미요시 가문의 전성기 때 미요시의 편을 들은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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